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느긋한우정
- 삶을 담은 말 걸기
- 주성진 _문화용역
- 2022.09.29
-
지지봄봄 35호
-도구, 다정하고 날카로운
삶이 기획이 될 때
다섯 번째 삶. 문화용역 주성진 (feat. 분더캄머)
다섯 번째 삶. 문화용역 주성진 (feat. 분더캄머)
삶을 담은 말 걸기
문화용역 주성진
당연한 말 걸기 : 분더캄머의 나물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함께하자고 말 걸 때, 당신은 어떤 고민을 할까? 아마 가장 먼저 상대방을 떠올릴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좋아할 것인지. 다음으로는 어디서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궁리할 것이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장소, 그 사람이 좋아하는 분위기, 그 사람이 좋아하는 소재를 혼신의 힘을 다해 엮어 ‘기획적으로’ 말을 건넬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삶에서는.그 당연한 일이 우리의 일-기획-속에서도 당연한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업 주관처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부 기안문서로 보이는 문장을 복붙한 다음 갑자기 귀여운 이미지 하나를 첨부하고 재단 홈페이지에 사업 안내를 올린다. 그리고 그들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새로운 주체, 새로운 단체의 참여를 기다린다. 사업운영 단체는 그 비슷한 내용을 작은 글씨로 표에 꽉 채워 커리큘럼으로 더해 포스터를 만들다. 그리고 재단 게시판에 부착하고, (BTS와 경쟁해야하는) SNS에 그 이미지를 올려 전 세계를 향해 프로그램을 홍보한다.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함께할 지역 남녀노소의 참여를 기다린다.
그렇다면 삶을 담아 말을 건넨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올해 초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신박한 실험과 도전>사업의 심사과정에서 이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을 발견했다. 분더캄머(김진, 이말용, 정승혜, 추유선)팀의 <왁자지껄 흔한 여행>이라는 기획서에 담긴 참여자 모집방법이었다. “안양천에 돗자리를 펴고 나물을 다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걸어오는 주민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참여를 유도한다.” 이 짧은 한 문장은 그들의 고민의 과정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젊은 작가 네 명이 동네 천변에서 나물을 다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아마도 조금 어설플 것이다. 그러면 산책하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어머님들은 분명 반응할 것이다. “뭔 나물을 이리 많이 샀어?”, “아니, 비름나물은 그렇게 다듬으면 향이 날아가!”, “이건 취나물이지? 우리 그이도 참 잘 먹는데...”와 같이. 그때쯤 분더캄머의 작가들은 수줍게 말을 건넬 것이다. “어머니, 저희가 물정을 몰라서 너무 많이 샀네요. 저희 어차피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앉아서 좀 다듬어 가져가셔서 저녁에 식구 분들과 무쳐 드셔요!” 이쯤 되면 우리는 그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있다. 마법이 시작될 것이다. 나물에 홀려 돗자리에 앉아 나물을 다듬으려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어머님의 몸은 나물을 다듬던 기억을 소환하여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인생사를 털어놓게 될 것이다. “내가 처음 시집가서 취나물을 늘 친정에서 먹던 대로 들기름에 무쳤다가 시어머니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 취나물을 된장에 무쳐야지 도대체 누가 귀한 들기름에 무치느냐고 혼쭐을 내시는데...(눈물) 근데 시아버지는 나중에 나한테 몰래 들기름에 무쳐달라고...(웃음)” 그리고 나물을 다 다듬어 일어나는 어머님께 분더캄머의 작가들은 말을 건넬 것이다. “어머님, 오늘 들려주신 이야기 너무 재밌었어요. 저희는 이 동네 예술가들인데, 일주일에 한 번쯤 만나서 오늘처럼 같이 나물도 다듬고, 사는 이야기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놀려고 하는데 또 오시겠어요?”

<분더캄머, 왁자지껄 흔한 나물(사진제공 김진)>
이렇게 만난 예술교육단체-참여자의 관계와 활동이 재단 홈페이지 광고나 포스터를 통해 만난 경우와 같을 수 있을까?
최근 <신박한 실험과 도전> 사업 담당자 선생님께서 다른 건으로 전화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분더캄머팀의 연락처를 물었고, 김진 대표님께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연락을 드렸다. ‘제가 기획서를 읽고 팬이 되었는데요. 제가 컨설팅 비슷한 것도 하고 그러는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뭔가 함께 할 수 있다면 함께하고 싶어요’. 현장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상상이 현실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상상을 넘어선 재미도 함께. 남자 어린이가 한명 참여했는데, 할머니들이 빠른 속도로 나물을 다듬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연발했고, 무심한 듯 보이는 할머님들의 손은 점점 더 경쟁적으로 빨라져 빛의 속도를 돌파했다고 한다.
동기와 보상 : 개똥포럼의 레고 강아지
요즘 나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 ‘공공의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덜 공공스럽게 만드는 문화기획자’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나는 공공사업에 기대어 밥을 벌어 먹고살지만, 재미없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나에게 위의 소개는 단순한 수사가 아닌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작년 말 나는 경기문화재단에서 기안상 <2021 경기도 예술강사 역량 / 강화 포럼>이라고 불리는 행사의 기획을 맡게 되었다. 제목이 공공스러워 걱정이었지만, 다행히 담당 팀장님께서는 제목과 내용 그리고 형식에 대한 많은 부분을 기획자들(서지혜, 임상빈, 김태현, 주성진)을 믿고 맡겨주었다. 일단 제목부터 바꿨다. 다음과 같이.

<개똥포럼 웹 배너 이미지>
출발은 ‘누구에게 말을 건넬까?’, ‘우리는 어떤 예술교육 실천가들과 함께했을 때 더 재미있을까?’하는 질문이었다. 우리의 답은 기후, 동물권, 젠더 등과 같은 동시대 문제를 예술교육을 통해 해결해보고자 하는 덜 전통적인 방식을 실험하는 예술강사들이었다. 문제는 기안상의 제목을 붙이고, 기존의 재단 홍보채널만 활용해서는 이런 분들을 불러내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 공공기관의 역량강화 프로그램에는 전통적인 교육 방법론을 고수하시는 분들이 반복적으로 참여한다는 이상한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위의 제목과 함께, “예술교육이라는 것은 결국 강아지와 산책하듯 나와 다른 생명체와 안가본 길을 탐험하다가 개똥 봉투가 없는 것 같은 새로운 문제를 마주치고, 그 문제를 예술을 통해 어떻게 해결할지 가르치고 배우는 것 아닐까요?”하며 말을 건넸다. 현수막과 포스터 출력 비용을 아껴, 뉘앙스를 전달할 홍보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내용을 전달할 노션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좌) <개똥포럼 홍보 뮤직비디오 feat. 하림> https://youtu.be/LTAhPVY5lWM
(우) <똥포럼 노션 페이지(현재는 아카이빙 페이지)> https://garrulous-baboon-c75.notion.site/2021-017e6a9cbcd64ec2a0f571135201ea6a

<개똥포럼 레고 강아지와 포장 디자인>
이 레고 강아지의 핵심은 ‘조각난 몸뚱이’다. 참여자들은 랜덤으로 머리, 몸통, 다리/꼬리 중 한 부위만 완성할 수 있는 같은 부품 세 세트가 담긴 상자를 받는다. 사람들은 절대로 설명서를 먼저 읽지 않는다. 강아지레고를 받으면 일단 열고 조립을 하려고 하다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설명서를 본다. 그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기획하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넷플릭스 미드에서 자주 보는 마약을 거래하는 공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은 그대로 현실에 재현되었다. 사람들이 수줍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머리 있으신 분?”, “저 다리 있어요!”, “저 꼬리 하나만 있으면 완성이에요. 도와주세요!”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강아지 레고 부품을 모두 모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 순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돌아서지 않는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소개를 나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저는 천안에서 왔어요.” “멀리서 오셨네요! 저는 의왕에서 왔어요. 저는 연극을 하는데 선생님은 어떤 활동 하세요?” “어머 저도 연극하는데. 첫 세션 뭐 신청하셨어요? 어머! 저랑 같은 세션이네요. 혼자 와서 뻘쭘했는데 같이 들어가실래요?”
삶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말 걸기가 일-기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예술교육이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교육을 통해 아이의 창의성을 키우는 일, 마을 공동체를 공고히 하는 일, 지역문화생태계를 구축하는 일, 시민이 일상에서 예술을 향유하게 하는 일. 모두 당연히 옳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동기’와 ‘보상’을 설계하는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고 당연히 옳은 일이기에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그들도 당연히 따라 줄 것이라 착각한다. 세상이 몸에 좋은 거 다 아는 풀도, 나에게 먹이려면 싸먹을 고기를 함께 줘야 할 것 아닌가.
나는 강아지 게임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아주 작지만 분명한 ‘말 걸기’의 이유와 ‘보상’을 만들어 주고자 했다. 그래서 몇 몇 사람이나마 이야기를 나누었고, 동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분더캄머가 동네 어르신들께 “기후위기가 심각한데, 함께 마을을 산책하면서 변화를 살펴보고 기록합시다.”라고 말을 걸었다면, 개똥포럼이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위한 좋은 예술교육은 무엇인지 배워봅시다.”라고 말을 걸었다면... 뭐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참여했을지 모르겠지만, 재미는 덜 하지 않았을까? 우리 삶을 덜 닮지 않았을까?
2021년 개똥포럼의 내용이 궁금한데 참여하지 못해 아쉬웠던 분들을 위해, 개똥포럼 시즌2가 11월에 찾아옵니다! (경기문화재단 X 화성문화재단 X 김태현/ 서지혜/ 임상빈/ 제환정/ 주성진)
- 주성진 / 문화용역
- 공공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덜 공공스럽게 만드는 문화기획자. 문화예술과 관련된 고민을 듣고 (함께)생각하여 (함께)해결책을 찾는 컨설턴트. 최근에는 각종 문화기획 관련 교육과정을 무대로 멘토나 교수를 사칭하며 청년들에게 문화기획을 배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