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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영훈
  • 2024.12.05

지지봄봄 42호

-만남의 문법들

표류기

<다라가>로 시작된 대정골 마을 이야기

강영훈(제람)

‘제주 사람’이라 그 앞 글자와 뒷글자를 따서 ‘제람’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저는, 제가 사는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대정골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예술을 매개로 만남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2010년 문을 연 이곳은 인근에 사는 아이들의 일상을 품고, 꿈을 북돋고, 아이들과 세상을 잇는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속담처럼 아이들이 자라는 데 필요한 마을의 일원이 되고 싶었고 대정골 지역아동센터와 협력하여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참여자가 서로에게서 배우는 만남의 장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대정골 지역아동센터는 지난 15년간 약 스무 명을 정원으로 운영됐는데 몇 년 전부터 눈에 띄는 구성원의 변화가 보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결혼 이주 여성을 어머니로 둔 이주 배경 어린이의 수가 부쩍 늘었고 지금은 그 수가 절반을 넘어 절대다수가 되었습니다. 대정골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아이들 어머니 대부분이 베트남에서 왔는데, 개인차는 있지만 어머니들이 대체로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데 아이들과는 주로 한국어로 소통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어로 조리 있게 말하거나 풍부한 표현을 하는 아이가 드물고,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면서 사회적인 자아가 보다 뚜렷해질 무렵에는 어머니가 결혼 이주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경향도 보였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아이들이 한국어는 물론이고 어머니와 베트남어로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천혜향 농장을 운영하는 농부인 제 어머니가 가급적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고 농사를 지을 방법을 골몰하다가 제초제를 뿌리는 대신에 닭 세 명을 농장에 초대해 함께 살면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언어 그림책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이들과 10주 동안 매주 한 차례 만남을 가졌습니다. 아이들에게 제 어머니와 닭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대체로 좁은 닭장에 갇혀서 몇 달 동안 고기로 길러져서 죽음을 맞는 닭과 달리, 농장에서 사는 닭 세 명은 자유롭게 누비며 살라는 의미에서 다, 라, 가라는 이름을 각각 붙이기도 했습니다. 농촌이기는 하지만 현대화가 되어 있는 데다 밭농사를 주로 하는 저희 마을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닭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식탁에서 만나곤 했던 닭 세 명이 넓은 농장을 뛰어다니니 좀처럼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생김새로는 누가 다고, 라고, 가인지 모르지만, 모이를 뿌리며 이들을 한데 모아 ‘닭’하고 부르면 다라가가 어느새 저만치에서 모이를 먹으려고 달려옵니다.

닭 세 명이 꾸준히 알을 낳기 시작했고, 알의 개수가 어느 정도 모이자 닭 중 한 명이 알을 품고 삼칠일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아이들이 구구단을 외우는 중이라 삼칠이 이십일인 걸 알기 때문에 삼칠일이라고 해도 그게 스물 하루인 걸 곧잘 기억합니다. 공교롭게 어린이날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병아리들의 소식을 전하며 아이들과 기뻐하기도 했고,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은 것처럼 다라가가 낳은 병아리가 자라서 닭이 되고 다시 그들에게서 병아리가 태어나 닭이 되니 다라가가 살던 농장이 다라가라다라가로 가득한 그들만의 에덴동산이 된 사연도 아이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조류 인플루엔자가 유행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저희 마을에서도 애초에 전염병 유행의 싹을 자르자며 마을에 있는 닭이나 오리 등을 산 채로 잡아 묻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옆집 고양이 대정이나 우리 집 강아지 뭉치처럼 닭도 주어진 삶을 다 살면 15년 이상을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마을 사람들의 일방적인 압박에 굴하지 않고 다라가를 지켜냈습니다.

마을에서 일어난 생생한 이야기를 아이들과 공유하며 우리의 이야기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아이들의 입말로 이해하기 쉽게 써서 정리한 다음 베트남에서 온 어머니들을 몇 차례 초대하여 베트남어로 옮겨 적고 낭독하면서 고쳐 쓰기를 거듭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네 부분으로 나누었고 각각 적당한 소제목을 운율에 맞추어 붙였습니다. 다라가, 다가가, 달아나, 돌아가. 자유롭게 살아 움직이는 다라가의 이야기를 다룬 책의 판형이 닭들이 갇혀 사는 닭장처럼 좁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고민 끝에 책을 제본하지 않고 네 개의 커다란 종이에 네 부분을 나누어 인쇄하고 접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야기를 펼치면 책도 넓어지는 형식으로 만든 셈입니다. 함께 만든 이 책으로 아이들이 어머니의 모국어인 베트남어를 익힐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국어와 베트남어로 각각 오디오북도 녹음해 실었습니다.

10주의 워크숍을 통해 탄생한 이 책을 가지고 연말에는 작지만, 풍성한 마을 잔치를 열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번갈아 가며 다라가를 한국어와 베트남어로 번갈아 읽는 ‘다언어 낭독회’였습니다. 아이들은 병아리 모자를 쓰고, 어머니들은 닭 볏 모양의 머리띠를 하고 이야기를 각자 편한 언어로 사람들 앞에서 풀어냈습니다. 청중 중에 한국인 어머니를 둔 아이는 그 모습이 부러웠는지 자기 어머니의 가슴을 치면서 왜 엄마는 베트남에서 안 와서 낭독회에 출연하지 못했냐며 울상을 짓기도 했습니다.

 
사진 1. 다언어 낭독회에 참여하여 베트남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머니 /  사진 2.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과 기관 선생님
사진 1. 다언어 낭독회에 참여하여 베트남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머니
/ 사진 2.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과 기관 선생님



 
사진 3. 다언어 낭독회에서 한국어로 자신이 맡은 부분을 읽고 인사하는 어린이 /  사진 4. 다언어 낭독회에 참여한 아이들과 어머니 그리고 기관 선생님
사진 3. 다언어 낭독회에서 한국어로 자신이 맡은 부분을 읽고 인사하는 어린이
/ 사진 4. 다언어 낭독회에 참여한 아이들과 어머니 그리고 기관 선생님


다언어 그림책 <다라가>를 함께 펴낸 걸 계기로 이주 배경의 아이들이 처한 이중 언어 환경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해야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듬해부터 대정골 지역아동센터에서 매주 한 차례 아이들을 대상으로 원어민이 이끄는 베트남어 교실이 열렸습니다. 핀란드에서는 한 학교에 특정 언어권 이주 배경 아이들의 수가 여섯 명을 넘으면 법으로 그 언어를 가르칠 수 있는 원어민 교사를 학교에 배치하고 언어 수업을 열도록 한다고 합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그런 법적 지원이 없기 때문에 기관이 나선 겁니다. 또, 한 달에 한 번씩 베트남에서 온 어머니들이 힘을 모아 아이들에게 베트남 요리를 선보이는 시간을 꾸준히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고수나 향신료 향을 낯설어하던 아이들이 점차 익숙해져서 가리지 않고 잘 먹습니다.

<다라가>를 통해 가시화된 건 결혼 이주 여성과 이주 배경의 아이들만이 아닙니다. 동물권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진 아이들이 대정읍 지역에 기반을 둔 해양 환경단체 핫핑크 돌핀스와 활동하면서 실천하는 철학으로서 비건(vegan, 채소 과일 해초 등의 식물성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채식 섭취하는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고, 아이들이 이주 배경에 처한 현실이 놀림의 대상이 되거나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걸 인권 평화 교육을 통해 받아들이고 보다 단단하게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의 확장이 개인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함께 학교에 다니고 마을에서 살아가며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익숙하지만 제가 겪은 바로는 도리어 아이들 덕분에 아이들을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가 구성된다는 겁니다. 마을에 살면서 관계가 소원한 이들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힘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의 보호자라는 무게가 그들을 어색한 자리에 모이게 합니다. 변화는 아이들뿐 아니라 보호자들에게도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정골 지역아동센터가 구심점이 되어 지속적인 가족 심리 상담, 이주 배경 가족이 함께하는 운동회, 공동체 여행 등으로 변화의 움직임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어떤 시도를 하면 좋을지 이주 배경 아이들의 보호자들과 한자리에 모여 의견을 나눴습니다. 다언어 그림책 <다라가>를 펴냈던 경험이 무척 좋았다며, 다언어 배경의 후속 예술 활동을 하면 좋겠다며 마음을 모았습니다. 아버지가 한국어로, 어머니가 베트남어로 <다라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무대 공연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는 데까지 생각이 이어졌고,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몇몇 예술 창작 지원 기금 공모에 지원하여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라가>로 시작되어 앞으로 함께 써 나갈 대정골 마을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기대됩니다.


* 닭을 셀 때 ‘마리’가 아니라 ‘명’이라 한 것은 생명의 소중함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 이 글에서 다룬 다언어 그림책 <다라가>는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이 아닌, 제주의 지역 서점 어떤바람, 소리소문, 만춘서점, 이후북스 제주점, 비건책방, 앤드유 카페 그리고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책방, 이후북스 망원점(온라인 주문 가능) 등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다라가>를 읽는 방법을 안내하는 모션그래픽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vimeo.com/809428772

강영훈(제람)
제주를 기반으로 하는 독립 예술/출판 기획자이자 예술 교육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출판, 전시, 영상, 워크숍, 공연 등 다양한 예술의 형식을 빌려 조명하며 만남을 주선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으로 난민, 미등록 이주민, 농인, 이주 배경 가족, 성소수자, 여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낸 바 있습니다. 출판사 제람씨를 운영하며, 2024년 미 국무부로부터 ‘예술로 사회 변화를 촉진’한 한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