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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 질문에서 시작된 변화, 도시에서 예술의 역할을 찾다
  • 남수(남수현)
  • 2023.07.28

지지봄봄 37호

-조난의 계절에 필요한 힘

현장이 사랑한 현장
 
릴레이 인터뷰 : 남수가 묻고 고대웅 작가가 답하다

작은 질문에서 시작된 변화,
도시에서 예술의 역할을 찾다

남수(남수현)

작년 가을, 딱따구리 책방에서 인터뷰이로서 대화를 나눌 때 이 인터뷰가 릴레이 형식이라는 것을 듣고 바로 떠올린 사람이 있었다. 당시 내가 듣고 있던 수업인 <문화예술현장의 이해와 실습>과정에서 강의를 하셨던 고대웅 작가님이다.

형식적이고 별 재미없을 거라 예상하고 들어간 수업이었는데,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막연하고 어렵기만 하던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단어가 말랑말랑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고대웅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수업 중 현장학습을 을지로에서 했는데, 을지로 곳곳을 소개하는 목소리, 눈빛, 걸음걸이에서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골목을 앞장서 걷는 뒷모습을 보며 그가 걸어온 길이 더욱 궁금해졌다.

 
을지산수 프로젝트. 임수현 作
을지산수 프로젝트. 임수현 作


문화예술교육에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된 건지, 그리고 왜 을지로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나 나이가 들었구나, 하하. 9년 전이네요. 미대를 나오고 오랫동안 미술을 하면서 좀 의문이 들었어요. 뭔가를 만들고 내 실력을 향상하는 성취도 있고 작업도 즐거운데, 이게 나한테만 즐거운 일인 것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제 작품이 전시장에 가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즐거움이 전달되나, 혹은 내가 하고 싶던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나, 존재로서 유의미하냐는 의문이 들었고 좀 회의적이었어요. 그땐 4차 산업혁명 얘기가 한참 나올 때였어요.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면 3D 프린터가 집집마다 보급이 돼서 사라지는 직업이 생기겠지만, 예술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거든요. 실제 그럴까에 대한 의문이 큰 거예요. 예술이 진짜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럴 것 같다고 믿으니까 그냥 그렇게 얘기하는 건지 의문이 있었어요.

그 질문과 의문을 스스로 실험해 보는 작업을 했고 개인전으로 연결이 됐어요. 미술은 사실 뭔가가 바로 전달되기 어려운데 음악은 훨씬 소통이 잘 되잖아요. 음악하는 친구 네 명을 섭외했어요. 바이올린, 성악, 가야금, 기타 치는 버스커. 이 친구들과 각각 만날 참가자 세 명은 랜덤으로 모집했어요. 그런 다음, 예술가와 관객을 1대1로 처음 만나게 하고 아무 일이나 벌어지라고 둔 거죠. 카메라 두 대를 설치해 놓고, 30분 정도 계시라 하고 나왔어요. 예술가와 관객으로 만났으니 살아온 과정도 너무 다르고, 당연히 팀마다 감동도 다 달랐어요. 살면서 클래식이라고는 통화연결음으로 들은 게 전부였던 참가자에게 예원학교부터 쭉 수석을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바로 앞에서 연주를 들려줬어요. 그날 바이올리니스트 손가락 끝이 저렸다는 걸 아무도 몰랐는데, 그 참가자분은 알아차리고 손가락 괜찮으세요? 하며 걱정해 주시기도 했고요. 음악 교육을 받은 적 없는 버스킹 기타리스트와 예고, 미대 코스를 밟은 참가자가 만나 서로 해갈이 되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성악가는 상대 참가자가 아버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경쟁을 위한 노래만 하다가 유학 가기 직전에 어릴 적 아빠와 노래 부르던 추억을 떠올리며 함께 노래하는 장면도 있었어요. 그 과정들을 보며 예술이 필요한 거구나, 내가 이걸 업으로 삼으면 후회는 안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sea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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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새임과 오정근&이원자
<너와 나> 새임과 오정근&이원자
 
 
회의적이었던 부분을 어떻게 바꿔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만든 작업을 세운상가에서 전시했어요. 그때부터 더는 경쟁하는 미술을 안 하고 싶었어요. 사회적으로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교육을 공부해 보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교육대학원에 갔는데, 본교로 가면 하루 종일 학교에 묶여 있어야 하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연구만 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더 보고 싶어서, 낮에는 현장에 있고 저녁에 학교에 가는 걸 선택했어요. 그때 마침 을지로에 가게 됐죠.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시에 교육에 관한 이해도를 갖춰 가고, 또 여러 실험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한번은 문화예술 관련 공간 운영하는 분에게 지역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여쭤봤다가 호되게 혼난 적도 있어요. 예술가가 지역을 위해 뭔가 한다는 것만큼 나쁜 게 없다며, 작업실에서 네 작업이나 하라고. 그분도 뭘 하려다 좌절돼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 있었겠단 생각이 지금은 드는데, 그때는 젊은 패기로 ‘그래 남들이 못한 거 내가 해내리라’ 생각했어요. 그때 했던 모든 프로젝트가 실험이었어요. 저 스스로 만든 가설을 입증해 나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운이 좋았던 게 항상 제게 피드백을 해주거나 도와주는 분들이 계셨죠. 많은 보살핌과 보호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교육이나 역할을 더 고민하게 됐어요.

서로의 작업이나 활동을 보면서 배우게 되는 관계가 있는데, 을지로 안에서 그런 관계나 순간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공무원들과 일하면서 그분들이 일하는 태도에서 많이 배웠어요. 담당자는 자기 의지대로 사업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데 행정적으로 넘어야 할 산은 정말 많아요. 그래서 담당자들이 대부분 힘들어했어요. 그 힘듦이 짜증이나 화, 아니면 갑질 같은 형태로 표출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 같이 일하기 더 힘들어지죠. 그런데 같이 일했던 담당자 중에 어떻게 하면 자기가 이 안에서 최대한 도움이 될지 고민하고, 이들은 어떤 관점에서 이 사업을 보는지를 궁금해하는 분이 계셨어요.

재능기부가 당연시되는 분위기에 벽화가 도시재생의 최고의 성과로 여겨지던 때였는데요. 재료비로도 부족한 86만원 예산으로 벽화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어요. 이게 왜 진행하기 어려운 예산인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얘기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어요. 서울시 아동 심리 상담센터에서 보호받는 아이들과 같이 셔터 아트를 했어요. 미술 교육 봉사를 하시는 분들과 조를 짜고 아이들과 같이 그림을 그린 거예요. 사장님들이랑 논의하면서 시안도 정하고 신나게 그렸어요. 그 담당자분은 사비로 애들 간식을 사 오시고, 그다음 날 공장 사장님들은 아이들이 그림 그린 거 알고 우시고….

사장님들 입장에서는 공장이 쫓겨날 뻔하고 상황도 안 좋은데, 자기 손주 같은 애들이 와서 그림을 그려준 거 자체가 정말 고마웠다고 하셨어요. 예술하는 애들이 중간에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 신뢰와 관계들도 있었고요. 예산을 늘리거나 엄청난 결과물이 나온 것도 아닌데, 그 과정이 어땠느냐와 어떤 방향으로 갈지 고민했던 서로의 노력이 의미를 만들었어요. 돌아보면 정말 시답지 않은 것도 많이 물어봤거든요. 계약을 위해 사업자 만드는 과정에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주무관한테 물어봤어요. 나 같으면 화냈을 거예요. 서류 가지고 얘기하자면서 자세히 알려주시고, 일이 더디거나 안 되면 방어해 주셨어요. 그렇게 좋은 분들과 일하면서 좋은 양분을 많이 먹은 거 같아요.

저는 86만원 예산 일화가 인상적인데요. 금액이 말도 안 되게 적은데 안 하거나 예산을 늘린 게 아니라, 예산액 그대로 가치를 더 높인 사례여서 보람 있고 기억에 남는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반대로 가장 힘들었던 작업은 어떤 것이었나요?

고난이었던 거야 너무 많은데…, 고난 카드 10개 중에 뭘 얘기해야 내가 제일 불쌍해 보일까요? 하하, 근데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을지로가 되게 특수한 지역이기도 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살얼음판에 서 있었던 거죠. 그 블록이 재개발 예정지였어요. 공공에서 법을 만들어 다 쫓겨날 상황이었죠. 사장님들은 내 옆집이 쫓겨나는 것을 보았어요. 우리 집 건물주가 시행사랑 일대일로 책임지기로 계약을 했는데 재개발이 취소되니까 건물값 올라간 것까지 다 빚이 되어 버린 거죠. 물론 시행사는 파산하고 그냥 떴어요. 여기는 돈 많은 유지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시집와서 살다 나이 들고 자식들 다 떠나보낸 뒤 남편 없이 혼자 사는데, 갑자기 빚만 생긴 거예요. 심지어 몇 분은 자살도 하셨어요. 이런 일이 생긴 동네에 공공의 지원을 받은 제가 들어간거죠. 아저씨들이 봤을 때는 공공이 우리는 쫓아냈는데 젊은 예술가한테 공간을 지원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젠트리피케이션 얘기가 뉴스에도 계속 나오고 위협받으시는 거죠. 난 그거 알았으면 절대 안 들어갔어요. 그래서 그렇게 싫어하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안 거예요. 그때는 그냥 뭐 결이 달라서 싫어하시나 보다, 나는 상권 경쟁할 것도 아니고 금방 괜찮아지겠지 하고 제 할일만 한 거죠.

돈이 없는데 작업실 공사는 해야 해서 용달도 안 부르고 공사 재료들을 다 직접 날랐어요. 을지로 상가에서부터 핸드카로 시멘트 400kg을 실어 와 계단으로 들어 올리는 걸 보시더니 쟤네가 배부른 애들이 아니구나, 고생하는구나, 뭐라도 도와줘야 하나 이렇게 점점 바뀌시더라고요. 물정 모르고 낱개 네 개만 사러 볼트 집에 갔는데, 번들을 찢어서 그냥 가져가라고 꺼내 주시기도 하고. 관계를 열어가는 게 사실 쉽지 않았는데 이렇게 도와주시는 분도 있었어요. 나중에는 거리에서 공연하고, 2차는 우리 가게로 가자 해서 바닥에 신문지 깔고 막걸리 쌓아 놓고 기타 치면서 아저씨들이랑 놀고 그랬어요.

 
철의 골목 도시음악
철의 골목 도시음악
 
철의 골목
철의 골목

또 하나는 을지예술센터에서 한 프로젝트인데, 건물에 그림 거는 거리전시와 퍼포먼스 작업이 있었어요. 건물에 그림을 걸려면 동네 이해관계가 다 맞아야 하고, 심지어 건물주가 걸려 있잖아요. 허락받으려고 토지 대장 떼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부탁했어요. 거의 흥신소였어요. 행정에서는 문제를 풀려고 경찰서, 소방서 다니면서 사장님들 보여줄 공문 바로바로 만들어 보내 주고…,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사람들이에요. 을지로가 이렇게 된 이유는 미친 자들이 있었던 거죠.
 
  • 을지산수 프로젝트. 송일렌 作
    을지산수 프로젝트. 송일렌 作
  • 을지산수 프로젝트. 박인주 作’
    을지산수 프로젝트. 박인주 作
  • 을지산수 프로젝트. 박선영 作
    을지산수 프로젝트. 박선영 作
  • 을지산수 프로젝트. 장미 作’
    을지산수 프로젝트. 장미 作
 

이곳을 기록하는 이유, 예술진흥법 10조항을 상상하며

 
작가님이 을지로에서 많은 프로젝트를 했을 때, 그즈음이 을지로가 예술적으로 부흥기라고 느꼈는데요. 지금 작가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술가, 상인 개인의 바람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고민과 행정적으로 도와주는 담당자들, 협조해 주는 주변 분들 모두의 힘이 합쳐져서 된 거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시가 우리 거잖아요. 우리 것이기 때문에 같이 고민하고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쇄소였던 곳을 개발해서 지하에 인쇄소를 만들어야 하는 법적 조항 때문에 신축건물 지하에 인쇄소가 있어요. 을지로의 신축건물들은 전혀 더럽히면 안 되는 아주아주 소중한 재산으로 대하거든요. 카트를 끌지 못하게 하고 인쇄물을 옮길 때마다 보양하게끔 해요. 건물, 재산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니까 본질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거죠. 법의 목적이 아무 상관 없어지는 거예요. 이런 제도가 바뀌어야 이 도시의 가능성이 유지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중에 다 근거로 쓰려고 인터뷰하고 다니는 거 같아요. 지금 ‘작은 도시 이야기’라는 뉴스레터를 계속 발행하고 있거든요. 매달 인터뷰를 싣고 음악, 전시, 술 등을 소개하고 있어요.

저는 을지로가 제게 성장할 기회를 줬다고 생각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그런 기회를 준 곳이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을지로가 아니더라도 도시에 이런 지역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우리 사회는 계속 정답만 요구하면서 성장 경쟁만 시키려 하고 다른 실험할 기회를 많이 안 주잖아요. 그런데 이 동네는 그게 되는 곳이에요. 마음껏 실험하고 마음껏 더럽히고. 그리고 전시장도 가보면 번듯하지도 않고 먼지 쌓여 있는 곳에 그림 걸고 서로 축하하고 신나하고 막 이런단 말이죠. 그런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다음에는 번듯한 전시장에도 가고 해외 초청도 받아서 할 수 있게 되겠죠. 이런 중요하고 특별한 요소들이 느슨하게 있기에 쉽게 바뀌고, 언제 다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그걸 기록하고 싶은 거예요. 기록해 놨을 때 최대한 많은 근거 자료를 같이 덧붙여서 ‘도시 안에 예술가들이 있는 게 굉장히 유의미하다’라는 가설을 증명할 수 있게끔 하고 싶은 거죠. 방금 말한 과정들을 겪으며 크고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 만나보면, 이 사람들의 5년 후가 너무 궁금해져요.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이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는 게 나한테 소중한 자산같이 느껴지는 거예요. 막 꿈틀대고 여기서 어떤 꽃이 필까, 이 사람이 자라서 어떤 색깔로 꽃이 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상상도 해봅니다. 재개발되어 여기가 빌딩으로 다 바뀌었는데 그 안에 지금 우리가 시도하고 실험한 공간이 그대로 있다면!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 100분의 1에 해당하는 비용을 공공예술에 써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공공미술을 설치하잖아요. 현재 제10조는 없지만, 이런 조항을 상상해 보는 거죠. ‘재개발 시, 도시 건물을 새로 지을 때 100분의 1 공간을 예술 공간으로 지원하고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건축주는 그것을 수행해야 할 의무를 가지며, 운영 방안은 지자체와 지역 문화재단을 비롯해 지역의 공동위원회와 합의하고 결정해야 한다.’ 거대한 빌딩이 생겼는데 그 안에 100분의 1에 해당하는 공간이 대안 공간이나 작업실 등 우리가 더럽히고 마음껏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재개발하는 건설사가 가져가는 수익이 1조래요. 우리가 ‘1조를 줄 테니 이걸 하지 마세요’ 할 힘은 없지만, 재개발되더라도 그 안에 가치를 지속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어요. 예를들면 자유로운 친구들이 모여 놀 수 있는 공간 ‘작은 물’ 같은 곳이 월세 걱정 없이 운영을 해요. 왜냐하면 법적으로 그 공간을 그렇게 써야 한다고 하니까. 실현된다면 얼마나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기겠어요.

을지로에 있는 공간들이 저한테는 선물 같아요. 이런 공간들을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느껴요. ‘육일봉’에 가면 lgbt(성소수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그 아래 ‘작은 물’에 가면 자유롭게 히피처럼 노래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요. 옆에 있는 ‘아트 쉬프트’에는 유학생들이나 외국 작가들이 모여서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인 거죠. 그리고 그걸 모르고 갔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우리가 테헤란로나 다른 데 가서 이런 것을 겪을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을지로의 존재가 더욱 소중해요.

우리는 두 시간이 넘는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예술진흥법 10조항을 상상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모습에서 어떤 결의 같은 것을 느꼈다. 이토록 뚜렷하고 분명한, 이토록 뜨거운 상상이 어디 있을까. 누가 감히 이를 몽상이라 할 수 있을까.

John Lennon의 노래 마지막 가사를 띄우며 그의 행보에 응원을 보낸다.

You may say I'm a dreamer
당신은 아마 날 몽상가라고 말하겠죠
But I'm not the only one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에요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요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남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싱어송라이터이자 공연기획자.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이 많다. 누구든, 뭐든 할 수 있다는 딱따구리 책방을 운영 중이다.
@namsu_ggu(사진 제공. 고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