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술너머
- 흙으로
- 이소요
- 2023.07.28
지지봄봄 37호
-조난의 계절에 필요한 힘
기술너머
흙으로
이소요(미술작가/연구자)
쓰레기 매립지에서

사진 1.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인간유래 폐기물(Anthropogenic Wastes)’ 연구프로젝트 웹페이지
https://anthropocenestudies.com/featured-research/
필자는 2022년부터 현재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의 ‘인간유래 폐기물(Anthopogenic Wastes)’ 연구프로젝트(사진 1)에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인간 활동으로 만들어지고, 옮겨지고, 묻혀서 마치 지층처럼 쌓이고 있는 쓰레기 매립지의 물성과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시작했으며, 지질학자, 미생물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예술가가 모여 협업한다. 미술작가인 필자는 이 연구팀에서 ‘시각화’를 담당하여 연구 과정을 사진과 비디오로 기록하는 일, 쓰레기 매립지에서 수집한 물질 시료를 표본화하는 일, 이 물질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살펴보는 일을 한다. 그 결과물은 자연과학 파트에서 연구자료로 활용하기도 하고, 미술관에서 예술작품 형식으로 전시하기도 한다(사진 4).
영어에서 ‘웨이스트(waste)’는 사용하고 버리는 ‘폐기물’을 뜻하면서 동사형으로 ‘낭비하다’라는 의미도 가진다. 우리는 몸, 집, 사회를 유지하는데 지구를 구성하는 여러 물질을 가져다 쓴다. 이때 꼭 필요한 만큼만 얻어서 완전히 소진하고, 부산물이 발생하더라도 자연계의 다른 곳으로 순환한다면 낭비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필요 없어져 버리는 것들을 돌아보면 과연 이 많은 양의 물질이 다른 곳에서 이용될 수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쌓이기만 하고 독이 되어 돌아오지 않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대체로 막연한 염려에 그칠 뿐. 분리하고 문밖에 내놓고 나면 그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상상까지 함께 떠나보내고, 곧 다시 새로운 물자를 소비하곤 한다.

사진 2. 이소요<플라스티쿼티>(2022) 비디오 스틸 이미지. 작가 제공
우리가 버리는 것 중 상당량이 매립지에 모인다. 이곳으로 들어간 물질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볼 기회는 흔치 않다. 종이나 양파 껍질 같은 것은 유기물이므로 분해하여 흙 속으로 사라지고, 플라스틱은 수백 년간 썩지 않은 채 쌓여가고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유래 폐기물’ 연구팀이 목격한 것은 이런 통념과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사용 종료한 지 30년쯤 지난 경기 남부의 어느 비위생 쓰레기 매립지에 지질시추기를 설치하고 지면에서 약 18미터 깊이까지 구멍을 내어 물질 시료를 뽑아냈다. 모래에 빨대를 꽂으면 대롱 안에 갇힌 모래를 밖으로 떠낼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로, 드릴을 연결한 지름 5㎝ 금속 파이프로 땅을 뚫으면서 그 안에 갇힌 물질을 꺼냈다. 예상대로 매립한 지 수십 년이 지난 물질 중에 석유 연료 기반 합성 플라스틱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플라스틱만 썩지 않아서가 아니라, 현대인의 삶을 지탱하는 물질 중 플라스틱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 고무, 나무, 종이, 섬유, 금속, 도자와 시멘트 등 다양한 물질도 함께 나왔다. 신문지처럼 얇은 종이도 활자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고(사진 2), 나무젓가락도 곰팡이 자국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매립물은 공기와 빛이 차단된 환경에서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분해란? 흙이란?
이런 상태를 목격하면서 분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무엇인지, 종이는 잘 썩고 플라스틱은 썩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 사실인지 정의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흙, 또는 토양은 광물, 그리고 광물을 토대로 살아가는 생물의 부산물과 사체가 섞이면서 만들어지는 물질이다. 사람의 물질대사와 생활을 통해 미처 다 분해되지 않은 물질 덩어리들은 다른 생물, 물과 바람 등 물리 화학적 힘에 의해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지면서 결국 더 이상 둘 이상의 단일 물질로 나누어지지 않는 상태로 분리되고, 또 그것끼리 결합하여 새로운 합성 물질이 되어가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지구의 물질성이 비균질한 만큼,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필요한 힘과 시간은 한 줄기 햇살과 초를 다투는 찰나일 수도 있고, 지표를 움직이는 마그마의 힘과 영겁의 세월일 수도 있는 것이다.플라스틱은 흙이 될 수 있는가?
석유계 플라스틱은 분해하지 않는가?
석유계 플라스틱은 부패하지 않는가?
석유계 플라스틱은 흙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가진 사람은 없지만, 필자는 적어도 ‘플라스틱은 썩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보다 ‘플라스틱이 언제 어떻게 썩을지 알지 못한다’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 더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은 페트나 폴리에틸렌 같은 석유계 플라스틱이 생물의 신체를 구성하는 셀룰로스, 라텍스, 송진과 마찬가지로 탄소를 포함하는 고분자화합물, 즉 유기물이라는 점이다. 이 세상에 동식물이 처음 진화했을 때 이것을 양분으로 삼아 분해하는 미생물이 더불어 생겨날 시간이 필요했고, 그 이전 분해되지 않은 채 고온 고압의 환경에서 퇴적되고 보존된 생물의 사체가 석탄과 석유 같은 화석연료가 되었다. 석유계 플라스틱은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보존된 엄청난 양의 생물 화석인 석유에서 연료를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를 가공하여 얻는다. 처음 개발되었을 때는 버리는 물질을 활용하여 목재와 동물의 뼈 등 자연물을 모방한 물성을 얻을 수 있어 자연보전과 경제성을 동시에 달성하는 신소재로 각광받았다.
우리가 간과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석유계 플라스틱의 종류, 즉 구성 요소와 분자 구조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어떤 것은 나뭇잎의 반들반들한 보호막인 왁스와 비슷하고, 어떤 것은 식물의 몸을 지탱하는 셀룰로스와 비슷하며, 어떤 것은 불에 타지 않고, 어떤 것은 자외선에 쉽게 부스러지고, 어떤 것은 환경호르몬을 가지며, 투명하고 잘 구겨지는 것이 있다. 반면 웬만한 충격에도 쉽게 깨지지 않는 덩어리를 구성하고, 또 열을 가하면 새롭게 성형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수많은 종류의 석유계 합성수지가 한 가지 방식, 한 가지 속도, 한 가지 힘으로 분해하여 모두 똑같이 자연으로, 혹은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진 3. 이소요<흙으로>(2023) 설치 부분. 작가 제공
필자는 2023년 한국과학기술원 지속가능환경연구단과 수림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쓰레기 매립지에서 얻은 다양한 물질 중 폴리에틸렌으로 만드는 ‘검정 비닐봉투’를 샘플링하여 주사전자현미경으로 1만 배 확대 관찰하였다(사진 3). 그 결과, 빛과 공기가 30년간 차단된 환경에서 검정 비닐봉투에 균열과 조각이 생겨났으며, 분해(degradation)가 일어났음을 확인하였다. 이미징 장비의 도움 없이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는 미시적 스케일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추적할 수 없는 물리적, 화학적, 그리고 생물학적 힘이 작용하며 폴리에틸렌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결합을 깨뜨리고 재배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정 비닐봉투는 물과 공기, 그리고 시선을 차단하여 그 속에 담는 물건을 한데 묶어 보호하는 하나의 막(membrane)으로 우리 신체를 구성하는 피부나 세포막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값싸고 하찮은 사물이기도 하며, 버려도 썩지 않고 축적되어 장차 우리 삶을 위협할 수도 있는 잠재적인 재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기물인 이 사물을 분해하여 양분을 얻는 균, 세균 등 생물이 발견되고 있으며, 장차 지구상 자원이 고갈되고 인간이 남긴 합성수지가 물질계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면 그것을 자원으로 이용하는 미생물 컨소시엄(microbial consortium)이 발달하게 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석유계 플라스틱도 자연에서 발생한 다른 고분자화합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닌 다른 행위자들의 힘으로 분해되고 또 ‘흙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사진 4. 이소요<플라스티쿼티 아카이브>(2022) 설치 부분. 김희수아트센터 제공
도와주신 분들(가나다순): 김양우, 센터코퍼레이션, 우주비, 인류세연구센터 “인간유래 폐기물” 연구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지속가능환경연구단
후원: 수림문화재단,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콘텐츠진흥원
- 이소요 / 미술작가. 연구자
- 사람과 함께해 온 생물의 문화사를 다루는 미술작가이다. 인간 활동으로 교란되는 환경에도 다양한 생태적 틈새와 삶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작가가 직접 수행하는 현장 조사와 재료 실험을 주된 창작 과정으로 여긴다. 렌슬리어 공과대학에서 예술·과학사 학제 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경기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호주현대미술관 등에서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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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이소요, 김희수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