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호 넘봄 | 리뷰
‘굿 윌 헌팅’이 예술 강사에게 보내는 메시지
직면하는 힘에 관해
김유진 / 문화기획자
지난 몇 년간 여름방학, 겨울방학 시즌만 되면 예술 강사를 대상으로 한 기획력 향상 워크숍 요청 전화를 받았다. 기관 담당자는 대부분 예술 강사의 창의적 교육 기획 능력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데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심사 공모에 접수하는 문서 작성 능력, 회차로 구분된 커리큘럼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관성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 핵심이다. 이 요청은 결국 행정이 요구하는 양식에 맞춰 기획서 쓰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실 고민의 본질이 행정 이슈에 있기 때문에 관료 시스템과 문화예술교육 현장 사이에 낀 실무자 개인 차원에서 별다른 묘안을 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순수한 애정으로 고군분투하는 실무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나는 보통 워크숍의 취지부터 세부적인 커리큘럼에 이르기까지 방향을 전환하길 권한다. 워크숍 목표를 문서 쓰기에 두지 말고, 기획의 초동 과정인 아이디에이션에 집중해 예술 강사들끼리 서로의 욕구와 경험, 상상력을 나누는 장시간의 완결된 학습 경험을 디자인하라고. 즉, 교육 설계 연구를 위한 일종의 스터디 모임을 인위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업무 요청 전화를 받았으나 그것이 상담이 되고 결국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어쩌면 사업 담당자보다 내가 더 배운 것 같기도 하다. 반복적으로 워크숍을 수행하면서 교육이 실제 작동하는 지점이 어딘지를 알게 되었고 예술 강사들의 현황도 주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 해 문화예술교육계와 관계 맺어오다 보니 올해는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모니터링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지역 여기저기 방문해 교육현장을 돌아보는 일은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지역의 단체나 예술가가 아이들, 청소년, 부모, 다양한 형태의 지역 공간과 제대로 교차할 때 교육의 생명력이 생겨났고 곁에 있던 나도 덩달아 마음이 훈훈해졌다. 모니터링한 단체들과 다시 모여 사업 점검 및 문화예술교육의 지향을 확인해보는 워크숍에 참여하는 일은 묘한 소속감까지 주었다.
그러나 관찰하는 흥미로움에 비해 모니터링 위원인 내가 과연 단체들과 얼마나 의미 있는 내용을 주고받았는지 되짚어 보면 좀 갸웃하다. 3시간짜리 수업이 끝나고 나면 강사들은 아이들을 챙겨 보내고 치우고 하느라 마음이 바빠 보였다. 대충 정리를 하고 나서야 우리는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있었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쩐지 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심사위원들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그들에겐 자신을 프레젠테이션 할 수 있는 몇 분의 시간이 있었고, 나에겐 책임지지 않는 품평자의 위치에서 예의 바르게 몇 문장 던질 수 있는 발언권이 있었다. 기획자로, 동료로 의견 나누기를 기대했지만 깊은 맥락을 다루기엔 시간이 짧았다. 단체 입장에서도 중층적이고 입체적인 고민을 한 두 장짜리 문서 읽고 온 사람에게 갑자기 전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 같고 또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좀 묘연했다. 무엇보다 재단과 단체의 현실적 지위 차를 현장에선 간과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충북문화재단에서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워크숍에 참여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방문현장에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아주 실질적인 기획 역량에 초점을 두고 싶었다. 문화예술교육은 ‘ㅇㅇ’이라는 정의, 관념과 추상으로 요약 표현되어 듣는 입장에선 교과서적으로 ‘바른’ 교육을 훈계하는 듯 보이는 상황에서 미끄러져 나가려면 어찌 해야 할까. 행정이 정해준 사업 틀을 벗어나 구체적인 질감을 가진 언어가 마음속으로부터 표출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충북 꿈다락, 경기 꿈다락 가리지 않고 모니터링 중 실제 들었던 질문들을 떠올려 봤다. e-나라도움에 대한 항의나 예산 증액 요청을 제하고 나니 교육 내용 면에서 동일한 맥락이 변주되는 현상이 보였다.
“아이들과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고민되는 지점은 어디까지 강사가 해줘야 하느냐다.”
“참가 어린이 중에 간혹 주의집중이 안 되거나 협동 활동이 안 되는 아이들이 있다. 자신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경우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이다.”“가족 전체 참여 수업일 경우, 가족이 참관만 하는 것이 좋은지 수업에 참여한다면 어떤 형식이어야 할지 고민된다.”
“음악엔 전문적이지만 놀이 기획이 어렵다. 아이들 간의 사회 작용을 위한 어떤 기획이 있는지 알고 싶다.”
“모집이나 학생들과 친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냥 친한 것 이상의 교육적 관계가 필요하지 않은지 고민한다.”
강사들의 머릿속은 어질러진 방처럼 참여자와의 관계 설정 문제로 혼란스러웠다. 참여자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지적을 받다 보니 친절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수업 진행 중 돌출적인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으면 힘이 든다. 문제 해결을 위해 마냥 그 아이만 돌보자니 관계를 어디까지 책임져야 할지 모호하다.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지만 그럼 교육적 목표도 충분히 충당된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무는 것이다. 사실 내가 현장 활동가라도 딱히 답을 정할 수 없는 실질적인 어려움이다.
잘 풀리지 않는 생각을 몇 날 며칠 끌어안고 있다 어느 날 새벽 우연히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1997)’을 보게 되었다. 맷데이먼(Matt Damon)이 연기한 청년 윌은 세 번이나 입양되었다 버려진 어린 시절로 인해 사람을 쉽게 못 믿는 인물이었다. 그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본 대학교수 제럴드는 어떻게든 그에게 기회를 주고자 상담 치료를 받게 하는데 윌은 상담사들을 모욕주어 도발하는 방식으로 제럴드의 의욕을 꺾고자 한다. 영화 주인공이라서 매력이 있지 현실에서 평범한 친절과 호의를 베풀려는 사람들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행동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에게 숀이라는 천사를 보내준다. 숀은 윌의 마음속에 엉킨 실을 결정적으로 풀어주고 다시 매듭져주는 바늘이다. 감독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는 극적인 연출 없이 잔잔한 대사와 일상적 상황들로만 영화를 구성하는데 영화의 압도적 분량을 차지하는 숀과 윌의 대화를 듣다 보면 “어, 이거 문화예술교육 이야기인가?“ 싶다.
“내가 미술에 대해 물으면 넌 온갖 정보를 다 갖다 댈걸? 미켈란젤로. 너는 그에 대해 잘 알 거야. 그의 걸작이나 정치적 야심, 교황과의 관계, 성적 취향까지도 말이야. 그렇지? 하지만 시스티나 성당의 냄새가 어떤지는 모를 거야. 한 번도 그 성당의 아름다운 천장화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전쟁에 관해 묻는다면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겠지. 다시 한 번 돌진하세, 친구들이여! 하지만 넌 상상 못 해. 전우가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너를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걸 지켜보는 게 어떤 건지.”
이 장면을 지나면서 나는 ‘굿 윌 헌팅’을 함께 보는 무비토크를 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생겨났고 곧바로 이어지는 대사를 듣고서는 결심을 굳혔다. 숀은 윌이 아내의 암 투병을 조롱한 지난번 상담일을 되짚으며 솔직하게 마음을 다 열어 보여준다. 그림 한 장을 보고 숀의 인생을 다 안다는 듯 아프게 난도질한 윌의 행동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그리고 상처가 어떻게 금세 아물었는지에 대해. 동시에 윌 역시 그 스스로를 위해 방어벽을 낮추길 요청한다.
“네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고 네가 뭘 느끼고 어떤 애인지 ‘올리버 트위스트’만 읽어보면 다 알 수 있을까? 그게 너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너 스스로에 대해 말해야 해. 자신이 누군지 말이야. 그렇다면 나도 기꺼이 관심을 갖고 대할 거야.”
워크숍에서 대화 코디네이터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이 영화는 예술 강사들에게 보내는 중의적 메시지였다. 첫 번째 메시지는 강사와 참여자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굿 윌 헌팅’은 강사가 참여자에게 ‘직면’할 필요를 보여준다. 인간은 투명한 자에게만 투명하게 답한다. 숀이 윌에게 한 핵심적인 행동은 자신이 상처받았음을 꾸밈없이 전한 것이다. 특별히 문화예술교육 분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민주적 리더십이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선 겸허한 솔직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맞추기 위해 굳이 ‘급식체’를 배우는 것보다 신뢰할만한 어른이 되는 일이 훨씬 어렵다. 질문의 방향을 대상자가 아닌 나에게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참여자가 중요하다고 할수록 참여자가 어떻게 해야 협력적이고 자발적이 될까 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몰두한다. 이때 변화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다.
반대로 나는 협력하지 않는 참여자와 어떤 위치에서 만나고 싶은지, 어떻게 만나야만 하는지 질문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몰입할수록 시선이 그에게 가 꽂히고 그의 이해되지 않는 행위를 해석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살피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복합적인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나는 교육자로서, 기획자로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목표 지점을 향해 가고 싶은지가 뚜렷해져야 한다. 결국, 참여자에게 직면한다는 뜻은 나 자신에게 직면한다는 뜻이 된다.
두 번째 메시지는 정책과 강사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수업 중엔 강사가 숀이고 참여자가 윌이지만 정책 현장에선 정책이 숀이고 강사는 윌이다. 우리는 정책적으로 천사 같은 숀을 만나본 적이 별로 없다. 허니 상처투성이다. 그럼에도 재능 있는 윌이 세상에 기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선 이미 다 겪어 알고 있다고 말하는 대신 용기 내어 진실을 전할 언어를 더듬어 찾아야 한다. 많은 실패가 예견되지만, 그 실패가 밀알이 되도록 애쓰는 마음과 실패가 곧 나의 처지인 것처럼 결론 내는 태도 사이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본질적으로 갈린다.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 내에서 삶을 길어 올리기 위한 밀도를 추구하는 일의 중요성.
나는 꿈다락 워크숍을 통해 ‘굿 윌 헌팅’이 내게 전해준 이 메시지를 예술 강사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엉뚱하게도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생산적 논의를 하는 대신, 자이언티(Zion.T) ‘양화대교’의 훅이 반복되어 들리는 기분으로 말이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