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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자로서의 그/녀와 잘 지낸다는 것
  • 설동준
  • 2024.12.05

지지봄봄 42호

-만남의 문법들

정책과언어

타자로서의 그/녀와 잘 지낸다는 것

설동준(문화예술 기획자)

“구체적 타자와 진심으로 마주하는 정책이 가능할까?”

‘정책’이라는 맥락에서 ‘대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문장이다. 노들장애인야학 활동가 홍은전은 책 『그냥, 사람』에서 세 번째, 네 번째 사람은 되기 쉽지만, 두 번째 사람은 되기 어렵다는 인상적인 얘기를 했다. 아픔, 고통 혹은 현장의 당사자인 첫 번째 사람. 그 사람이 손 뻗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눈물 흘리거나 절규하는 몸의 떨림을, 붙들고 늘어진 내 옷자락을 통해 느끼면서 서 있는 그 자리가 두 번째 사람의 자리다.

정책(政策)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책을 뜻한다. 동네 슈퍼에도 “앞으로 우리 가게의 정책은 이겁니다!”라는 말을 붙이지 말란 법은 없지만, 대개 정책은 국가 수준, 적어도 지자체 수준에서 작동하는 개념이다. 타인으로 대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 ‘내 친구 OO’에서 ‘40대 수도권 거주자 여성’과 같은 방식으로 추상화된 대상이 정책이 마주하는 대상이다. ‘그 대상’은 들리는 소리로 울지 않고, 전해지는 무게감으로 나의 옷을 붙들고 쓰러지지도 않는다. 그러하기에 정책은 두 번째 사람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다. 비록 진정성이 있는 경우라도.

문화예술 분야 개별 지원 사업 하나에도 이해관계자는 수백 단위 이상이다. 중앙 기관 정도 되면 수만에서 수십만 수준이 된다. 살아있는 목소리는 한 번에 두 개를 들을 수 없다. 그러자면 이구동성 게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목소리는 문자화된 정보가 되고, 정보는 다시 더 간결해진 숫자가 된다. 두 번째는 고사하고 열 번째 사람 정도에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정책은 대상이 항상 베일에 싸인 존재로 느껴진다. 통계와 자료를 통해 ‘설명’하고 ‘추정’했지만 그게 누구인지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대상(對象)은 마주한 형상이라는 뜻인데 정책은 숫자로 그린 추상화 같은 대상과 마주 서게 된다.

주체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

공청회, 이야기 자리, FGI, 설문조사 등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대표성은 대표성일 뿐, 개별성, 단독성, 구체성이 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정책은 ‘대상을 대상화’한다. 공기의 떨림을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숫자의 그/녀를, 정책은 ‘주체’로 간주해 ‘대상화’하고 ‘미루어 짐작’한다. 누군가는 진심으로, 누군가는 건성으로, 심지어 누군가는 악의적으로.

그런 숫자의 장막을 뚫고 갑자기 무대로 난입하는 ‘대상’들이 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출근하는 비장애인들의 가시적, 비가시적 불만과 비난을 받으면서, 모멸감 속에서도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은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한다. 숫자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 정책은 비용-편익 분석이라는 것을 하는데, 이동권 보장을 위한 비용 투입으로 사회적 편익이 얼/마/나/ 발생하는지를 따진다. 그때 무대 위에 난입한 ‘말하는’ 대상은 얼/마/나/라는 셈법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숫자가 우리를 적절히 대변하지 못했다고 항의하기도 한다. 빅데이터와 다양한 조사분석 기법이 이 간극을 좁혀간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삶의 욕구와 모양도 분화하고 다양해져서 갈등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사진1. 출처: 베이비타임즈
사진1. 출처: 베이비타임즈


거버넌스

소위 전 정권 사업으로 인식되는 것이 안타깝긴 한데, ‘거버넌스’ 만들기가 문화예술계를 휩쓴 시기가 있었다. 함부로 ‘대변’하려 하지 않을 테니, 함부로 ‘대상화’하려 하지 않을 테니, ‘숫자’로 만나지 않을 테니, ‘주체’로서, ‘당사자’로서 함께 결정하자는 것이 거버넌스의 기본적 취지다. 그런 거버넌스에 대해서도 비판이 많았다. 현장을 대표한다는 ‘그 사람들’도 결국 현장을 대변한다는 ‘명성 자본’을 가진 소수가 아니냐는 것이다. 게다가 요 몇 년간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타인에 대한 질시, 내 삶에 대한 불안과 열패감 같은 것이 커지면서 인간 혐오가 선을 넘고 있다. 아쉽지만 거버넌스가 잘 작동하기 힘든 환경이다.

타자를 향한 열림

정책은 원론적으로 대상과 ‘온전히’ 만날 수 없고, 대부분은 ‘충분히’ 만나기도 힘들다. 최대한 노력한다면 ‘유연하게’ 만나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대상이 “나도 주체”라며 이의제기하는 상황은 불편하다. 그런데 불편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상황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이 없다면 그때 ‘불편’은 진짜 ‘갈등’이 된다. 예술활동증명에서 인터넷 사용과 문서화된 증빙을 잘 다루지 못한 현장 예술인의 어려움은 오랜 시간 갈등과 억울함의 원인이 되었다. 이나라도움 시스템을 통해 반/드/시/ 보조금 전용 카드를 발급받아야 지원사업 운영이 가능한데, 어떤 예술가는 신불자라 카드 발급이 안 되어 사업을 포기하기도 했다. 예술인의 직업 소득이 1년에 천만 원이 안 되는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걸 기재부 공무원과 정책 전문가도 알지만, 신불자라 은행에서 카드 발급을 거부당하고 지원사업 포기로 연결되는 ‘예외’ 사례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경직성은 누군가를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비가시 영역으로 내몬다.

게다가 대상은 항상 선하지도 정의롭지도 성실하지도 않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십 년이 된 ‘예술인 파견 지원 사업’에 대해 참여 예술가들이 최소 수준의 열의만 보이고 일종의 용돈벌이로 생각한다는 비판이 문화예술계 전문가들 사이에서 종종 제기됐다. 하지만 정책상 ‘복지사업’에 왜 열의까지 보여야 하느냐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 힘들다. 대상이 ‘어떠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기대와 어긋난다고 비난하는 건 곤란하다. 문화예술교육 사업에서도 흔히 ‘입문-심화-확산(공유)’의 프레임을 적용해 왔다. 시민 중 누군가가 음악과 미술을 처음 접해보고, 감동도 받고, 점점 실력이 좋아지고, 그러다 보면 전시회를 하고 누군가에게 연주로 나누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일종의 ‘성장 모델’이다. 그런 사람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적지 않다. 완전한 개별 맞춤형은 무리지만, ‘다원화’된 삶의 양식을 반영하는 ‘유연함’이 정책에 필요한 이유다. “어라?” 하게 하는 그 대상을 수용하기 위한 ‘타자를 향한 열림’이 필요하다.

열림과 위험 감수 사이의 긴장

그런데 타자를 향한 열림은 위험이 있다. 타자는 내 세계 밖의 존재다. 철학적으로는 불가해한 존재이며, 그래서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불안을 일으키는 존재다. 몇 달 전 예술-기술 융합 분야에서 공부 모임을 몇 개 기획해서 운영한 적이 있다. 그때 그룹 리더 중 한 명이 모임 참여자 중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할지, 안전을 위한 구체적 조치가 무엇인지 물었다. 개방 모임인 만큼 참여자를 확실하게 가려 뽑는 프로젝트가 아니었기에 있을 수 있는 문제 제기였다. 하지만 정당성과 별개로 그 문제 제기에서는 ‘문제없음’을 바라는 ‘깔끔한 세계’에 대한 욕망이 느껴졌다. 사실 누가 안 그럴까? 특히 앞서도 말했다시피 지금은 소위 진상 뉴스가 넘쳐나고 불신이 기본값이 된 인간 혐오의 시대이니.

이 문제에 대응법이 없는 건 아니다. 위험은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여유도, 대응할 수 있는 수단도 없을 때 실체화된다. 그런 위험은 ‘비용’ 없이 사라져 주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권한과 자원을 배분해야 다룰 수 있는 문제가 된다. 나는 지금보다 젊을 때 불신이 비용이 된다는 말을 막연하게 이해했지만, 지금은 나뿐 아니라 한국 사람 대부분이 피부로 느낄 수준이 되었다. 타자를 향한 열림은 위험을 동반하고, 그것은 더 많은 사회적 비용 부담을 요구하는 연쇄 사슬이 되었지만, 당장은 예산에 한계가 있으니? 글쎄, 폭탄 돌리기를 할 여유가 우리에게 있을까?

타자를 통해 나를 정의하는 대안적 주체

인류학자 소피 차오(Sophie Chao)의 책 『In the Shadow of the Palms』에 등장하는 인도네시아의 마루인(Marind)족은 당신들이 사는 땅이 팜유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개발되는 사건을 겪었다. 차오는 숲이 사라진 곳에서 마루인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곤란과 혼란을 겪는 것을 보았다. ‘나’라는 존재 혹은 주체를 저기 저 나무, 바위, 연못과 별개로 정의해본 적이 없는 마루인에게 숲이 사라진 상태에서 ‘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존재론적 위기가 생긴 것이다.
 
사진2. 출처: SAPIENS.org
사진2. 출처: SAPIENS.org


우리가 ‘대상’을 말할 때, 대개는 서구적 관점에서 ‘주체’에 상응하는 개념인 ‘대상’을 지칭한다. 그 대상은 주체와 ‘분리’된 존재로 여겨지는데, 그래서 ‘대상화’가 가능하게 된다. 마루인 족에게 숲과 나는 이런 식으로 분리된 채 인식될 수 없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현장’은 마루인족에게 숲과 같을까? 문화예술 분야는 현장이라는 개념이 가진 상징성과 헤게모니가 강한 곳이지만, 정책은 실질적으로 주체가 되거나 최소한 유력한 주체 중 하나가 된다. 돈, 제도(법), 시스템 등 자원이 대부분 정책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분리적 개념과 자원의 정책(공공) 쏠림이 만나면 현장은 쉽게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현장(대상)과 별개로 정책(주체)을 정의할 수 있으니까. 막연하거나 형이상학적 비판이 아니다. 실제로 장관이나 도지사나 기관장이 바뀌면 정책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옷을 바꿔 입는다. 대상과 무관하게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현장이 바뀌지 않았는데 정책은 (아마도 전임자와의) 차별화를 위해 바뀌어야 하는 당위성을 찾는다.

주인공의 자리

마루인의 세계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혼란은 주체를 정의하는 대안적 관점을 보여준다. 타자(대상)와 무관하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식적이지만 솔직히는 낯선 주체의 개념을. 정책이 그러한 대안적 주체가 되기 위한 정답은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실천은 있을 수 있다. 아마 언어를 바꾸는 것이 그중 하나가 아닐까? 대상과 나를 동시에 정의하는 언어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지금보다 나은 방향을 생각해 보자면 정책 분야 개념 중 ‘수요자 중심 정책’을 들 수 있다. 정책을 수요자 입장에서 설계하고 실행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보이겠지만 실제 실행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의 문화재단이 해당 지역 예술가를 위한 창작 지원을 한다고 하자. 재단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원이 만든 결과가 궁금하고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수요자) 입장에서는 본인 작업의 긴 흐름 안에서 다양한 지원과 상황이 ‘하나의 조각’으로 쓰일 뿐이다. 재단을 위해 예술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원 사업(정책)을 설계할 때 수요자의 작업 경로 안에서 이 사업이 어떻게 쓰일지, 어떤 용도가 되어야 할지 고민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직은 수요자 중심이 아닌 공급자 중심의 접근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정책을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해 언어를 바꾸고, 목표를 바꾸고, 관계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쉽게 말해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를 ‘실제로’ 주인공의 자리에 두겠다는 말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정책은 부득이 대상을 추상화하여 만나게 된다. 각 사람의 살아있는 목소리와 소통하지 못하는 한계가 불가피하더라도 오랜 시간 객석에 앉아 있던 예술가와 현장을 무대 위 원래 자리로 올려두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정책에도 감수성이 필요한 시대다.

설동준 / 문화예술 기획자
설동준은 문화예술 기획자이면서 기독교 대안학교 교사이면서 교육공학 연구자인 이것저것 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소수자를 이해하는 감수성은 약하지만 가까운 이들, 학생들을 통해 세상이 가진 다양성을 뒤늦게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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