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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예술행정이 요구하는 성과는 무엇이고, 현장은 어떻게 대응할까?
  • 강원재
  • 2023.10.11

지지봄봄 38호

-싸움의 기술

언어들

문화예술행정이 요구하는 성과는 무엇이고,
현장은 어떻게 대응할까?

강원재(노원문화재단 이사장)

정부의 예산이 투입되는 모든 사업에는 목적과 목표가 있고, 사업 시행에 따른 성과가 있다. 있어야 한다. 목적目的은 사업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이고, 목표目標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해당 사업이 구체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측정 가능한 수치를 의미한다. 그리고 성과成果는 사업 전 과정을 통해 성취한 결과다. 공공예산을 투입하는 문화예술정책사업도 마찬가지다. 목적은 일자리 창출, 지역 균형발전, 지역관광 활성화, 도시브랜드 제고, 생태환경 감수성 제고, 문화소외계층 수혜 확대, 문화다양성 증진, 융복합 문화콘텐츠 개발, 지역공동체성 향상, 문화적 재생 등이다. 목표는 구체적 수치, 즉 신규 일자리를 몇 개나 만들 것인지, 지역에 들어온 인구는 어떻게 되는지, 사업을 통해 개발할 콘텐츠 수는 얼마나 될지 등에 관한 것이며, 성과는 결국 목표에 도달한 정도와 부가적으로 생긴 성취를 말한다.

행정은 사법, 입법과 구분되는 정부의 일반 기능으로서의 공공행정과, 정부든 민간이든 관계없이 예산지출과 증빙에 따른 서류 행위를 뜻하는 협의의 행정으로 나뉜다. 문화예술 현장에서 말하는 행정은 보통 후자를 의미한다. 정부 기관, 중간지원 기관에서 말하는 행정은 공익을 위한 정책 혹은 공공사업의 목적과 목표의 수립 그리고 성과의 도출을 사회 전체의 공공성과 투명성, 공정성에 기반하여 수행하는 정부의 행위를 뜻하는 전자를 의미한다. 공공성은 한정된 공공의 자원이 효율적으로 사용되는가의 문제, 투명성은 공공자원분배의 정책과 행정과정 그리고 결과의 정보접근성, 공정성은 특혜나 부정과 비리 없이 공평하게 자원이 활용되고 있는가이다. 따라서 현장에서 말하는 행정 역시 크게 보면 공공성, 투명성, 공정성을 위한 공공행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예술 현장 종사자들은 종종 행정에서 요청하는 성과가 오히려 사업을 위축시키고, 지속성을 저해하고, 현장의 건강한 생태계를 해친다고 말한다. 반대로 행정에서는 현장 종사자들이 공공성, 투명성, 공정성을 무시한 채 사업을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예산의 사용이나 증빙 등에 소홀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부나 지원기관들은 점점 더 규제와 지침을 강화해 현장을 매뉴얼로 통제하려 하고, 그럴수록 현장은 활력과 창의성, 보람, 재미, 책임감보다는 경제적 안정과 처우 개선, 신분 보장, 업무 환경 개선에 대한 정부의 책무를 지적하는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시키는 대로 일하기를 원한다면 그에 맞는 보상책은 당연히 마련해야 한다. 재미도 의미도 기대 못 하는 일이라면 밥벌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건 전혀 과한 요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시키는 대로 하는 사업은 지원사업이 아니라 용역사업이다. 모름지기 지원이란 현장의 전문성을 중시하여 자율적인 운영과 활동을 지원하는 게 이미 공공성이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이며, 그 절차로서의 심의는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양측 모두 공공행정에 기대어 정책과 사업을 수행하면서 서로의 행태에 불만인 이유는 지원사업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만은 아니다. 서로의 언어와 해석이 다른 이유가 더 크다. 흔히 정부 기관에서 말하는 성과는 가성비, 즉 예산투입 대비 양적 효과다. 이에 비해 현장에서 말하는 성과는 적정예산투입 질적 효과다. 전자는 같은 비용으로 얼마나 큰 효과를 일으켰나에 집중한다면, 후자는 예산이 필요한 곳에 적절히 투입하여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고 있느냐에 집중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공공기관은 개별 현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여러 현장을 함께 정책과 사업의 범위로 다루고 있으므로 대비 효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개별 현장은 지역마다 상황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사업의 공공성은 지역 물정에 밝은 현장 종사자들의 관점과 판단으로 수행된 사업의 성과로 드러나고 그것이 훨씬 실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둘 다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합의의 절차가 없다. 서로의 반목은 대개 여기서 비롯된다.

공공기관이 요구하는 예산 대비 양적 효과는 비교할 데이터가 필요하다. 데이터는 지원사업을 받는 여러 현장의 사업 결과로 채워진다. 데이터 비교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변수를 없애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업의 공정은 세분되고 표준화한다. 경제적 수준이나 자연환경, 정치적 현안 등 지역의 특수한 상황이나 기획자의 의도, 헌신, 혹은 거버넌스 이해관계자들의 협력적 분위기와 이를 촉진하는 수많은 노력은 변수에 해당하기에 공정에서 생략한다. 이렇게 변수들이 제거된 표준화로 드디어 여러 현장의 비교 평가는 가능해진다. 그리고 구조화된 지표에 따라 모니터링이나 컨설팅이라는 명목으로 평가를 시행하고 평가 점수는 향후 해당 현장의 지원사업 선정 당락 혹은 지원금 규모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현장의 기획자나 운영자, 예술가 등 사업 시행자들 또한 지표를 자기검열의 잣대로 삼게 된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제법 괜찮게 설계된 정책이라도 몇 년 반복하다 보면 현장마다 비슷비슷하다. 행정의 입장에서는 상향 평준화고, 현장이 보기에는 하향 평준화다. 지역마다 비슷비슷한 축제가 열리는 이유고, 도시든 농촌이든 어디에 놓여도 이상하지 않은 맥락 없이 베껴놓은 문화시설이 들어서는 이유다.

그렇다고 구조화된 지침과 평가지표가 무용하다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평가지표는 가이드라인 이상이 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침과 지표는 지원사업이 갖춰야 할 필요조건이어야지 충분조건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지역 청소년들과 미술교육을 즐겁게 하라”에 그쳐야지 “OO 지역에서 3년 이상 거주하는 차상위 계층까지, 남녀성비를 맞춘 13세 청소년 30명 규모로 부모 동의서를 받고, 성비를 맞춘 4명 이상의 강사가 참여해 연습 공간과 커뮤니티 공간이 분리된 100평방미터 이상의 문화 전용공간에서, 다과비는 1인당 회당 2,000원 이하로 16회차 32시간….” 이런 식의 지침이나 지표를 준수하는지 체크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문화예술은 잃어버린 세계, 혹은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과 상기이고, 교육은 미지의 세계와의 만남과 사귐이다. 잃어버린 세계,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상을 향하는 모험가들에게 어떤 지침과 지표로 가이드하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지침과 지표에 갇혀 재미도 의미도 잃어버린다면 누가 모험을 하겠는가 말이다.

문화예술 현장의 기획자 운영자, 예술가들 또한 지침과 지표를 숙지하되, 사업에서 기대했던 재미와 의미를 잃어버릴 만큼 애써 지키려 하지 않기를 바란다. 재미도 의미도 없는 일을 밥벌이조차 안 되는 비용으로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 행정은 비판하고 그런 행정 기조를 가진 단체장이나 정치인에 대해서 반대하라는 말이다. 재미와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당신의 활동을 알아봐 주고, 해석해 주고, 가치 있게 평가하는 공공행정가 혹은 적극적 후원자들은 어디엔가 있고, 그런 시간은 반드시 온다. 한편으로는 정부 기관이 당신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것도 좋다. 세운상가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할 때, 필자는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는 300명의 상인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성과를 요구하는 행정 과업에 대해 300명의 초상화 그리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상인들과 나눈 이야기를 정리해 주었다. 내가 아는 공공행정가들은 대부분 현장의 창조성에 목말라 있다. 물론 현장의 창조성이 발현되기까지 필요한 행정적 뒷받침에 대해서는 소홀하지만 말이다. 공공기관의 지원사업 정책과 사업 실무자가 담당하는 현장은 너무 많고, 그중 사연 없는 현장은 없다. 그 사연 하나하나가 중대해 기관 실무자가 온 정성을 바쳐도 행정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진 후 부모랑 연락이 끊긴 어린 남매나, 국제결혼을 한 언니를 따라 한국에 온 13세 청소년이 지역의 문화예술단체에서 시행하는 문화예술교육의 혜택을 받기란 어지간한 행정담당자를 만나선 불가능하다. 행정은 보편을 위한 제도와 지침이어서 하나의 특수성을 인정하려면 전체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현장의 자율성, 특히 현장의 행정 자율성을 상위 기관의 행정이 인정해야 한다. 참여자 자격에 관한 것이든, 실시 시간이나 장소에 관한 것이든 현장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매뉴얼에 담지 않아야 할 특수하고 세세한 사항을 현장에서 지역 상황에 맞게 자율로 판단 결정할 수 있도록 지역 거버넌스의 구성 면면 정도를 확인하고, 거기에 권한을 일임하겠다는 방침을 매뉴얼에 담아놓는 방법으로 풀어볼 수도 있다. 가령 “지역 거버넌스가 참여 대상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수 있는 자”와 같은 문구 말이다. 행정기관이든 현장이든 언어와 취하려는 성과가 서로 다르더라도, 성과를 위해 도움이 되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교사가 되어야 한다. 행정은 현장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에 관한 판단과 결정을 일임하고, 현장은 행정의 언어와 일련의 정책추진 과정을 익혀야 한다.

공공기관의 경영자로서 내겐 날마다 검토하고 점검할 일들이 참 많다. 그 많은 일들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재단 사업담당자나 현장 기획자가 숨겨놓은 의도를 발견하고 알아채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계획서나 보고서를 검토할 때 사업 운영 주체의 욕망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편이다. 이 계획은 누구의 어떤 욕망인가? 재미, 의미, 경력 쌓기, 밥벌이 등등…. 그리고 그 계획의 실행을 기뻐하고 감동하고 행복해할 이들은 누구인가? 이 두 가지 포인트에서 타당한지만 체크하고, 나머지는 사업을 가능하게 하는 담당자 혹은 기획자의 계획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뿐이다. 그리고 혹시 있을 계획의 빈틈과 착오를 채워주고 책임져 주는 게 대표의 역할이다.

최근 노원 경춘선숲길 갤러리에서 불공정 계약 문제로 고통받다 유명을 달리한 故 이우영 작가의 추모전 <매일, 내 일, 검정 고무신>을 개최했다. 몇 달 전 기획을 시작할 무렵, 법적 쟁점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라 공공기관인 재단에서 추진하기에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기획자와 창작자들의 의지, 사회적 의미, 무엇보다 이 전시로 위로가 될 유가족과 수많은 검정고무신 팬들을 생각해 보면 재단이 감당할 부담은 전시 추진에 그리 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기획자와 창작자는 좋은 전시가 될 콘텐츠를 개발하고, 재단 실무자는 채택된 콘텐츠가 잘 작동하도록 시설과 예산 등 재단 운영시스템에 앉히고, 재단의 경영자는 혹시 생길 수 있는 내외부적 고난상황의 방어막이 되어주면 그뿐이다. 이 전시는 개막 첫 주에만 3,000명이 다녀갔고, 많은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창작자가 처한 현실에 안타까워했으며,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글을 남겼다. 전시장 운영 지침에 따라 ‘저작권 분쟁의 소지가 있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기획조차 할 수 없었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성과였다. 현장을 지원하는 행정의 기조 또한 이러하기를 바란다.

 
매일, 내 일, 검정고무신 전시 포스터
<매일, 내 일, 검정고무신> 전시 포스터


정리하자면 창조도시는 창조적인 사람이 많은 도시라고 말하듯, 문화예술 예산은 문화예술인들이 활기를 갖고 오래도록 활동하고, 문화예술을 향유하려는 사람들이 더 자주 더 가까이 문화예술을 접하는 데 쓰이면 되는 거다. 그 과정에서 예산 사용은 비리와 횡령과 특혜가 없어야 하고, 성과는 지역마다 현장마다 대상마다 다른 것이어서 하나의 행정지침이나 매뉴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가능한 한 현장에 위임할 수 있는 것은 위임하고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만 살피면 될 일이다. 현장에서는 현장을 불편하고 위축하게 만드는 행정에 대해서는 과감히 비판하고 최소한의 협조만 하면서 우호적 행정환경이 될 때까지(혹은 우호적 환경을 찾아) 재미와 의미를 잃어버리지 말고 꾸준한 작업을 이어가길 바란다.
강원재 노원문화재단 이사장
놀이를 계속하기 위한 외침, 강구야~로 불리기를 더 좋아하는 문화기획자.
하자센터, 땡땡은대학, 경기상상캠퍼스, 영등포문화재단을 거쳐 지금은 노원문화재단에 재직 중이다.
@ 사진 제공. 강원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