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류기
- 여전히 빛나는 방황
- 이경렬 _변방의 북소리
- 2023.07.28
지지봄봄 37호
-조난의 계절에 필요한 힘
표류기
명함 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는다. 그럴 때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러 댄다. 단체가 있긴 하지만 단체라 부르기 민망한 데다 지역문화예술 단체인 ‘변방의 북소리’ 대표, 지역문화 활동가, 보산동 난민 활동가 중 딱히 하나를 직함으로 꼽기 어려워 명함 제작을 자꾸 미루게 된다. 이런 까닭에 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상대방에게 명함 대신 어색한 웃음을 건네기 바쁘다.여전히 빛나는 방황
이경렬(변방의 북소리)
2012~2018: 체급 차이로 허공에 주먹질
본디 내 정체성은 체육활동가이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제약 때문에 운동하지 못하는 이들을 조력하고, 체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차별에 항의하는 것에 매력을 느껴 시작한 일이다. 30대 후반까지 정부나 체육 기관, 관료들을 대상으로 시민사회운동을 펼쳤다. 활동이 쌓이면서 체급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당시 내가 속한 단체 구성원은 열에 여덟이 교수였다. 사무국은 활동가인 나만 빼고 전부 교수인 셈이었다. 그들은 정부나 기관 관료와 체급이 맞았고, 단체의 주요 활동은 정부 정책 감시와 대안 제시였다. 나는 줄곧 실눈을 뜬 채 개조식 문장에 숫자가 빽빽하게 채워진 예산안을 살펴봐야 했다. 몇 십억 넘는 사업비, 백억 넘는 대형 경기장 건설비 항목에 밑줄을 칠 때마다 풋살장 하나 없는 우리 동네를 떠올리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에서야 깨달았다. 내 체급은 3천 명 남짓한 사람들이 사는 내 고향 동두천시 보산동과 맞는다는 사실을.2017년 일본 도쿄에서 일본의 활동가들과 메가스포츠 이벤트를 비판하는 시위 행진을 하는 모습
2019: 동네책방 체류기
생활문화예술 기획자는 2018년 체육 시민사회 단체에서 퇴사하면서 얻게 된 타이틀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체육전공자가 문화예술교육을 한다고? 생활체육과 생활문화예술은 분야로 보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활동 내용으로 접근하면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일단 사람들과의 접촉이 필수이다. 그리고 논리를 뛰어넘는 표현과 소통으로 관계를 확장시키고 여물게 해준다.아무튼,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반년 정도 쉬다가 2019년 동두천시 체육회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 나는 동네책방 특급 단골손님이 된다. 집에서 체육회까지 도보로 20분 거리라 서울로 출퇴근할 때 비해 여가 시간이 갑절 넘게 늘어났다. 넉넉한 저녁 시간에 내가 택한 여가 활동은 동네책방 이용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책방을 드나들었다. 독서, 글쓰기, 독립출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능소화가 피던 초여름으로 기억한다. 나는 일주일에 세 번은 가뿐히 책방에 드나드는 특급 단골손님들을 꼬드겨 책방 이름을 내건 문집을 만들었다. 지역에 우리가 만든 문집이 나름 소문나자, 관내 문화 기관에서 책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동두천도서관이나 문화원과 책방이 연계한 프로그램이 개설됐다. 공짜 프로그램에 신난 단골들은 주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방에 와서 문화예술 활동을 만끽했다. 이때가 내 인생에서 문화예술 활동에 가장 심취했던 시기였다.
2019년 동네책방에서 ‘동두천 소설 쓰기’ 모임 종강 파티를 하는 모습
2020: 코로나로 박살 난 책방과 신생 단체
공공 문화예술 프로그램에 맛 들인 나는 2020년 새해가 밝자마자 책방지기와 단골손님들에게 비영리 임의단체를 만들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한 달 가까운 설득 끝에 비로소 지역 문화예술 단체 ‘변방의 북소리’를 설립했다. 고유번호증을 받아 들고 바로 공모 지원에 돌입했다. 그 결과 경기문화재단, 지역문화진흥원, 출판산업문화진흥원 공모에 선정됐다. 나는 변방의 북소리 활동에 집중하고자 체육회와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책방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할 생각에 가슴이 벅찼지만 그것도 잠시, 코로나 펜데믹이 전 세계를 덮쳐 버리고 만다. 공모사업은 비대면과 야외 활동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책방이 문제였다. 급격한 매출 저하로 존폐 위기를 맞았다. 결국 그해 12월, 책방은 폐업 절차를 밟는다. 단체의 근간이 사라지니 자연히 변방의 북소리 활동도 멈추었다. 책방지기는 남쪽 끝으로 거처를 옮겼고, 책방 손님들이었던 팀원들도 대부분 단체에서 탈퇴했다.2020년 동네책방에서 진행한 색연필 드로잉 모임 모습
2021: 코로나로 알게 된 독서 모임의 민낯
체육활동가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신참내기 지역문화예술 기획자로 반짝 데뷔했다가, 코로나19 여파로 거점 공간인 책방을 폐업하면서 정처 없이 떠돌이 신세가 된 2021년. 아무 활동을 못 하고 빌빌대던 중 다행히 문화원과 지역에 오래된 큰 서점에서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두 곳에서 독서 모임과 지역 잡지 출판 모임을 진행하게 되었다. 관내 기관과 생활문화시설과의 협력으로 활동 영역이 넓어진 효과가 있었지만, 무언가 겉도는 느낌이 가득했다. 구심점 없는 활동은 내 삶과 연결되지 않았다. 정처 없이 맴돌던 중 내가 사는 동네에서 외국인 노동자 백여 명이 코로나에 걸리는 일이 발생했다. 유례없는 집단감염을 겪으면서 그때서야 나는 내가 있는 자리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당시 동두천에서 일어난 코로나 감염 사례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불안은 상당했다. 버스나 지하철에 이주 외국인이 탑승하면 고개를 돌리거나 자리를 피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길에서도 외국인이 운전하는 차량이나 자전거가 지나가면 괜한 트집을 잡으며 험한 말을 내뱉는 이들이 많았다. 이 사태로 내가 진행하던 독서 모임의 민낯이 들춰졌다. 코로나로 한창 인권과 혐오에 관한 독서 모임을 이어갔지만, 예측하지 못한 상황 앞에서 독서는 무용했다.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다들 낯선 존재에게 피해를 볼까 봐 일면식도 없는 타자를 차별하고 무분별한 편견을 드러냈다. 책을 읽으면 인권을 옹호하고 차별에 저항하게 될 줄 알았던 순진함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이때부터 책에 나오지 않는 우리 동네의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기 시작했다. 동두천에 이주 외국인이 많은 이유가 궁금해서 유튜브, 언론보도, 연구자료를 살펴봤다. 그 결과 우리 동네인 보산동이 경기도 31개 시·군에서 인구 대비 난민과 미등록 이주 아동이 가장 많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인구 현황 자료를 보면 보산동이 얼마나 초국적인 동네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2022년 12월 기준 동두천시 전체 주민등록인구는 94,546명이다. 이 중 보산동 인구는 2,786명. 시 전체 인구 대비 3%에 불과한 수치다. 하지만 외국인 인구를 보면 보산동의 사정은 사뭇 달라진다. 같은 시기 동두천시 전체 등록외국인 수는 3,554명이다. 이 중 17%에 해당하는 974명이 보산동에 산다. 네 명 중 한 명이 이주 배경 외국인인 셈이다. 게다가 통계자료에 입력되지 않은 난민과 인도적 체류자 인원까지 합하면 보산동에 거주하는 이주 배경 외국인의 비율은 40%를 훌쩍 넘어선다. 보산동 소재 보산초등학교는 전교생 217명 중 97명(44%)이 이주 배경 아동이다. 양육자의 출신 국가를 따져보면 24개국에 달한다.
동두천은 경기도에서 난민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동네다. 2021년 기준 동두천의 등록외국인 난민 비율은 17%에 달한다. 이른바 한국의 대표 다문화 도시로 불리는 안산도 난민의 비율이 3%, 화성 2%, 시흥 1%인 것에 비하면 동두천은 난민들이 살기 좋은 도시로 불러도 무방한 곳이다. 또한 미등록 이주 아동 인구수도 경기도에서 안산 다음으로 높다.
그제야 나는 동네를 마주하게 되었다. 매일 먹고 자는 곳도 잘 모르면서 그간 지역 기반 문화예술교육을 펼친 것이 창피했다. 정부 상대로 허우적대면서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허무해 손에 잡히는 활동을 하고자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그저 동두천 출신이라는 것을 빌미로 다분히 피상적인 차원으로 지역 기반 문화예술활동을 진행한 것이다. 또한 내 편의에 맞춰 책과 글을 사용했다. 여러 고민과 반성 끝에 2022년 새해 기념으로 나는 활동 방향을 전환하기로 다짐한다. 책장에서 세상 읽기가 아닌 현장에서 세상 읽기로.
24개국 이주배경 아동이 재학 중인 보산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모습
2022: 현장에서 읽는 세상
현장은 멀리 있지 않다. 내 목소리가 닿는 곳, 언제든 오고 가는 곳이 바로 현장이다. 서가에서 고른 책을 꺼내 읽듯 관심 있는 곳에 가서 읽을거리를 찾아다녔다. 난민지원센터, 장애인학교, 정신건강복지센터, 스포츠책 독서 모임, 이주배경아동 지원단체, 지역사회보장협의체가 내 서가이다. 그렇다고 책을 멀리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읽을 책이 더 늘어났고, 삶과 맞닿은 생생한 독서를 하게 됐다. 이를테면 『있지만 없는 아이들』을 읽고 길 건너 사는 미등록 이주 아동에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철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타인을 듣는 시간』을 읽고 문화예술 영역에서 빠지기 쉬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대상화의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의 감정보다 그것을 전하는 자신의 감정에 더 취해’ 있는 활동을 금하고,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자신이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져 버린 사람’이 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그쳤다.현장에서 세상 읽기를 하면서 걸쳐 있는 단체와 모임만 예닐곱이 넘는다. 어느 때보다 바쁜 일정 속에서 활기찬 활동을 이어갔다. 만족감은 무척 컸지만, 벌이가 문제였다. 내가 하는 일들은 열에 아홉은 무보수 사회활동 또는 자원봉사이기 때문이다. 활동비가 나오는 공모사업은 때를 놓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반기가 돼서야 가까스로 중앙정부 기관이 주관하는 사업에서 일감을 받아 빚지지 않고 무사히 한 해를 보낼 수 있었다.
2022년 반년간 이주배경 이주 아동들과 함께한
‘놀이문화 실험’의 결과 보고회 장면. 행사 장소는 동두천 동광극장. ⓒ박상환
2023: 목적을 찾기 위한 빛나는 방황
2018년 동두천에 내려와 동네책방이란 세계 속에 빠져들었다면, 2023년은 완전히 동네에 빠져들었다. 이제는 동네가 그야말로 책방이 됐다. 책방처럼 폐업하는 일은 없겠지만, 마을 공동화는 항상 조심하면서 지낸다. 올해 나는 제 작년부터 쌓아온 활동을 토대로 구상한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난민을 다룬 책으로 독서 모임을 진행한 뒤 난민센터에 가서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고, 이주 배경 아동들과 동네에서 잘 노는 법도 탐구하고 있다. 체육활동가 경력이 참작되어 미등록 이주 아동의 스포츠 참여 권리 보장을 위한 시민사회운동도 펼친다. 그러다 장애인 체육 참여 조력 활동, 이 밖에도 청년정신건강복지 사업의 일환으로 정신질환 관련 독서 모임 운영도 자연스레 맡게 되었다.작년과 다르게 벌이와 봉사가 균형 잡힌 활동이어서 생활이 궁하지 않다. 다만 활동 내용이 좋게 말하면 복합적이고, 비판하자면 복잡해서 현기증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지역에 찰싹 달라붙은 활동이라 체류하는 줄 알았지만, 여전히 표류 중이다. 그렇지만 멀미 방지를 위해 귓불에 멀미약을 붙이는 것처럼, 바쁘게 움직이다 이따금 삶에 물음표가 생길 때마다 마음에 붙이는 문장이 있다. ‘표류는 어쩌면 목적을 찾기 위한 방황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전히 체육활동가 때나 지금이나 추구하는 건 매한가지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제약 때문에 문화예술 활동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조력하고, 사회에서 또는 동네에서 일어나는 편견과 차별을 문화예술로 저항하는 것. 그래서 요즘 나는 이곳저곳 부딪히며 표류해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길을 잃을 때 길을 떠난 이유가 반짝반짝 빛나는 법이니까.
2023년 이주배경 아동들과 ‘놀이터 그리기’ 모임하는 모습
- 이경렬 / 변방의 북소리
- 동두천에서 생활체육, 생활문화, 생활예술을 통해 안전하고 즐거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재미를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
(사진 제공. 이경렬, 박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