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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06
22호 곁봄 | 칼럼
플럭서스에서 배우다
 
구정화 /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

 

경험으로서 예술
 
 역사적으로 기술의 발전은 산업현장과 더불어 교실의 모습을 바꾸어왔으며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이 화두인 오늘날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미래학자는 향후 소멸할 몇 개의 키워드로 학교라는 시스템을 꼽아왔다. 극단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러한 주장에는 인간이 정보를 습득하는 환경에 따라 교육의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특히 명시적이고 안정적인 차원의 정보를 주고받았던 20세기와 달리 암묵적 지식의 세계를 향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교육도 큰 변화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암묵적 지식의 세계라는 개념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기술혁명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사람들은 새로운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거나 새로운 정보 검색을 위해 별도의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일단 먼저 사용해 본 후 오류를 수정하면서 암묵적으로 연결해보는 과정을 거쳐 사용법을 흡수한다. 유사해 보이는 것을 연결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동원해가며 기존의 지식을 수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습득되는 지식은 개인의 경험과 실험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교사의 일방적인 전달만으로는 배움이 가능하지 않다. 또한, 우리의 감각을 통해 신체에서 학습이 일어나기에 두뇌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지적 과정과 더불어 경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명시적 지식의 전달이 무의미해진 지금의 교육 현장에서는 교사가 가르치지 않아도 학생은 스스로 배울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미래 교육에서는 참여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며 배운다. 암기를 통해 자신의 배움을 증명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미지의 것을 알아가면서 좀 더 좋은 질문을 통해 지속해서 배움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것은 질문과 탐구, 열정, 기질, 그리고 공동체라는 환경이 된다.(더글러스 토머스, 존 실리 브라운, 『공부하는 사람들』,서울, 라이팅하우스, 2013, p.103∼121.) 이처럼 감각을 열게 하는 경험과 질문, 탐구를 강조하는 교수법은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체험학습, ‘통합교육’의 이름으로 실행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교육 예술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새롭게 주목받아 왔다. 
 
 교육 예술은 인간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창조적 활동으로서 예술을 간주하고 그 교육적 의미를 새롭게 정립한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에서 시작되었다. 듀이는 예술을 수단화한다는 비판 속에서도 예술이 인간의 일상으로 복귀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이 막 분화를 마치던 시기에 오히려 그는 예술과 삶의 통합을 이야기하며 ‘경험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였다. 그가 볼 때 일상의 경험은 인간이 한 생명체로서 환경과 맺는 상호작용이며 세계와의 능동적이고 활발한 교섭을 의미한다. 이것이 결국에는 예술의 근원이자 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듀이는 일상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경험이라도 일정한 리듬으로 구성되면 미적 경험으로 전환된다고 보았다. 즉 일상의 경험은 일정한 리듬을 갖게 되면서 변화하고 발전하며 이러한 리듬감의 회복이야 말로 삶과 예술의 중요한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듀이는 기존 예술 개념을 넘어서는 예술의 교육학적 전망을 제시하면서 삶과 예술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발견해내었다. 듀이가 주장한 ‘경험으로서의 예술’은 이후 플럭서스 예술가들에 의해 구현되었고 예술사적으로 저평가된 플럭서스 예술을 교육 예술의 맥락에서 재규정하는 작업도 현재 진행되고 있다. (한나 히긴스는 플럭서스의 예술형태가 갖는 교육적 의미를 존 듀이에서부터 시작되는 경험하는 예술의 교육철학과 연결하여 플럭서스 페다고지로 재해석하고 있다. Hannah Higgins, Fluxus Experienc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크레이그 세이퍼는 ‘플럭서스 실험실’이라는 개념 속에서 실험적인 학교로서의 플럭서스 예술 운동에 주목한다. Craig Saper, “Fluxus as a Laboratory”, The Fluxus Reader, Ken Friedmen ed., London, Academy Editions, 1999.)
 
 
실패를 배우다
 
 20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독특한 활동을 한 괴짜들의 집단인 플럭서스는 1960년대를 전후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결성된 다국적의 젊은 예술가 그룹이다. 플럭서스(Fluxus)라는 용어는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 1931∼1978)가 1961년에 만든 것으로 라틴어의 ‘fluere’에서 유래한다. 흐르다, 혹은 흐르는 상태를 의미하는 플럭서스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경계에서 활동하던 국제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 그룹의 특성을 잘 대변해준다. 마키우나스를 비롯한 백남준(Nam June Paik, 1932∼2006), 오노 요코(小野洋子, 1933∼), 딕 히긴스(Dick Higgins,1938∼1998), 시게코 쿠보타(久保田 成子,1937∼2015),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1926∼2008), 앨리슨 놀즈(Alison knowles,1933∼) 등의 플럭서스 작가들은 플럭서스가 어떤 하나의 예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태도이자 정신이 되길 바랐고 일상에서 예술적 경험을 발견하고 조직하고자 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에 의해 구체화된 ‘경험으로서의 예술’은 존 듀이에서 존 케이지로 이어지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자유로운 실험학교의 학풍에서 기원하며 근본적으로는 창의성과 자발성을 담보한 창조적 시민이라고 하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과 연결되어 있다.(Craig Saper, “Fluxus as a Laboratory”, The Fluxus Reader, Ken Friedmen ed., London, Academy Editions, 1999, P.138)일방적이고 단일한 정보의 전달에 도전하는 것은 단지 참정권의 획득과 같은 정치 제도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보가 생산되는 모든 곳에, 소통이 필요한 모든 자들에게 국면의 전환이 요구되었고 예술가들 중 가장 먼저 응답하고 실천한 자들이 바로 플럭서스 작가들이었다. 
 
 예술에 대한 개방성과 반예술적인 태도로 인해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매체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예술이 음악, 공연, 춤, 문학이 동시에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각 장르가 섞여 있는 형태를 딕 히긴스는 인터미디어라는 개념으로 총괄하였다.(Astrit Schmit-Burkhardt, Maciunas’s Learning Machines From Art History to a Chronology of Fluxus, The Gilbert and Lila Silverman Fluxus Collection, Detriot, 2003, P.9) 이벤트, 플럭서스 키트, 메일아트, 게임아트와 같은 플럭서스 예술 형태들은 모두 이러한 미학적 실험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무엇보다 플럭서스는 육체가 어떻게 감각과 지식을 총합하여 표현할 수 있는 지에 관심을 가졌으며 인간 신체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의미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Kristine Stiles, “Between Water and stone”, IN THE SPIRIT OF FLUXUS, Waker Art Center, Minneapolis Minnesota, 1993, pp.94∼95.) 
 
 플럭서스 이벤트는 미국의 블랙마운틴 칼리지(Black Mountain College, 1948년과 1952년의 여름학기)와 신사회연구소(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1958-1960)에서 있었던 존 케이지의 실험적인 강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블랙 마운틴 칼리지는 1933년 설립, 1956년 폐교된 학교로 존 케이지와 머스 커닝엄, 조셉 알버스 등의 예술가들이 교수로 있으면서 실험적인 교육 방식을 통해 미국 현대예술에서 주요한 예술가들을 배출하였다. 순수 예술은 물론 무용가와 작곡가, 시인, 극작가와 음악인들이 몰려들었다. Martin Duberman, Black Mountain: An Exploration in Community, New York, Dutton, 1972) 벅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블랙마운틴 칼리지의 분위기는 기술적이거나 유형적인 접근보다는 역사적이고 실험적인 접근을 통해 예술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실패하는 것이 교육의 한 과정처럼 다루어지는 분위기였다고 한다.(학교가 폐쇄된 후에도 존 케이지와 머스 커닝엄, MC 리차드 등의 교사들은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강의를 지속하였다. Craig Saper, ibid , P.138) 케이지는 1952년 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있었던 자신의 수업에서 우연성의 미학에 근거해 작가의 의도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일상의 반복적 행위를 동시간대에 펼쳐놓는 행위를 기획하였다. 케이지가 ‘협동 행동’ 혹은 ‘동시적 이벤트들의 자율적 습성’이라고 명명한 이러한 활동은 훗날 플럭서스 이벤트의 출발점이 되었다. (학생들이 모인 구내식당에는 저녁 식사 후 케이지와 동료들이 의자를 모아 두었고 의자 위에는 하얀색 컵이 한 개씩 놓였다. 케이지는 계단 위에 올라서서 강의를 시작했고, 커닝햄은 통로에 작은 개를 풀어두고 솔로 안무를 선보였다. 튜더는 케이지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찰스 올슨(Charles Olson)과 메리 캐롤린 리차드(Mary Caroline Richards)는 시를 낭독했다. 라우셴버그와 케이지는 확성기가 달린 구식 빅터 축음기(Victrola)에 오래되고 잡음이 심하게 섞인 음악을 틀었다. 이 시연은 의자 위에 놓인 하얀 컵에 하나씩 커피를 채우면서 한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Tomkins, Calvin. Off the Wall : A Portrait of Robert Rauschenberg, Picador, 2005, p.68.)케이지에 의해 시작된 이벤트는 일상에서의 미적 경험을 위한 것으로 일상의 행위에 리듬감을 부여해 의미를 만드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임을 보여준다. 
 
관계를 엮어 리듬을 부여하다
 
 플럭서스 이벤트에서 예술가는 관객과 평등한 관계 속에서 경험을 만들어간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어떤 변화를 이루어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의 교류를 통해 관객이 일상에 대해 강화된 의식을 갖도록 했다. 또한, 관객이 반드시 그 장소에 있지 않아도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지리적, 공간적, 언어적 경계를 뛰어넘은 사회적 소통의 공간을 창출하였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플럭서스 작가들은 전 세계에 분포하면서 이동하였고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했다. 이들은 화랑이나 미술관뿐만 아니라 모든 공간을 이벤트가 벌어질 수 있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차용한 재료와 언어를 사용하였다. 인터미디어라고 총칭되는 플럭서스의 독특한 방법론은 결과적으로 재료나 기술에의 충실함을 넘어서 예술의 평준화를 지향하였다. 이는 예술을 더욱 접근 가능하고 민주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기인한다. 
 
 결과적으로 플럭서스 퍼포먼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객 혹은 참여자와의 상호작용이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정보의 조직과 매개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플럭서스 퍼포먼스로 통칭하는 이러한 예술 경험에는 사물과 사람(관객), 그리고 그사이를 매개하는 행위가 늘 상정되었다. 플럭서스 작가들은 의미를 생산하는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더 나아가 그 의미의 수신자와 발신자의 관계를 바꾸어보고자 했고, 관객이 작가가 제공하는 정보를 뛰어넘어 자신의 눈과 귀로 느끼며 수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플럭서스 예술에서 행위는 환경에서 받아들인 자극에 대한 반응이자 정신적 활동으로서의 지식이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경험을 재조직할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험은 어떤 의미에서 한 사람의 일생을 따라 계속적으로 시간과 장소의 재정의를 유도하면서 배움의 과정을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존 듀이가 말했던 것처럼 배움이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삶의 가치와 소통하고 그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예술 작품이 개인들이 삶에서 공유할 수 있는 가장 내밀하고 생기 넘치는 보조수단이 될 거라고 믿었다.(Dewey, Art as Experience, New York:Milton Balch, 1934,p.334; Hannah Higgins, Fluxus Experience,,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P.208에서 재인용)
 
 ‘경험으로서의 예술’은 환경 속에 존재하는(살아가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으로 예술을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분리되어 있던 예술과 삶의 관계를 접합하고자 한다. 플럭서스 예술이 다장르적이고 총체적이며 수행적인 특징을 갖는 데에는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하나의 경험으로 예술을 재규정하고, 그 경험을 창조하는 자로서 예술가를 새롭게 배치하였기 때문이다.(Hannah Higgins, “Teaching and Learning as Art Forms : Toward a Fluxus-Inspired Pedagogy”, Fluxus Experienc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pp.188∼189) 이들이 창조한 예술가는 고립된 일상의 경험에 리듬을 부여함으로써 연속적이고 생기 있는 삶의 과정을 만들어가는 매개자이자 관계의 조직가이다. 
 
(이 글은 필자의 글 「러닝머신」 (백남준아트센터, 2013)의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