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질문이 생기면 찾아가는 공유서재, 지지봄봄
- 유다원
- 2024.08.26
-
지지봄봄 40호
-멈춤과 도약 사이에서
질문이 생기면 찾아가는 공유서재, <지지봄봄>
유다원(플러스마이너스일도씨)
실물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지지봄봄>은 나에게 좋은 글들이 있는 또 하나의 서재이다. 질문이 생길 때, 타인의 생각이 궁금할 때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글들이 쌓여있다. 동시대 문화예술 분야에서 주목하고 있는 이슈와 그것을 다루는 다양한 시선들이 담겨있어 유의미한 방향을 찾아가는 중요한 데이터가 된다. 어느 날은 시간이 지난 담론과 현장의 이야기가 현재 막힌 생각에 단서를 던져주기도 한다. 가끔은 고민하는 주제와 닿아있는 글을 찾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지지봄봄>을 보고 있겠지만, 오늘은 지난 3년간 깊은 관여자로 <지지봄봄>에 참여하면서 가졌던 질문이자, 현장에서 활동하며 늘 품고 있는 질문을 중심으로 읽어보는 방식을 제안한다. 질문의 딱 맞는 답은 아닐 수 있지만, 글 속에 담긴 어떤 말 속에서 영감을 받을 수도 있으니!
오늘의 질문 하나. “문화예술은 늘 새로워야 하나요?”
31호 <한 발 벗어나기> 표지
10살이 넘은 <지지봄봄> 편집 총괄을 ‘플러스마이너스일도씨’가 맡게 되고 가장 고민했던 것은, 기존 <지지봄봄>의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우리의 색깔을 어떻게 덧댈 것인가였다. ‘온전히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과 함께 기존에 쌓아온 색과 결을 ‘담아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며 31호의 큰 줄기를 ‘한 발 벗어나기’로 잡았다.
‘한 발 벗어나기’는 기획팀으로서의 숙제이기도 했지만, 작업자로서 늘 가진 고민이기도 했다. ‘어떻게 기존에 했던 작업에서 단 한 끗이라도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31호는 한 끗의 차이를 만들기 위해 무수한 시간 고민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차이를 만드는 약간의 힌트가 필요한 독자들에게 「스페이스 빔, 민운기」 선생님과의 인터뷰가 담긴 글을 추천한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개념이 ‘반-기억’이라는 건데, ‘기억에 반하다’라는 들뢰즈의 개념이에요. 제대로 해석했는지 모르겠지만, 매번 이 개념을 되새기면서 ‘무엇을 하더라도 했던 것은 일단 잊어버리자. 다시 원점에서부터 마주하는 상황, 나를 둘러싼 제반 상황에 나를 열어 놓자’ 하고 있어요. 기존에 알고 있던 세상, 동네, 도시라고 해도, 나를 계속 열어두면 이것저것 정보가 들어오잖아요. 인지하고 있던 것과 새롭게 감각하는 것이 뒤섞이고요. (중략) 했던 것을 반복하기 싫어하는 습성이 있어서 체험하지 않았던 세계나 지점, 영역으로 자꾸 나아가고 모험하고 싶어요. 그래서 걸맞은 주제와 방법, 형식을 계속 고민해나가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탁 잡히는 경우가 있어요.” |
한 끗의 차이를 만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지만, 누군가에게 매번 다른 풍경을 던질 수 있는 창의적인 사람은 아니다. 반복하고 계속하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을 작업에 몰입하는 것으로 다음을 만들어가는 ‘노력형’ 인간에 가깝다. 그래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좋아한다. 아니 그 말에서 일종에 ‘위로를 느낀다’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예술이 꼭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닌, ‘재현’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뜻을 담은 이 말은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한다.
‘따라따라 프로젝트’를 우연히 온라인에서 찾아보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현대미술 작품을 따라서 모방하고 응용하자는 말을 대놓고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이웃들과 엉뚱하고 유쾌한 활동을 이어온 임은빈 작가의 작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모방’은 심각한 범죄로 여겨지는 행위였기에 문화예술교육 영역에서도 반복적으로 ‘모방’하는 활동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따라따라 프로젝트’는 이런 경직된 생각에 ‘새로움은 반복적인 재현의 과정을 통해 어느 순간 피어오르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새로움이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34호 <현장이 사랑한 현장, 따라따라 프로젝트 임은빈> |
현대미술을 따라 하는 작업을 해보니 다들 알게 된 것이 있어요. 보는 것, 실행하는 것, 실행한 것을 말로 다시 꺼내는 것, 혼잣말로 하는 것,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각각 다른 세상이라는 점 말입니다. (중략) 첫 공동작업인 리처드 롱 <걷기로 만들어진 선>을 따라 할 때도 그냥 걸었어요. 결과가 나올지 어떨지 예측이 안 되었지만, 전우와 같은 공동체 의식 같은 걸 느끼게 된 첫 작업이었고 결과물도 정말 훌륭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원작 작가의 작품이 더는 작가만의 작품이 아니게 되어버립니다. 잭슨 폴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리는 ‘전복의 순간’이 오더라고요.” |
오늘의 질문 둘. “여전히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정책에서 주로 다루는 언어들은 늘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 전문가들의 말을 따라 더듬더듬 유사하게 해석을 해낼 뿐이다.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단어 역시 정책에서 시작된(만들어진) 언어다. 이런 언어들의 특징은 어떤 ‘의도’를 강하게 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는 늘 그것을 해석해 주는 누군가(전문가)를 찾거나 언어를 정의해주는 자료집을 ‘공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몇 년 전부터 현장이 스스로 해석과 관점을 가지고 언어를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비슷하게 활동을 이어온 동료들과 ‘현장 용어 사전’이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
현장에서 활동을 이어가다 문득, ‘문화예술교육이 뭐지?’라는 원초적인 질문이 드는 날이 있다. 때로는 참여자들이 우리에게 묻기도 한다.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지 근원적인 질문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문화예술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온 「예술 공간 돈키호테, 박혜강, 이명훈」 두 분의 필담을 추천하고 싶다. 물론 그 답은 우리가 스스로 ‘터득’해야겠지만.
‘예술을 배운다.’가 아닌 ‘예술로부터 배운다.’ 또는 ‘예술가에게 배운다.’가 아닌 ‘예술가로부터 배운다.’ 여기에서 나는 ‘터득’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본다. 터득이란 어떤 성질의 것인가? 배움과 터득의 차이는 무엇인가? 배움이 가르침의 상대어로서 수동적이라고 한다면 터득은 다른 차원의 배움의 성질로 이해되며, 보다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것이 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예술교육은 ‘스스로 터득하기’에 가깝다. 그것을 위해 무엇을 제공할 것인지, 소개(안내)할 것인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떻게 대화할 것인지, 이런 것을 문화예술교육에서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 역사화가 되지 않은 동시대 예술은 더욱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
서재는 개인의 관심사와 취향이 담긴 다소 프라이빗한 공간이지만 <지지봄봄>은 누구에게나 각자의 관심사와 취향에 따라 이야기를 큐레이션 할 수 있는 열린 서재이다. 현장에서 활동하다 벽에 부딪혔을 때, 잘하고 있는지 불안이 밀려올 때, 어깨너머 배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찾아와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모두의 서재가 되기를 이제는 구독자로서 희망해본다.
- 유다원 / 플러스마이너스일도씨
- 삶과 맞닿아있는 질문과 실천을 가치 있게 생각하며 별것 아닌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풍경과 사건들에 진지하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블로그 https://blog.naver.com/plusminus1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