
- 곁봄
- 만남을 통한 배움, 그리고 그 배움을 매듭짓는 방식
- 박형주 _하자센터 기획부장
- 201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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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한 명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수많은 세월을 겪어온 노인세대가 가지고 있는 삶의 경험적 지혜가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더라도 지식과 지혜를 전수해주는 노인세대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는지 알 수 있다. 크리슨 혹스(Kristen Hawkes) 미국 유타대 인류학 교수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하드자(Hadza) 부족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할머니의 지식이 풍부할수록 양육조건이 나아지면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식량을 채집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 할머니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초기 인류의 화석을 연구하던 센트럴미시건대 레이첼 캐스파리(Rachel Caspari) 교수는 ‘할아버지들이 도구 제작, 생존방법, 문화예술 등에 대한 축척된 지식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해준 덕분에 인류가 풍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초기 인류는 할아버지가 될 만한 나이인 30세에 도달하지 못한 채 죽어갔는데 후기 구석기에 접어들면서 호모사피엔스에게서 극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30세를 넘어 장수하는 인구가 많아진 것이다. 장수 인구가 많아진 덕분에 독성이 함유된 음식, 물이 풍부한 장소, 도구를 만드는 방법 등 중요한 기술과 지식을 전수해줄 수 있었고, 이는 부족의 생존에 지대한 역할을 하며 유대감을 구축하는 데도 핵심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는데 자기표현 방식이 세련되어지고 섬세한 도구를 제작하거나 종교적인 상징물을 만들어내는 일이 많아졌다(임동욱, 2011).
그러나 삶의 양식이 바뀌면서 배움의 양식 또한 변했다. 과거 지식과 문화를 전수해주던 노인세대가 예전처럼 큰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다. 지금은 인터넷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아이가 아프거나 고민이 있거나 모르는 게 있을 때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경험 있는 어른을 찾지 않고 인터넷의 검색창에 묻는다. 이러한 변화는 청소년들의 삶과 배움에 있어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IT기술의 폭발적 발전은 과거에 비해 청소년들에게 경험할 수 있는 폭과 범위를 엄청나게 확대해 주었지만 정작 스스로의 활동을 통한 다른 사람이나 자연 등 다른 세계와 관계할 수 있는 기회를 점차 축소시키고 있다. 즉 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은 양적으로 확대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직접 체험의 범위는 크게 위축되었다.
실제로 청소년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률이 증가하면서 온라인상의 집단적 상호작용은 증가했지만 이런 활동이 온라인에 집중되면서 인간관계를 더욱 개별화시켰다. 또한 집과 마을 그리고 골목길에서 어른들이나 나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터득할 수 있는 생활 지혜의 습득 기회나 삶의 연습은 상당 부분 형식화된 과외 체험활동으로 대체되거나 무균실과 같은 교실 공간에 갇혀버렸다. 그러면서 청소년은 실제 생활 속의 경험을 통해 처음 직면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순과 갈등들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생략한 채, 마치 자신이 세상 경험을 다해버린 것처럼 착각하는 ‘작은 어른’(이광호, 2003)이 되어간다.
바로 이 대목이 구체적 삶과 구체적으로 관계 맺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이 중요해지는 이유이다. 이때 문화예술교육은 만남을 통해 차이를 경험하고 낯선 사람을 만나 동료가 되고 공동의 작업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세대 간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마을과의 만남은 문화예술교육의 아주 구체적 생태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과의 연계성을 강화하고 다양한 협력의 틀과 협업을 통해 기존의 서비스 제공 방식의 프로그램으로부터 마을의 다양한 구성원이 참여하는 일상 환경 중심의 활동으로 실질적 전환이 필요하다. 통합예술교육연구소 다락(대표 권소정, 이하 ‘다락’)이 군포에서 지난 4월부터 진행한 <응답하라! 군포8414>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응답하라! 군포8414>는 군포 봉성농악의 유일한 전수자인 84세 심태섭 장인과 군포중학교 14세 청소년들이 만나 7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삶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성격 상 군포가 삶터가 아닌 다락만의 힘으로는 진행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지역자원을 연계하고 교육장소를 제공해 준 당동청소년문화의집(관장 김지수), 심태섭 장인을 소개해 주고 관련 자료를 제공해 준 군포문화원(원장 김민재), 온새미로 연극반, 사물놀이반, 영상반 학생들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지원해 준 군포중학교(교장 권정희)가 이 프로그램을 위해 협력하고 협업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프로그램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청소년들은 심태섭 장인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장인의 삶과 정신은 물론 그들이 살아갈 군포의 근대사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다음 연극반, 사물놀이반, 영화반으로 나뉘어 각각 심태섭 할아버지의 삶을 재구성한 연극과 봉성농악을 기본 가락을 바탕으로 창작한 풍물놀이와 프로그램의 전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들어 냈다. 마지막으로 그 창작물들을 하나의 무대 공연물로 녹여내어 군포청소년연극제에서 선보였다. 그리고 한 달 뒤 군포중학교를 방문했던 당일, 좀 더 색다른 발표회가 있었다. 학교의 요청으로 연극제에 올렸던 공연과 그간의 활동내용을 심태섭 장인을 모시고 학교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자리였다.
연극과 풍물놀이,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상이 어우러진 공연은 무대 위 청소년들과 무대 아래 심태섭 장인 사이를 1인칭적인 관계로 이어주고 있었다.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당대의 인물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데 이러한 이해는 지적 이해가 아닌 정서적 접근으로 인물의 내면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인물과의 1인칭적 관계는 곧 감정이입의 단계를 거쳐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가 된다.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정서나 감정을 상상을 통해 느끼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날의 공연은 그 같은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성실하게 진행되었는지를 증명해 주었다. 또한 역사적 감정이입이 과거 사람들이나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학습자가 재구성하고 상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학습자의 몰입과 의미부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훌륭한 수업의 원리임을 입증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락이 마련한 그날의 자리는 함께 한 모든 이들이 느낌과 지혜를 주고받는 자리로서는 미흡한 면이 있었다. 일련의 배움을 매듭짓기 위해 다락이 선택한 방식은 표현을 통한 소통과 공유였다. 표현. 그것은 학습한 것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이 분명하다. 학습자를 자신의 학습 과정의 중심에 서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간 어떻게 학습하고 지내 왔는지 보여주면서 자기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심이며, 자기 생각을 남에게 드러냄으로써 관계를 위해 손을 내미는 일종의 말걸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표현은 학습자가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해 대화를 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바로 상호성이 핵심인 것이다. 그래야 학예회 같은 행사나 남에게 보여 주는 이벤트가 아닌 느낌과 지혜를 주고받는 쇼케이스이자 자기 성찰과 소통의 자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