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호 곁봄 | 칼럼
단두대 위에 올라선 체험주의
임상빈 / 잔꾀
♟ 느리고 고집스러운 농부로부터
유기농법에는 땅에서 돌을 골라내지 말고 극심한 가뭄이 아니면 물도 주지 말라는 충고가 있다. 땅에는 흙과 함께 다양한 크기의 돌들이 뒤엉켜 있다. 돌을 골라낸 토양에서는 작물이 잘 자란다. 수확량도 많다. 한 마디로 농사를 잘 지었다는 세간의 평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땅은 힘을 잃는다고 한다. 반대로 땅을 골라내지 않는 밭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비가 내린 이후에 땅속의 큼지막한 돌 밑에는 소량의 물이 고여 있다고 한다. 작물은 그곳을 향해서 뿌리를 뻗어간다. 멀고 깊어 보이지도 않는 단단한 돌 밑으로.
♜ 얇은 세상을 달리는 두꺼운 얼굴
체험을 모토로 한 지역축제의 현장을 보면 이렇다. 밤 줍기 행사에서는 야밤에 밤 자루를 들고 와서 나무 아래에 흩뿌려 놓는다. 밤은 중국산이다. 산천어와 빙어 축제는 양식장에서 배송된 것을 풀어 놓는다. 지역 특산물이 아니다. 이렇듯 먹거리 프로그램은 어느 곳에서나 유사한 틀로 짜인다. 도자기 축제에서는 물레 위의 흙을 붙잡아 보는 것으로 끝난다. 재밌는 것은 알면서도 사람들이 몰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체험행사는 여전히 호황을 누린다. 서로 속이고 속아주는 문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 때문에 가능해진 것인지는 따져봐야 의미가 없다. 이것은 오늘날의 소비문화이자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우리는 얄팍해졌다. 깊이를 찾는 것은 오래 걸린다. 참지를 못한다. 빨리 느껴야 한다. 우리는 문화-조루증을 앓고 있다. 그럼에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드러낸다. 성과라는 이름으로. 한 철 장사와 한탕주의로 점철된 문화산업의 페스트푸드화가 버젓이 성행하고 있다. 체험은 저급한 대중문화가 되었다.
♞ 어른의 울타리와 아이들의 도약력
최근에 나는 아동·청소년들과 함께 우드가스 스토브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적정기술의 이념과 가치는 두더지 게임처럼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가 무관심 망치를 얻어맞고 표면 아래로 파묻혀 버렸다. 아이들한테는 공식적인 불장난 프로그램일 뿐 그 이상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요즘 아이들은 살아있는 불을 혼자서 만들어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난생처음 성냥을 손에 쥐어 본 아이는 스냅으로 발생한 불꽃에 놀라 기겁하며 막 타오르는 성냥을 던져버렸다. 불을 처음으로 마주한 인류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아무튼, 성냥 1개비가 누구도 건들지 못한다는 중2를 벌벌 떨게 했다. 이것이 경험 없는 본능의 문제였다면, 경험을 쌓지 못한 이성의 문제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연료를 만들도록 나무젓가락 뭉치를 던져 주었더니 하나씩 토막 내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꺾겠다고 낑낑댄다. 하나씩 꺾기가 쉽다는 것은 알지만 오랜 시간 같은 노동을 반복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캔 스토브에 들어가는 나무젓가락은 대략 14개 정도로 이등분 하는 데 1분이면 충분하다. 어른과 아이의 경험치가 만든 시간의 상대성을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이때 내가 취한 처방전은 좀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무젓가락은 치워 없앴고, 각목과 도끼날을 던져놓고 장작을 쪼개서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이들은 새로운 도구에 관심을 보였지만, 이내 한숨이 많아졌다. 육체노동을 벗어나고 싶은 한 아이는 새로운 연료라며 한 봉지의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그것은 목공실에서 가져온 톱밥이었다. 그러나 톱밥은 불씨는 옮겨도 불타지는 않는다는 문제점 때문에 연료가 되지 못한다.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문제점을 들고 왔지만, 대책은 되지 못했다. 일이 여기서 끝났다면, 아이는 프로그램의 동력을 잃어버려 겉돌게 되었을 것이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이 대화를 엿듣게 된 다른 선생님이 해결책을 던져주었다. 톱밥을 뭉쳐 다시 나무화하는 방법이었다. 점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은 놀랍게도 햇반이었다. 아이가 만든 문제 하나를 놓고 두 선생의 대화는 만리장성 축조 시에 쌀과 석회가 혼합된 반죽이 쓰였다는 역사까지 논의하게 되었고, 아이는 신나서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제2막이 열린 것이다. 점입가경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수업 풍경 아니 무대가 바뀌었다. 절구통에서 햇반을 찧는 아이와 오순도순 모여앉아 톱밥 동그랑땡을 만드는 아이들 그리고 커다란 접시에 톱밥 동그랑땡을 담아서 전자레인지에 구워 말리는 아이로 역할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반복적인 육체노동을 꺼리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가내수공업의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이 오래 간 것은 아니다. 생각만큼 그렇게 재미난 놀이가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이들은 이제 불장난이 자연스러워졌다. 그 모습은 불에 익숙해진 듯 보였고,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벼운 휴지를 태우면 불꽃이 불새처럼 날아다닌다고 좋아했고, 스토브 불이 꺼지면서 발생하는 연기를 주사기로 빨아들여서 밀도 높은 연기 방귀를 뿜어내며 놀았다. 이런 풍경은 내가 한 번도 그려보지 못한 그림이다. 나는 어느 순간 선생이 아니게 되었다. 함께 화장실 휴지를 다량으로 훔쳤고 함께 도망쳐 달렸다. 연기가 많이 나도록 일부러 불을 꺼뜨려 주었으며, 더 큰 주사기를 사다 줬다. 수업의 목적은 사라졌고 불놀이만 남았다. 그러다 사고가 났다.
이날은 송진 덩어리를 녹여서 젓가락 횃불을 만들어 놀고 있었다. 선생들은 멀리 있었고, 아이들은 불의 마법에 걸려 불꽃의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연소 실험을 하는 장소에는 초기 점화를 유도하는 착화제로 알코올이 상비되어 있었는데, 한 아이가 알코올을 조금만 붓는다는 것이 그만 쏟아버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불의 덩치는 엄청나게 커졌고 당황한 아이는 불을 제압하겠다고 엉겁결에 대팻밥 더미를 쏟아버렸다. 실수는 언제나 또 다른 실수를 불러들인다. 이제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넓게 번졌고, 아이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불은 손쉽게 진압되었다. 사실 불은 크게 나지 않았다. 반경 50cm 정도 안팎에서 타올랐을 뿐이다. 그러나 사건 안에 있던 아이와 사건 밖에 있었던 어른의 체감은 매우 큰 차이가 났다. 방화를 저지른 아이는 엄청난 충격에 빠져 멍한 상태로 콘프라이트를 한 움큼씩 폭풍 흡입하길 반복했다. 공동 책임을 물어 다 함께 청소를 하면서는 재를 쓰레기봉투에 담았다가 비닐이 뚫리고 연기가 발생하는 2차 방화사건이 추가로 일어났다. 이제 다시 불은 무서운 것이 되었다. 그리고 불과 가연성 물질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이는 쭈뼛거리며 다가와 정중히 사과했고, 나는 내가 유년에 저지른 더 큰 사건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은밀한 제안을 했다. 어제의 기억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고 그림일기로 토해놓으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다고 꼬드긴 것이다. 남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 중에 죄의식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건을 무용담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조만간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시도하지 못한 금기를 깨뜨린 아방가르드로 변신할 것이다. 아이들의 모험심은 울타리 밖을 넘볼 때 부풀고 어른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때 성장하는 법이다. 나는 아이의 과장법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이 사건은 아이에게 소중한 경험적 사유로 오랫동안 몸에 기억될 것이다. 왜냐하면, 고개 숙여 사죄하는 반성적 태도를 드러냈다는 것은 몸속에 자리한 기억이 괴로워서 취하는 행동패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발적 행동에 대한 자책과 친구들의 나무라는 시선이 뒤엉켜 심리적 타격과 정신적 충격이 몸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은 것이다. 만약 평소의 불장난처럼 놀이의 차원에서 끝났다면, 아마도 단순 체험이 되어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낯선 체험은 결코 몸에 머물지 못한다.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성과 능숙함을 필요로 한다.
♛ 매끄러운 프로그램은 의심스럽다
프로그램이 매끄럽게 진행된다는 것은 강사가 잘 가르친다는 것으로 회자되곤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현장 컨트롤과 템포 조절 능력이 좋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의심을 던져본다. 참여율과 집중도가 높은 프로그램들은 아이들 개개인의 속도 차이를 어떻게 좁혀 놓을 수 있었을까. 럭비공처럼 돌출행동과 이상기류를 만들어 내는 아이들을 어떻게 잠재우고 동참시킬 수 있었을까. 어느 현장에나 무관심한 아이, 삐딱한 아이, 되바라진 아이, 그냥 놀고 싶은 아이 등등 개성 강한 아이들이 포진되어있었을 텐데 어떻게 하나의 관심으로 상황을 몰아갈 수 있었을까. 아이들의 목적과 강사의 목적이 다를진대 어떻게 아이들은 집단 최면에 빠져든 것일까. 이런 현상은 몸을 쓰는 프로그램에서만 일어나는 괴현상일까. 일정한 수준을 끌어내야 다음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억제력을 발휘해야 하는 장르의 특수성 말이다. 아니면 집단행동이기 때문에 홀로 딴짓을 하기가 뻘쭘해서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는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일까.
실상 프로그램이 도달하려는 지점은 아이들에게 흥밋거리도 되지 못한다. 한동안 나는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으며, 이런저런 방법적 시도들은 전부 구겨져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그래서 이념적 가치는 아이들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포기해야 하는 영역으로 다가왔다. 왜 하는지에 대한 진지함의 결핍으로 표면을 훑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목 넘김이 불편해도 아이들이 외치는 그냥주의에 편승하여 타협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 손 들고 한 발 물러서니 나의 강박 때문에 시야가 좁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예술교육의 여정은 쳇바퀴 운동도 아니고 패키지여행도 아니었다. 주입한다고 흡수되는 백신이 아니었다. 예측한다고 계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코스모스가 아니고 카오스로 발을 디뎌야 하는 것이었다. 의미 덩어리를 만들어 놓고 함께 뜯어 먹으며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더듬어 가며 만들어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해하게 되었다.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과 엘리스처럼 토끼굴에 빠진다는 말들이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새로움이라는 속성이 얼마나 우연성에 의지하고 있는지를. 담벼락의 개구멍이 활로가 되어 숨통이 트인다는 것을. 빈틈의 중요성을.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두통의 묘약은 허탈하지만, 아이들의 무목적성과 불확정성에 있었다. 아이들은 재미를 쫓는 루덴스에 가깝지 생각하는 사피엔스와는 거리를 둔다.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관심은 언제나 프로그램 주변을 맴돈다. 잠깐 흥미를 보이다가도 금세 딴짓을 일삼는다. 프로그램의 가치와 의미론 같은 어려운 얘기는 어른들의 합의일 뿐 아이들은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예술 강사의 제안과 부모의 선택 그리고 재단의 심의와 지원 및 평가는 모두 어른 간의 합의다. 아이들의 의견과 취향 그리고 욕망은 언제나 빠져있다. 이것이 우리 어른들의 착각이며 간과하고 있는 팩트다. 우리의 아이들은 자신이 왜 배우는지도 모른 채 부모의 손에 끌려와 주어진 예술 활동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태에 빠져 건성건성 하곤 한다. 혹시 아이들은 하는 시늉이라도 보여야만 하는 연극적 몸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깊이 배울 마음이 애당초 없었기 때문에 얕게 발을 담그는 것으로 아이의 방어기제가 작동되고 있다면 우리의 문화예술교육은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간혹 가다 한 번 해봤다고 으스대며 허세를 부리는 아이들도 있다. 마치 겉 담배를 피우며 건들거리듯이 체험은 가오를 잡는 빌미까지 제공하고 있다. 만약에 체험을 위한 체험이 아니라 체험을 경험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사용한다면, 이것은 필요한 과정이 될 테고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죽은 토양의 사회
떠나고 있다. 예술 강사들도 떠나고, 행정 요원들도 떠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에 숙련된 사람들의 이탈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뿌리를 깊이 내렸음에도 버티질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체험주의(비정규직 시스템)는 뿌리내린 사람이 거목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깊고 높은 경지로 다다를 수 없다. 고도를 기다리는 어리석음처럼 하향평준화의 추세는 이제 사회 전반에 퍼진 만성피로증후군이 되었다. 모두가 체험 직업군으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풍파에 휩쓸리는 것인지 자율적 의지의 표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손발을 좀 맞췄다 싶은 요원들의 품귀현상은 씁쓰름하고도 허무하며 애잔한 술잔을 기울이게 한다. 좋은 요원이 좋은 강사를 만드는 법이다. 믿을만한 요원과 특이한 강사는 상호이익을 받으면서 같은 토양에 생식해 있는 공생재배 작물과 닮아있다. 혼작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서로 간에 생육을 촉진해주고 병해충의 침입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해 주는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지금의 비정착지대에서는 유목민이 아니라 떠돌이 난민으로 튕겨 나가고 있으므로 서로를 돌볼 여지가 없다.
♚ 동일한 패턴으로 훼손된 고유성
어떤 컨설팅 위원은 모순감정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더 나은 프로그램을 안착시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길잡이 역할을 해왔는데, 도달한 지점에서 다름과 차이가 밋밋한 상태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산을 열심히 올라서 한숨 돌리고 둘러보니 고지가 아니라 평지를 만났으니 얼마나 당혹스럽겠는가. 이와 유사한 그림이 있다. 시골이 도시 풍경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프렌차이즈와 벤치마킹으로 편리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다양성은 사라지고 있다. 세상은 점점 구별 짓기가 어려운 동일성으로 세팅되고 있다. 고유한 맛과 개별적인 멋은 중화되고 표준화와 동질화로 뭉뚱그려져 모두가 친인척 관계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 보는 것도 어디서 본 듯한 분열-착란증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좋은 것을 나눠 먹고 함께 성장하다 보니 체형과 기질이 비슷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체험 자체의 얕은수가 아니라 비슷한 체험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갇힌 우리의 모든 것을 걱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