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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민
  • 2024.10.23

지지봄봄 41호

-매개를 다시 묻다

표류기

공간이 경험을 매개할 때: 데이터와 관찰로 만든 새로운 풍경

김정민 (제3의 시간 도서관 관장, 도서문화재단 씨앗 콘텐츠 랩 실장)

휴대전화에 빠져있던 이용자들이 책을 집어 들고
숙제만 하던 이용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고
게임에 몰두하던 이용자들이 박스 지를 잘라 작업을 시작했다.

이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공간'이었다. 과연 공간에 어떤 마법이 숨겨져 있는 걸까?

필자가 속한 도서문화재단 씨앗은 2007년부터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사회, 경제적 배경과 관계없이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고 확장하며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공공 도서관을 설립하고 운영하고 지원해 왔다. 이중 특히 활발하게 진행 중인 사업 중 하나가 ‘space T 사업'이다. 이 사업은 공공 도서관 내에 12세에서 16세 사이 청소년, 일명 ‘트윈세대’를 위한 전용 공간을 만드는 프로젝트이다. 2019년 전주시립도서관의 ‘우주로 1216’을 시작으로, 대구와 세종 등 전국 여러 도서관과 협력해 현재까지 총 6개의 space T 공간을 조성했다. 그중 하나인 수원 슬기샘어린이도서관에 조성된 ‘트윈웨이브'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개관한 space T 공간이다.

 
사진 1. 전주시립도서관 우주로1216 /  사진 2. 수원 슬기샘어린이도서관 ‘트윈웨이브’
사진 1. 전주시립도서관 우주로1216 / 사진 2. 수원 슬기샘어린이도서관 ‘트윈웨이브’


space T 공간을 만들 때는 12세에서 16세의 청소년 누구나 ‘쉼, 만남, 탐색, 표현’이라는 4개의 핵심 경험을 균형 있게 누릴 수 있도록 공간과 콘텐츠를 세심하게 구성한다. ‘조닝(공간 구획)’, ‘동선 (이동 경로)’, ‘시선 (시각적 흐름)’, ‘가구 배치' 등 물리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책, 재료, 도구, 기기 등 다양한 콘텐츠는 청소년들의 경험을 풍부하게 만드는 매개로 작동한다. 이 매개 요소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이용자의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space T 운영자들은 매일 이용자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이는 의도한 대로 경험이 나타나는지, 공간과 콘텐츠가 잘 쓰이는지 모니터링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이용자가 오자마자 무엇을 하는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과 콘텐츠는 무엇인지, 하나의 경험에서 다른 경험으로 어떻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지 데이터를 쌓는다. 예컨대, 어떤 자세로 책을 읽는지에 따라 공간의 선택지가 달라지는지 관찰함으로써 ‘책을 읽는다'는 행위, 즉 동사(verb)를 더 잘 촉진하기 위해 어디에, 어떤 책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러 space T 중에서도 ‘트윈웨이브’는 2021년 조성 당시, 4개의 핵심 경험 중 ‘쉼'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공간 곳곳에서 편안한 자세로 수다를 떨거나 휴대전화나 아이패드를 쓰며 시간을 보내는 이용자들이 많았고, 삼삼오오 모여 게임을 하는 공간이 가장 붐볐다. 반면에, 창작 활동을 하거나 다양한 주제의 책을 탐색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는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운영자들과 함께 이용자들의 반응을 관찰하며 ‘트윈웨이브’가 어떤 경험을 제공해야 할지 방향을 조율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개관 후 2년이 지나가던 어느 가을날, 공간과 콘텐츠를 새롭게 바꾸기로 결정했다.

 
사진 3, 4. 쉼 경험을 즐기고 있는 ‘트윈웨이브’ 이용자들의 모습
사진 3, 4. 쉼 경험을 즐기고 있는 ‘트윈웨이브’ 이용자들의 모습


본격적으로 공간과 콘텐츠를 기획하기 전에, 먼저 이용자 데이터를 분석했다. 2년여 동안 모은 관찰 기록과 사진 데이터를 바탕으로, 운영자들과 함께 현황을 꼼꼼히 검토하고 개선 방향을 설정했다. 분석을 바탕으로 변경이 필요한 공간적 요소들을 도출했다. 가장 먼저 변경한 것은 ‘조닝 (Zoning)’이었다. 더 많이, 자주, 오래 하길 바라는 경험의 공간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하고, 그 존재감을 키웠다. 반대로 더 적게, 가끔, 짧게 하길 바라는 경험의 공간은 줄이거나 숨겼다.

예를 들어 창작 활동을 하는 공간에는 넓은 테이블을 배치해 이용자들이 자연스럽게 작업의 의욕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반면, 게임 콘텐츠는 게임을 하는 이용자뿐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몰리면서 공간을 많이 차지했기 때문에, 3~4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공간으로 옮겼다. 또한 이용자들이 빠르게 지나치는 복도 같은 서가 공간의 일부를 탐색과 창작을 위한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었다. 근처에 이동식 서가를 배치해 이용자들이 공간을 지나쳐버리지 않도록 공간의 흐름을 끊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이나 가장 긴 책처럼 독특한 형태의 책을 배치해 한 번씩 만져보고 살펴보며 호기심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이로써 이용자들은 이동을 멈추고 그 공간에서 더 오래 머무르며 구경하고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5. (Before) 언덕에 앉아 구경이 가능한 게임 공간 / 사진 6. (After) 3-4인이 들어가면 꽉 차는 게임 공간
사진 5. (Before) 언덕에 앉아 구경이 가능한 게임 공간 / 사진 6. (After) 3-4인이 들어가면 꽉 차는 게임 공간
 
사진 7. (After) 창작 공간의 테이블 / 사진 8. 이동식 서가의 모습
사진 7. (After) 창작 공간의 테이블 / 사진 8. 이동식 서가의 모습


조닝을 정한 후, 각 공간에 맞게 세부 콘텐츠를 기획하고 배치했다. 전체 경험을 매끄럽게 이어주기 위해서는 이용자의 관점에서 공간의 맥락을 읽는 것이 중요했다. 이용자 한 명 한 명이 어떤 동선에서 공간을 만나게 될지, 어디에 시선을 두며 공간을 소비할지, 공간을 어떤 분위기로 받아들일지 고민했다. 이렇게 각 공간의 맥락에 맞는 콘텐츠를 제안하는 것은, 이용자가 자연스럽게 무엇인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용자는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과정은 치밀하게 기획된 의도에 따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이것 해볼래? 저것 해볼래?’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공간과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는 셈이다. 이것이 매개자로서 공간이 가진 힘이다.

예를 들어, 공간 곳곳에 있는 서가에 책을 배치할 때도 동선에 맞춰 주제를 연결하고 확장함으로써 탐색의 범위가 자연스럽게 넓어질 수 있도록 계획했다. 공간 입구에는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친숙한 주제인 ‘나'를 다룬 책을 배치하고, 동선을 따라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상대적으로 낯선 주제인 ‘세상'과 ‘상상'으로 주제가 확장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에는 책을 좋아하는 일부 이용자들이 다락 서가에서 만화나 웹툰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9종류의 책이 전체 도서 소비의 52%를 차지할 정도로 특정 책에만 관심이 집중되었고, 전체 도서 소비량도 다른 space T에 비해 훨씬 적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공간의 특성에 맞춰 다양한 주제와 관심사의 책을 배치했다. 성별과 연령별 취향을 고려해 인기 도서를 선정하고 제목이 직관적인 도서처럼 진입장벽이 낮은 도서를 추가해 책에 큰 관심이 없는 이용자도 쉽게 책을 집어들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락 서가 외 공간 곳곳의 서가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각 공간의 개성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책의 주제에 맞는, 읽고 싶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주제인 ‘나'에 대한 책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읽고 싶어 할 거라는 욕구를 반영해 다목적실에 배치했다. 다목적실은 메인 공간과 문으로 구분된 독립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나만의 공간’이라는 아늑함을 주기에 적합했다. 이에 따라, 혼자 차분하게 몰입할 수 있는 가구와 조명을 배치해 그 분위기를 더욱 살렸다. ‘세상'에 대한 책은 12~16세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트윈웨이브’ 안에서도 공간 자체가 인기 있는 곳,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이용자들이 자주 찾는 다락 서가에 배치했다. 마지막으로 ‘상상'에 대한 서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흠뻑 빠져 읽을 수 있도록 언덕, 해먹처럼 눕거나 기대어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공간 가까이에 배치했다.

책의 주제에 따라 공간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을 선택하고 그 주변에서 우연히 흥미로운 책을 발견해 새로운 주제에 진입하길 바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가 곳곳이 활성화되고 더 다양한 책이 폭넓게 소비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진 9, 10, 11. (After) 다목적실, 다락 서가, 언덕에서 책을 읽는 이용자들의 모습
사진 9, 10, 11. (After) 다목적실, 다락 서가, 언덕에서 책을 읽는 이용자들의 모습

이처럼 도서를 재배치하고 서가 공간을 새롭게 구성한 결과, 도서 소비량이 이전보다 3배 이상 증가했다. 과거에는 전체 도서 소비의 65%가 다락 서가에서 이루어졌을 만큼 다락 서가의 비중이 컸지만, 이제는 다락 서가의 비중이 23%로 줄어들고 언덕(19%), 테라스 서가 (8%), 다목적실 (7%) 등 다양한 서가가 새로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도서 소비의 폭도 크게 넓어졌다. 이전에는 9종의 인기 도서가 전체 소비의 52%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매월 50종 이상의 다양한 도서가 소비되고 있다. 여전히 만화와 웹툰 책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로맨스와 스포츠 같은 특정 장르에 집중되었던 소비가 액션, 판타지, 역사, 일상, 동물 등으로 세분되었다.

이제 ‘트윈웨이브’는 여러 space T 중에서도 ‘인기 도서(소비량 기준 Top 5)가 가장 자주 바뀌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이용자들이 특정 책이나 작품에 집중하기보다, 그날의 기분이나 욕구에 맞춰 공간을 선택하고, 그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소비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용자들이 책을 찾아 읽기도 하지만, 공간을 중심으로 경험을 선택하고 그에 따라 도서 소비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공간이 매개체로 작용해 도서 소비를 촉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이용자들이 자연스럽게 작업에 대한 동기를 느낄 수 있도록 창작 활동 공간도 재구성했다. 무엇이든 마음껏 펼쳐 작업할 수 있는 넓은 테이블을 마련했으며, 재료 바 자체의 매력도를 높이기 위해 신경 썼다. 이용자들이 재료를 한눈에 파악하고, 차근차근 살펴볼 수 있도록 재료 바 가구를 변경했다. 틈새 공간에는 서가를 설치해 드로잉, 만들기 등 창작 활동에 참고할 수 있는 도서를 배치하여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결과, 이전에는 일부 마니아들만 창작 존을 찾았지만 지금은 ‘트윈웨이브’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찾는 공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한, 창작 활동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방문하여 공들여 작업하는 이용자들이 늘어났으며, “엄청난 것을 만들고 있어요", “제 최고의 작품이에요"라며 자신들의 작업에 자부심을 보이는 이용자들도 나타났다.

창작 활동을 하는 공간 옆에는 판타지, 모험, 액션, 디스토피아 같은 몰입해서 읽기 좋은 ‘상상' 서가를 배치했는데, 작업 후 서가로 이동해 만화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용자의 맥락에서 서가와 작업 공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 외에도, 자기 생각이나 이야기를 책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특히 15~16세 이용자들이 휴대전화, 수다, 공부 외에 할 거리를 찾을 수 있도록 ‘내 이야기가 책이 되는 작업’이라는 새로운 콘텐츠를 도입했다. 작업에 필요한 재료 바와 기기 테이블 등을 배치하고, 이런 경험이 익숙하지 않은 이용자들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참여형 콘텐츠를 단계별로 구성했다.

여기서 콘텐츠를 배치한다는 것은 단순히 책이나 재료를 놓는 것을 넘어, 이용자가 자연스럽게 경험에 진입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모든 요소를 포함한다. 콘텐츠를 배치할 때는 이용자의 동선과 시선뿐만 아니라, 주변 가구와 소품, 조명까지 고려해 전체 환경을 조성했다. 예를 들어 마음속 이야기를 글로 꺼내는 공간과 그 글을 책으로 엮는 공간을 따로 구성했다. 글을 쓰는 공간은 다목적실에 마련하여, 운영자의 시선을 피하고 혼자서 몰입할 수 있도록 가장 내밀하고 아늑하게 꾸몄다. 조도를 낮추고, 곳곳에 혼자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배치했으며, 어디에 앉아도 다른 이용자와 마주 보지 않도록 창가 공간을 적극 활용했다. 반면, 책으로 엮는 공간은 ‘트윈웨이브’ 입구에서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해 누구나 쉽게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했다. 또한 ‘여럿이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공간'으로 더 개방적으로 조성했다. 이용자들이 서로의 작업을 흘긋 보거나 참고할 수 있고, 기기 사용이 어려울 경우 운영자가 즉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운영자 자리에서 잘 보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했다.

그 결과, 글이나 책 작업을 하는 이용자들이 조금씩 늘어났고, 꾸준히 시를 쓰며 시집을 제작하는 16세 이용자들도 생겨났다. 프로그램이 있을 때만 사용되던 다목적실의 활용도도 크게 높아졌으며, 혼자 조용히 사색하거나 몰입하고 싶은 이용자들이 다목적실을 먼저 찾는 경우도 많아졌다. 다목적실 곳곳에 배치한 참여형 콘텐츠 덕분에 가볍게 글을 써보는 이용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공간과 콘텐츠가 협력하여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 ‘트윈웨이브’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12. (After) 다목적실 속 글을 쓰는 공간 / 사진 13. 입구쪽 책으로 엮는 공간
사진 12. (After) 다목적실 속 글을 쓰는 공간 / 사진 13. 입구쪽 책으로 엮는 공간

반면,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게임 콘텐츠의 비중은 줄어들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게임 콘텐츠를 이전보다 작은 공간에 배치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게임 외의 휴식 콘텐츠로 ‘영화'를 새롭게 도입한 것도 효과적이었다. 게임을 하던 자리에 큰 스크린과 편안한 쿠션 의자를 설치해 여러 명이 함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자, 게임을 구경하던 이용자들이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특히, 친구들과 함께 온 이용자들이 주로 게임이나 보드게임을 찾았는데, 이제 영화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 것이다.

영화 콘텐츠는 게임을 대신해 이용자들의 새로운 구경거리이자 관심 대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게임 활동을 제한하는 규칙 없이도, 공간과 콘텐츠의 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게임의 비중을 자연스럽게 줄이고 탐색이나 표현 같은 다른 경험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사진 14, 15. (After) 새로운 구경 공간이 된 영화 감상 공간
사진 14, 15. (After) 새로운 구경 공간이 된 영화 감상 공간


이용자의 동선, 시선, 관점에서 공간의 맥락을 읽고, 그에 맞게 경험을 매칭하며, 각 경험을 촉진할 수 있는 콘텐츠를 세심하게 배치한 결과 ‘트윈웨이브’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다락, 언덕, 해먹에서 휴대전화를 하거나 게임만 하던 이용자들이 이제는 서가를 탐색하며 책을 읽고, 만들기나 드로잉, 책이나 글 작업 같은 창작 활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제 쉼과 휴식, 탐색과 표현의 경험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영화를 보다', ‘구경하다', ‘살펴보다’, ‘시도하다' 등 다양한 동사(verb)들이 자연스럽게 공간 속에 등장하며, 올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이용자 데이터’가 있었다. 매일 관찰하고 기록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운영자는 감이 아닌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이용자의 욕구와 행동 특성에 맞춰 공간과 콘텐츠를 배치할 수 있었다. 변경 이후에도 데이터를 통해 이용자의 반응을 모니터링하며, 의도한 경험이 잘 이루어지는지 계속 확인하고 있다.

이처럼 공간이 콘텐츠와 이용자를 연결하고, 경험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용자가 공간을 어떻게 읽고 느끼고 활용하는지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공급자 관점에서 ‘어떤 공간을 만들지, 어떤 콘텐츠를 제공할지' 고민하는 것을 넘어, 수요자 입장에서 이용자가 원하는 경험을 발견해야 한다. 예컨대 공급자는 단순히 책을 체계적으로 많이 배치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지만, 수요자인 이용자들은 책을 읽기 좋은 공간과 분위기를 더 원할 수 있다. 따라서 이용자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콘텐츠를 보고 듣고 경험하길 원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매개가 된다는 것, 관계를 맺어준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에서 비롯된다. 오늘부터 각자의 공간에서 이용자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어떤 콘텐츠에 반응하는지 관찰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들의 작은 행동에서 나오는 ‘스몰 데이터'가 거대한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답은 현장에, 그리고 이용자에게 있다.
사진 출처: DIM STUDIO, 수원슬기샘어린이도서관 ‘트윈웨이브’, 도서문화재단 씨앗

김정민/ 제3의시간 도서관 관장, 도서문화재단 씨앗 콘텐츠 랩 실장
경제적 여건과 관계없이 어린이,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한 사람의 창작자, 작업자로서 존중받으며 자유롭게 탐색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공간과 콘텐츠를 만들고 있습니다. 자아가 만들어지는 중요한 시기에 집, 학교가 아닌 제3의 공간, 특히 도서관에서 누릴 수 있는 시간과 경험이 풍성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