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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지윤 _작가
  • 2017.11.22
22호 가봄 | 현장스케치
상상력을 위한 썸띵
 
강지윤 / 작가


 

* 본 기록은 9월 6일부터 8일, 경기상상캠퍼스에서 진행된 문화예술교육 매개자 역량 강화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의 일부 과정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다. 참여자들은 네 모둠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워크숍을 경험하였고 이 글은 그 중 김월식 작가가 모더레이터의 역할을 한 모둠의 과정을 중심으로 돌아본 내용이다.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기획, 진행한 <상상력의 징후>의 목적은 예술가들이 문화예술교육자로서 역할 할 때 본인의 예술 활동과 교육 활동이 겹쳐진 영역을 발견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김월식 작가가 안내한 워크숍은 정확하게 ‘무언가를 했다’고 말하기에 곤란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에는 분명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던 과정이었다. 그 ‘무언가‘를 예술적 또는 교육적(혹은 둘 다 포함된) 가치로 번역해내는 것이 이 워크숍의 과정이자 결과였고, 그것을 글로 번역해 내는 것이 내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인데,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워크숍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해와 이해의 중간쯤에서 번역할 수밖에 없다.
 
 워크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자신의 기준과 언어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참여자들은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교육으로 번역해낼지(그 반대의 경우에도) 자신만의 언어를 고민해야 했다. 그 과정에 친절한 가이드는 없었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말이다. ‘아래 순서에 따라 만들어보세요.’ ‘220도로 예열된 오븐에서 15분간 구워주세요.’ ‘A와 B사이에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밀어 넣어 주세요.’ ‘2-3일 정도 그늘지고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건조해주세요.’
 
 참여자들은 뚜렷하게 그려진 안내선이 아닌 흐릿한 단서들을 따라가며 자신의 연장선을 그어나갔다. 그 중에는 참여자들이 끝까지 발견하지 못한 것도 있을 테고, 모더레이터가 의도치 않았음에도 참여자들이 발견해 낸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들 조심스럽게 더듬거리고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어딘가에 도착했다.
 
 그래도 이 막연한 시간동안 일관되게 해 온 일들이 있다. 한 단어로 특정하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김월식 작가의 ‘썸띵’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빌려온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는 이 ‘썸띵’은 워크숍 시간동안 ‘조몰락거리기, 목적 없이 걷기,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슬슬 톱질하기’의 방법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났다. 
 

 

썸띵 1. 조몰락거리기
 
 시작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천사점토였다. 혹여 한 번도 천사점토를 만져본 경험이 없는 분들은 이번 기회에 꼭 구입해 체험해보길 바란다. (김월식 작가는 교구의 혁명이라고 까지 표현했는데)가벼운 무게와 말랑말랑한 촉감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힘들이지 않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기존의 점토는 반죽하거나 성형하기에 많은 힘이 들었지만 천사점토는 숨 쉬는 만큼의 힘으로 반죽을 조몰락거릴 수 있었다. 네 명이 둘러앉아 천사점토를 쥐자 손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성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무언가 부족한 그런 에너지, 아니 에너지라고 말하기에 턱없이 맥 빠지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손이 움직이자 이내 에너지가 그대로 점토에 전달돼 이리저리 형태를 바꾸어 나간다. 무언가를 의도하고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의도는 중간에 생겨나거나 사그라들었다. 또는 다른 것으로 변형되었다. 점토는 삐죽삐죽한 무언가였다가 납작한 것, 그러다가 다시 손가락 자국이 잔뜩 난 일그러진 덩어리가 되었다가 뽀송뽀송하고 동그란 것으로 바뀌어갔다. 머릿속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의 덩어리의 형태마다,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시시각각 변한다. 머리 전체가 구름이라도 된 듯하다. 
“더운 밥 먹고 이상한 짓한다.”
김월식 작가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란다. 실없이 웃어넘길 수도 있는 농담이 또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상상력의 영역이 넓어졌기 때문일까, 과연 고작 천사점토 때문에?

 

 

썸띵 2. 목적 없이 걷기
 
 다음에 한 일은 걷는 일이었다. 사실 경기상상캠퍼스에 와서 걷지 않는다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걷는 일이야 매일 한다지만 이렇게 목적 없이 걷는 일은 웬만한 여유가 있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이 워크숍의 과정 동안 자신 안에서 낯선 질문이 생겨나게 하는 매개체는 여러 가지가 있었고 천사점토와 더불어 걷기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들은 띄엄띄엄 걷고, 잠시 눕기도 했다. 서로 어떤 질문이 던져지거나 말이 시작된 적은 있었지만 명료한 방식으로 답변이 오가거나 대화를 끝맺지는 않았다. 대신 머릿속은 나른하면서도 동시에 분주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평소라면 터럭만큼도 떠올리지 않았을 <산을 오르는 걸음걸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같이 걷던 사람들의 머릿속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상한 생각들로 바빴으리라 생각한다. 늘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시간을 계산하고 도착 후 처리해야 할 일들의 순서를 생각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이렇게 하릴없이 걷는 것 역시 꽤 (정신적으로)바쁜 일이라는 것에 놀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재주는 없으므로 나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생각의 꼬리 일부분을 옮겨본다.
 
<산을 오르는 걸음걸이>
어느 누군가는 등산을 하며 주변을 휘 둘러보는 일이 자연스러울 만큼 길에 익숙하거나 체력이 좋을지 모르겠다만 그렇지 못한 나는 산을 오를 때 그런 여유는 부릴 수가 없었다. 바위나 풀,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 등에 발이 채이지 않으려면 땅을 볼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 일 자체는 그저 묵묵히 걷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땅을 보며 걷다보면 앞서 가는 사람의 발뒤꿈치가 눈에 들어오고, 또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의 동선을 그대로 따라가기 십상이었다. 남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언뜻 생각하기에 쉬운 길을 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앞에 가는 사람이 제대로 된 곳을 밟는지는 모를 일이고, 어쩌면 당신의 앞 사람 역시 홀린 듯이 앞선 사람의 동선을 그대로 밟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렇게 여러 사람이 밟아서 패이고 드러난 부분은 미끄럽다. 겨울철 여러 번 밟혀 다져진 얼음이 특히 그렇다. 오히려 누군가 밟지 않은 곳을 디디는 것이 훨씬 나을 때가 있다. 아직 뽀득뽀득 쌓여있는 눈을 밟는 것이, 아직 맨 땅이 드러나지 않은 길가를 밟는 것이. 

 

썸띵 3. 슬슬 톱질하기
 
 그렇게 느슬렁거리다 경기상상캠퍼스 목공실에 들러 마지막으로 발견한 썸띵은 톱질하기다. 톱질은 물론 육체적 노동이긴 하지만 질 좋은 톱날을 장착했다면 그저 팔이 오가는 힘을 제외하고는 별도의 노력 없이 톱질을 할 수 있다.(김월식 작가는 천사점토와 마찬가지로 도구의 혁명이라며 265날을 보여주었다.) 걷다보면 그 관성으로 걷는 것처럼 힘을 들이지 않고 하는 톱질 역시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왼발을 내딛으면 자연스레 오른발이 나가는 것처럼, 팔을 앞으로 뻗으면 뒤로 당겨지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김월식 작가는 참여자들이 간혹 불필요한 힘을 주어 톱질을 할 때에는 조급해하거나(빨리 도착하기 위해 뛰거나) 겁내지 않고(우리는 걸을 때 넘어질까 지레 겁먹지 않는다) 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었다.
 
 우리는 톱질을 하면서 어색함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것이 톱질에 서툰 사람들의 어색한 몸동작에서 기인했는지, 시간이 지나도 좀체 자연스러워지지 않는 워크숍의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안이 그렇듯이 둘 다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어색함과 불편함이 동의어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어수선한 대화를 요약하자니 퍽 재미가 없지만, 그 순간의 묘미를 살릴 말재간이 없으니 요점만 정리해본다. “어색함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감각적인 탐색의 경로를 찾게 만든다. 감각적 순발력으로 판단을 내리니 기존에 가지 않았던 경로를 새로이 만든다. 그러니 어색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김월식 작가의 경험에 따르면, 종종 커뮤니티아트라는 미술 씬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어색한 사람과 상황을 극복하도록 만들고, 그 과정에서 예술가의 상상력을 제한시키기도 한다. 어색함을 허용할 정도의 성숙한 커뮤니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위 ‘착한’ 예술이 나오는데 그 착하다는 말 속에는 누구도 긴장시키지 않고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그런데 그 ‘착함’은 문화예술교육을 자꾸만 키트(kit)화하여 정해진 시간 내에 누구나 동일한 결과물을 생산해내도록 만드는 제도적인 욕심과 어딘가 닮아 있지 않은가? 아주 뚜렷하고 진하게 그려져서 그 외의 흐릿한 가능성을 지워버리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울퉁불퉁함을 감내하지 못하고 편평하게 두드리려는 견고한 제도 말이다.
 
 물론 본 워크숍에서, 우연성과 불확정성이 얼기설기 엮인 문화예술교육이 모든 문화예술교육의 지향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능교육이, 때로는 잘 만들어진 키트(kit)식 문화예술교육이 효과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다. 다만 이유도 모른 채 반복되는 일을 삼가고, 잠시 멈춰 서서, 다른 방식의 질문을 허용하는 것, 그 연습을 하는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밝힌 몇 가지의 썸띵은 그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였다.    
 
 
토끼굴 속으로
 
 그래서 이 조몰락거리기와 걷기, 그리고 톱질하기를 통해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 썸띵에 나서기 전에 했던 일은 두 명의 참여자들이 각각 자신의 작업을 나타내는 키워드와 반대로 자신에게 필요한 키워드를 뽑는 일이었다. 그들은 각각 어색함과 위험, 싸움과 예술가의 태도(예술가다움)를 꼽았다. 그리고 김월식 작가가 제안한 일은 나머지 워크숍 시간동안 이 네 가지의 키워드를 비비는 것이었고 비비는 방식은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노골적이든, 상징적이든 혹은 무시하든. 비빔밥에 계란 후라이를 넣든 빼든, 반찬으로 나온 멸치를 추가하거나 오이를 골라내든 상관없이 비비기만 하면 비빔밥이 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어색함이 노골적인 방식으로 비벼졌나보다. 걷기가 끝나가고 톱질하기에 도달할 무렵 참여자 중 한 명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내 앞에 손을 쑥- 내밀었는데 그 위에는 천사점토 한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응? 하며 어색하게 마주보는 나에게 어떤 설명도 없이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당황스러웠던 나는 오래 생각할 겨를 없이 주워서 들고 있던 열매를 점토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만족한 듯이 웃으며 돌아섰지만 나는 그의 요청에 내가 올바르게 응답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잠시 후에 보니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몸짓을 했고(이것을 요청이라고 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사실 그는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 몸짓을 나름의 방식으로 읽어낸 사람들은 그의 손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거나(-) 혹은 애써 무시(0)했다.
 
 그는 썸띵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일을 반복했는데, 그건 옆에서 지켜보자면 꽤나 재미있는 일이였다. 이목을 끄는 일이 아니라서 더욱 그랬다. 그 몸짓의 요청을 받아 본 사람들만이 어느 한 켠에서 그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알아챌 수 있었다. 어색하게 허둥지둥하는 사람들을 눈치 챘다는 것만으로도 경험자들은 모종의 가담을 한 기분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색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했다. 어떤 이는 더 적극적으로 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 보인 모든 반응은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만남 당시의 공기나 온도, 주변의 소음, 두 사람의 관계, 때마침 들고 있던 것들에 따라 달라질 터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점토의 형상은 예상치 못한 것으로 변해갔다. 어색함은, 말하자면, 계산된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이었다. 제도의 틀 안에서 배운 것을 곧바로 적용할 수 없는 해석 불가능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순발력이 요구되었고, 이것은 보다 야생적인 일이었다. 낯선 상대방의 언어를 오해와 이해의 중간에서 나의 언어로 번역해내 응답하는 일. 고작 한 덩이의 천사점토를 손에 쥐고 모두가 토끼굴(<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토끼굴. 강둑에서 지루해하고 있던 앨리스는 토끼를 쫓아 울타리 밑의 토끼굴로 뛰어들었고 이상한 나라를 모험하게 된다.)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토끼굴을 통과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다시 토끼굴을 나서는 사람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상상력의 징후>라는 3일 동안의 매개자 역량 강화 워크숍에 대한 이야기이다. 3일간의 경험의 풍경은 사실 일반적인 교육과는 매우 달랐다. 눈을 감고 더듬거리거나 맨발로 숲길을 걷거나 목적 없이 어슬렁거렸다. 3일 간의 풍경 전체가 토끼굴 안에 있는 듯했다.
 
 그렇게 3일을 보낸 후 우리가 돌아갈 곳은 토끼굴 바깥이다. 때문에 여기서 경험한 일들이 그저 꿈같이 수상한 일들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이것을 소화시키고 내보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오늘의 참여자들이 돌아가서 만날 또 다른 교육 참여자들에게 전달해야할 숙제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이 신기루 같은 이벤트가 아니게 하기 위해서 우린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함께 경험한 토끼굴 속의 일들을 어떻게 굴 바깥으로 새어나오게 할 수 있을까.” 당연하고도 놀랍게도 이 워크숍이 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워크숍의 목적이 그에 대한 힌트는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는 참여자 본인의 예술 활동과 교육 활동의 접점을 찾는 자리였다. 동기화라고 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의 경우를 들자면 고정적인 수입이 점차 교육 활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고, 작업과의 연결 고리는 미약해져 갔다. 때문에 교육 활동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고대하며 기다리는,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가끔씩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즐거울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그냥 분리해서 생각하는 쪽이 속 편했다. 
 
 한편 우리가 접하는 교육 참여자들은 어떨지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참여자들, 특히 연령대가 낮으면 낮을수록 본인의 욕구와 문화예술교육이 동기화되기는 어렵다. 그 친구들은 토요일 아침에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에 오는 것보다 늦잠을 자거나 오락을 하는 것을 더 원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구십 구 퍼센트 쯤 그럴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과 하는 일이 분리되어 있는 참여자들, 아직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참여자들에게 어색함을 감내하라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기존의 것들과 다른 질문을 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런 말들은 단순히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정돈된 테이블을 걷어차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친숙한 것들, 옳다고 믿었던 것들, 그래야한다고 생각한 것들과 이별하는 일을 무턱대고 아무 준비 없이 나타난 사람들에게 요청할 수는 없다.
 
 이 워크숍은 문화예술교육 매개자 역시 같지 않은지 묻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단단히 걷어찰 준비를 하고 있나? 내가 던지는 질문이 정말로 내가 하고 싶어서 묻는 질문인가? 단순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 매개자가 되기 위해서, “나는 정말 이 어색함과 불편함을 감내할 정도로 진짜 나에게 궁금하고 절실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워크숍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내 흥미로운 질문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가 또 사라져갔다. 굳이 답을 내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참 쉽지 않다는 생각도 한 것 같다. 그럼에도 3일간의 <상상력의 징후>에서 목격했던 것들은 편평하고 고르던 땅을 군데군데 움푹 패이도록 하는 각자의 힘이었다. 적어도 이곳에 온 사람들은 3일이라는 긴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질문의 필요를 느낀 사람들이었고, 적어도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토끼굴 하나 정도는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정답 없는 선택, 자율적인 삶의 기준, 자기 동기화 된 ‘진짜’ 질문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매개자들에게도 정답 없는 선택, 자율적인 삶의 기준, 자기 동기화 된 ‘진짜’ 질문을 허용하는 토끼굴이 자꾸만 파여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