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들
- 매개란 ‘관계맺기를 통한 의미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
- 최보연
-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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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봄봄 41호
-매개를 다시 묻다
매개란 ‘관계맺기를 통한 의미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
: 직무가 아닌 오롯한 가치지향으로서 ‘매개’를 바라보기
최보연(문화정책연구자/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
지난 8월 말, <지지봄봄>에서 ‘매개’ 개념에 대해 정책적, 연구적 관점에서 언어화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지지봄봄>의 목차 중 ‘언어들’이라는 코너라는데, ‘정책과 제도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이면을 살피는 것’이 핵심이란다. 난감하다. 현장의 예술가도 기획자도 아닌, 정책 연구자인 내가 ‘매개’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몇 번의 통화 끝에, ’ ‘매개’의 정의를 (감히) 담는 것은 어렵겠다고, 다만 ‘매개’의 가치는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여전히 난감하다. 그럼에도 이 기회를 빌려, ‘매개’의 의미가 납작한 정책 용어로서 포착될 수 없는 이유, 더불어 문화예술교육에서의 ‘매개’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정책의 언어와 예술계 언어 사이의 간극
최근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수행하는 『장애인 문화예술 매개 인력 활동 활성화 방안 연구』에 공동연구로 참여했다. 장애 예술이 더 많이, 더 풍성하게 전개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장의 활동가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필요한 정책적 지원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과제의 핵심이다.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연구 제목에 ‘매개 인력’이라는 표현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정책 논의에서 ‘매개’는 대부분 ‘인력’이란 단어와 쌍둥이처럼 연계되어 논의되곤 한다. 첫 연구진 모임에서 제목에 들어간 ‘매개 인력’을 ‘매개 활동’으로 수정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조심스레 제시했다. 자칫 예술계를 헤집어 놓는 또 하나의 섣부른 일자리 관점으로 논의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더불어 현장에서 장애 예술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고, 진지하게 고민하며 탐색하는 활동이 자칫 ‘매개 인력’이라는 정책적 틀 속에 납작하게 담겨서는 안 된다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이다.
왜 그런 오지랖 넓은 걱정이 엄습했을까. ‘정책’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규정적이기 때문이다. 정책, 행정의 언어는 법, 제도와 긴밀히 연동된다. 그로 인해 정책 용어는 지원을 받는 대상을 규정하기 위해, 그 범위와 기준을 구체화하고 재단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하지만, 예술계의 언어는 다르다. 열려 있고 유동적이다. 하나의 그릇 속에 담기기보다는 늘 어디론가 새롭게 흘러갈 준비를 하는 물처럼! 이렇듯 예술계의 활동과 정책 용어가 만날 때, 간극과 왜곡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매개(媒介)’라는 단어를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 명확한 출처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새로운 학문 분야로서 예술경영이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국내에서 확산하기 시작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 프랑스 등 해외에서 ‘문화 매개’라는 개념이 일부 사용되기도 했으나, 심보선(2019)이 지적하듯 우리 예술계, 특히 공공영역에서 사용 해왔던 ‘매개’ 개념과는 차이점이 있다 2) 당초 국내에서 ‘매개’라는 용어는 예술경영 혹은 문화 기획 차원에서 창작(예술가/작품)과 향유(관객)의 연결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활용되어 왔고, 소위 ‘기획자’ 직군의 역할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쓰였다. 그러다 임재춘이 짚어준 것처럼, 2000년대 초반 ‘문화예술교육’이 등장함으로써 예술(활동)과 사람이 만나는 다양한 맥락과 방식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현장에서는 이를 ‘매개’ 혹은 매개적 경험 차원에서 논의하기도 했다. 3)
그러나 정책적 차원에서 ‘매개’는 ‘인력’과 맞붙어 대부분 논의되었고, 여기서 ‘매개 인력’이란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 활동과 향유자(참여자)를 연결하는 이들로 이해된다 4) 그동안 ‘매개’를 둘러싼 정책적 규정의 시도는 ‘매개’의 궁극적 역할이나 가치보다는,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인력’과 ‘직군’을 유형화하여 현황을 파악하고 이들을 위한 정책 방안 탐색에 상대적으로 집중해 왔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개 인력’에 관해 합의된 개념이 있다고 보기는 여전히 어렵고, ‘매개’ 역시 ‘기획자’ 역할을 염두에 두되 주로 공공영역에서의 창작-향유 간 연결로서 이해하는 정책 인식이 남아있다.
무더웠던 여름 내내, 연구 과정에서 만나게 된 장애 예술 활동가들, 특히 현재 공연 예술계를 중심으로 접근성 의제를 깊이 있게 탐색하고 실천하는 이들의 경우, 그들의 활동을 ‘매개’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했으나, ‘매개 인력’이란 표현은 상당히 낯설어했다. 어색함과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그간 소위 문화판에서 그동안 관성적으로 사용돼 온 이 단어 자체의 건조하고 딱딱한 뉘앙스에 대한 본능적 거부였을 수도, 혹은 활동가 대부분이 전통적 의미에서의 ‘기획자’ 정체성에 천착하기보다는 예술창작에 방점을 두되 창작-향유-교육을 넘나들며 활동반경을 넓혀 온 이력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여겼다.
‘매개’를 직군(직무) 관점에서 바라봐 왔던 정책적 시선의 한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매개’를 정책적 차원에서 좁게 바라봐 왔던 관성을 되짚어보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기획자뿐 아니라 예술가도, 예술교육 활동가, 지역의 커뮤니티활동가도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다른 대상, 혹은 사람의 ‘사이’를 오가며 매개한다. 또한 매개는 창작과 향유뿐 아니라, 예술가의 창작 과정에서도, 향유의 다양한 층위에서도, 문화예술교육에서도, 즉 모든 예술 활동의 층위와 범주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발현될 수 있다. 문제는 늘 ‘매개’를 ‘인력’이란 정책적 관점에서 좁게 바라볼 때 발생한다.
‘인력(人力)’은 사전적으로 사람의 힘, 노동력을 뜻한다. 정책적으로 ‘전문 인력’, ‘매개 인력’등의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에서는 제도적 일자리 혹은 자격제도 등의 뉘앙스가 (필연적으로) 중첩된다. 문화예술교육 지원법(2005)이 제정되고 당시 ‘문화예술교육 전문 인력(문화예술교육에 관한 기획·분석 및 평가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자)’이라는 표현이 법령에 명시되었고, 새로운 정책 영역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의 판을 키우는 과정에서 예술가, 예술 강사들의 ‘매개적 역할’이 현장에서 강조되었다. 6) 이후 2012년 개정을 통해 ‘문화예술교육 전문 인력’이란 표현은 ‘문화예술교육사(문화예술교육에 관한 기획·진행·분석·평가 및 교수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를 근거로 문화예술교육사제도가 생겨났다. 지역문화진흥법(2014)이 제정되고 ‘지역문화 전문 인력(지역문화의 기획ㆍ개발ㆍ평가 등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규정되었고, 이들 역시 현장 안팎에서 문화 매개자로 불려 왔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적 정의는 이들의 역할이 실제 현장에서 궁극적으로 어떠한 지향과 가치를 의미하는지 포착해 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납작한 정책 용어의 한계다.
매개란, ‘관계 맺기’를 통해 ‘의미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
‘매개(媒介)’란 관계 맺는 사람들 혹은 대상 사이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일 수도, 사람과 대상일 수도, 혹은 대상과 대상일 수도 있다. 사전적으로 매개는 ‘둘 사이에서 양편의 관계를 맺어준다’는 뜻이다. 또한 ‘매개’는 철학적으로는 ‘모든 사물이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철학적 의미도 담고 있다. 7) 다시 말해, ‘매개’란 관계 맺기를 통해 ‘의미로움’을 지향하는 것을 뜻한다. 니나 사이먼(2018)이 『연관성의 예술』에서 언급한 ‘관계의 형성’ 역시 같은 맥락에서 공명한다.
‘연관성의 역할은 어떤 사람과 어떤 대상 사이의 연결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 사람 안에 잠자고 있던 의미를 깨우는 것이다’ _ 니나 사이먼(2018. p.202)
여기서 ‘의미는 깨우는 것’은 ‘매개’의 궁극적 가치지향을 상징한다. ‘의미로움’은 기술적, 기능적, 즉직무적 차원의 단선적 연결을 통해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매개’는 그 역할을 수행하는 이의 ‘관점과 태도’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대상, 사람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들과 예술 활동 간의 관계 맺기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탐색할 때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보다 그 참여하는 주체의 마음에 닿을 수 있어야 한다. 여든이 넘은 지역 할머니들의 일상을 다정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귀 기울여 경청하고, 이들의 삶과 예술 활동을 매개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풍성한 ‘의미로움’을 3년째 담아내고 있는 원주 신림면의 ‘할매발전소’가 바로 그러한 사례다. 8)전형적인 문화예술교육 경계, 지원사업의 고착된 틀 너머에서 시도되었음에도 더할 나위 없는 ‘문화예술교육적’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책의 틀을 넘어서서 ‘매개’의 본질적 의미를 오롯이 바라봐야 하는 이유이다.
1) 이승엽(2007) ‘공연예술 시장은 어떻게 움직이나-① 공연시장의 변화와 유통’. 예술경영 웹진. Vol.496. 2009.09.16. 창작과 향유를 연결하는 ‘매개’는 당시 ‘유통’의 개념과 중첩되어 이해되기도 했다.
2) 심보선(2019) 문화 매개(자)의 불확실성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문화정책과 문화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문화와 사회, 27(2). 333-383. 한국문화사회학회
3) 임재춘·서지혜(2024) [이슈] 삶의 자리에서, 완충하고 결합하고 경신하기 - (대담) 지역문화 예술교육 매개의 역할과 진화. 웹진 아르떼 365. 2024.07.08. 기사 https://arte365.kr/?p=104604
4) 조현성·김홍규·정병은·최보연·최선영(2024) 장애인 문화예술 매개 인력 활동 활성화 방안 연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P.137
5) 김규원(2014) 지역문화 매개 인력 현황 조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김홍규·이상열(2014) 지역문화 전문 인력 양성체계 구축 방안 연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김홍규(2015) 지역문화 전문 인력 양성사업 발전 방안 연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장세길(2012) 문화적 삶의 질, 문화 매개 인력의 제도화로부터 – 문화 매개 인력의 노동 실태와 개선 방안을 중심으로, 이슈 브리핑, 2012.07.11., 전북연구원; 장훈(2019) 공공부문 문화 매개 인력 공급 체계 개선 연구 – 재정지원 문화 매개 인력을 중심으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6) 이광준(2005) ‘매개자-일상에서 문화예술 교육적 환경을 만드는 이들’. 웹진 아르떼 365. 2005.12.01. 기사
7)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제시된 ‘매개’의 정의 참조
8) 유튜브채널 ‘할매발전소’ @mothersmother를 통해 3년 간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 최보연/ 문화정책 연구자/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
- 문화정책 연구자,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 예술행정과 문화정책을 공부한 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으로 일하면서 정책 연구자로서 이력을 갖게 되었다. 정책과 현장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에 관심을 가지며, 균형을 상상해 보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