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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현지 _시인
  • 2023.07.28

지지봄봄 37호

-조난의 계절에 필요한 힘

프롤로그

쓰레기, 수다, 귀신과 함께 시를 생각하기

남현지(시인)

하루 동안 자신이 듣고 읽고 말하고 잊어버린 말들을 모두 기록한다면, 아마 그건 언어의 쓰레기장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내가 오늘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카톡, 메일뿐 아니라 무심코 들리는 옆 사람의 통화 내용, 창밖 행인들의 소리, 스팸 문자, 뉴스, 광고, 영화, 클릭하지 않은 커뮤니티 게시물 같은 것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혹은 자아의 경계를 위해서 습관화된 방식으로 자신에게 가치 있는 언어와 그렇지 않은 언어를 구분한다. 중요한 것은 기록하거나 기억하려고 노력하지만, 나머지는 잊는다. 그러다 갑자기 흥얼거리게 되는 노랫말처럼 어느 날 맥락 없이 떠오르는 말들도 있다. ‘킹받네’처럼 요즘 유행하는 말을 중얼거릴 때도 있고, 길을 걷는데 ‘미역’ 같은 단어가 떠올라서 실없이 웃기도 한다. 원래 있었던 맥락을 벗어나서 불쑥 파편적으로 떠오르는 말들은 이상하다. 눈, 귀, 입가에 잠시 머물렀다 버려진 말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로 내 안에서 떠돌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다. 언어화되지 못하고 잊힌 감정, 감각, 이미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들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뒤엉켜 무의식의 영역에서 나를 구성해 나간다.

버려진 말들, 이 부스러기들이 없다면 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를 쓰는 행위는 자신이 버린 것들의 쓰레기장을 뒤져서 그것을 재배열해 보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떠도는 파편적인 언어와 이미지를 가지고 그 배열이 다시 모종의 논리를 갖게 될 때까지 이리저리 배치를 바꾸어 보는 일, 결국 자신 안에서 언어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 된다. 보들레르는 19세기에 쓴 시 「넝마주이의 술」에서 시인을 넝마주이와 동일시한 바 있다. 넝마주이는 중세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버려지는 쓰레기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근대 도시에서 이 쓰레기를 뒤져 재활용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보들레르는 넝마주이와 시인이 왜 같은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비평가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넝마주이를 수집가이자 역사가의 메타포로 활용한다. “이 저자는 마지막에 개인으로 서 있다. 지도자가 아니라 불평꾼으로 서 있다. 뭔가를 창립한 자가 아니라 흥을 깨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우리가 외롭게 자신이 할 일을 하고 노력하는 그를 그 자체로 떠올리고자 한다면 아침 여명 속 새벽의 넝마주이를 보게 된다. 그는 집게로 말 부스러기와 언어 조각을 찌르면서 그것들을 고집스럽게, 약간 얼근한 상태에서 투덜거리며 자기 수레에 던져 넣는다. 그러면서 이따금 ‘인간’ ‘내면성’ ‘침잠’ 같은 이런저런 퇴색한 헝겊 조각들을 조롱하듯이 아침 바람에 나부끼게 한다. 혁명의 날 아침, 여명 속 새벽의 넝마주이.” (벤야민, 「한 아웃사이더가 주목을 끌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사무원들』에 대하여」 중에서) 벤야민은 넝마주이의 메타포를 통해 기존의 역사에서 버려진 ‘말 부스러기와 언어 조각을 찌르면서’ 우리가 역사를 재구축하기를 바랐다. 우리가 모두 역사가는 아니지만, 역사를 다시 쓰는 것처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버려진 것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쓰레기에서 시작하기

 
쓰레기 브라이언 딜 (알라딘)
<쓰레기> 브라이언 딜 (알라딘)

쓰레기는 한때 나의 것이었지만 내게서 버려진 것,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이다. 청결과 환경을 위해서 쓰레기를 제거하거나 줄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브라이언 딜은 『쓰레기』(플레이타임, 2017)라는 작은 책에서 쓰레기를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을 재구성할 사물로 제시한다. 쓰레기는 우리 시대의 시간과 욕망의 바깥으로 빠르고 은밀하게 버려진 것이지만, 동시에 지금 빛나는 사물들에도 언젠가는 그것이 폐기되어 썩어 갈 것이라는 균열을 만드는 존재다. 모든 사물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폐기된다. 폐기물은 욕망과 버리기 사이, 양가적 감정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가 청결을 위해 쓰레기를 내다 버린다면 그건 쓰레기를 세계에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 집에서 쓰레기 매립지로,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추방하는 것이다. ‘소비-버리기-청결한 정체성’의 반복적인 순환 속에서 한때 내 욕망이었던 사물은 어딘가에서 썩어간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더는 잔여물 없는 청결한 정체성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쓰레기에 대한 죄책감이나 매혹이 아니라 자신의 잔여물, 자신과의 관계로서 쓰레기를 직면하는 태도를 이야기한다. 내가 버린 것들은 내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단절된 것이 아니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환경이 되어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거기에서 나는 다시 (뜬금없이) 시를 읽자고 권하고 싶다. 시는 결국 우리가 버린 것, 배제한 것, 잃어버린 것들과의 관계를 다시 묻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시는 왜 수다스러울까

 
엄청난 속도로 사랑하는 고민형 (알라딘)
<엄청난 속도로 사랑하는> 고민형 (알라딘)

고민형의 시집 『엄청난 속도로 사랑하는』(아침달, 2022)에는 정말 많은 인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종말론자, 수행자, 신부님, 영수, 영희, 빌, 잭, 이불 장수, 미술관 직원……. 그들은 말한다. 그들끼리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서사를 가질 때도 있지만 쓸데없는 말들이 오가고 수시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끼어들면서 결코 요약되지 않는다. 이 시집은 수다스럽다. 혼자 시끄러운 카페에 앉아서 음악을 듣다가 문득 이어폰을 빼고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는 것 같다. 수많은 테이블의 뒤섞인 말소리를 듣고 있으면 누군가의 험담, 오늘 저녁 메뉴, 망한 이야기 사이에서 이별하는 커플의 격렬한 감정도 그들만을 위한 배경을 만들어 주는 드라마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때 사랑은 다른 이들의 온갖 삶이 침입해서 훼손된 기호처럼 들린다. 수다스러움은 우리가 가진 진지함과 열정을 폄하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나에 몰두하기 위해 버린 것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행위이기도 하다.

수다를 떨기 위해서 언어는 힘을 충분히 잃어야 한다. 수다는 토론이 아니다. 수다의 리듬, 수다의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떠도는 온갖 가벼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숙고하지 않은 문장, 사소한 감각, 순간의 감정들……. 이 화제에서 저 화제로 넘어가는 것 사이에 대단한 이유가 있지도 않다. 뜬금없는 전환이기도 하다. 수다는 맥락이 없어도 된다. 수다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복기하지 않듯이 이 시집을 읽을 때 나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 페이지에서나 시작해 시인이 펼쳐 놓은 수다에 즐겁게 동참하다가 이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은 꼭 읽는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천천히 사라지기를 바랐던 모든 것들은 충분히 천천히 사라진 걸까.” 그 질문을 만나기 위해서 읽는다.


귀신의 말, 천사의 말, 인간의 말
 
스미기에 좋지 김복희
<스미기에 좋지> 김복희

최근 시에는 유령, 귀신, 천사와 같은 존재가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과 유사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가 사라지고 남은 존재, 혹은 인간적인 육체가 사라져야 드러나는 존재의 형태다.

김복희 시인의 시집 『스미기에 좋지』(봄날의책, 2022)는 이런 존재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시인에게 천사는 순수와 선의 상징이 아니라 얼굴을 잃어서 “누구의 기억에도 흐릿하게 남고/ 누구의 곁에서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존재다. 천사가 우리 곁에 머물렀대도 우리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인간의 말만 할 줄 알”아서 그 존재를 자신이 이해하는지,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나에게 천사가 “날개가 없는 사람은 감당할 수 없다고. 그렇지만 마음만은 고맙다고.” 말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인간적인 언어이고 번역이다.

내가 죽어서 귀신이 된다고 생각하면 귀신은 어떤 존재일까. 죽은 사람에게는 옷이 필요 없을까. “죽으면 사람이 아닌가.” 죽음은 끝일까. 시인은 죽음과 함께 남은 것, 죽음 이후의 존재들을 계속 떠올린다. 귀신은 두렵거나 공포스러운 존재로 대상화되지 않는다. 만약 귀신이 시를 쓴다면? “죽어서 먹는 밥”을 이야기하고 “살아 있는 자의 원한”을 생각하고 귀신은 그저 “스미기에 좋”아서 다른 이의 몸에 씌기도 하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은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 존재와 비존재를 나누는 선에 대해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시는 그 의문을 섣불리 해소하지 않고 되풀이하면서 계속 그 선을 맴돈다. 어쩌면 귀신이 노래를 부르고 문지방에 가만히 잠들어 있는데 내가 모르고 밟고 지나간 건 아닌지, 천사를 만났는데 너무 희미해서 잊어버린 건 아닌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인간의 시야에 갇혀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생각하는 마음도 있다. 그 마음을 가지려고 시를 읽는다. 시에는 우리가 잊어버린 존재들이 종종 새롭고 엉뚱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인간의 언어는 늘 우리의 한계로 남겠지만, 시집 한 권을 읽는 시간 그 정도는 천사와 귀신에게 줘도 괜찮지 않을까.


남현지 / 시인
2021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문학과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nan_bun_bun 이메일 namnamsss@naver.com
(사진 제공. 남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