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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기 _신기술소
  • 2017.11.22
22호 가봄 | 현장스케치
지금부터 무엇도 상상하지 마세요
 
김은기 / 신기술소


 

‘관찰은 생각의 한 형태이고, 생각은 관찰의 한 형태이다’
『생각의 탄생』, 미셸 루트번스타인+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에코의 서재, 2007
 
 
 이 글은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3일간의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 관찰 기록입니다. ‘관찰은 생각의 한 형태’ 라는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개인적인 생각의 한 형태일수도 있겠네요. 눈치 채셨겠지만 시작부터 권위 있는 책의 한 구절을 제시하는 건 객관적이어야 할 기록이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핑계대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동안에는 무엇도 상상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상상력, 이 막연하고 두리뭉실한 단어를 탐구하고자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나요. 잠시나마 상상 따윈 집어치웁시다. 상상을 안하는 것이 상상을 하는 것보다야 훨씬 쉽지 않겠어요?

 

 “세상이 온통 지뢰밭이구나!” 어느 참여자가 워크숍 마지막 날 남긴 소감 중 일부입니다. 하루 전, 5인의 모더레이터 중 한 명이었던 임상빈 작가는 경기상상캠퍼스의 흙길을 맨발로 걷는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임상빈 작가와의 워크숍을 선택한 사람들은 반질반질 코팅이 되어 있는 2층 다사리 문화학교에서부터 양말과 신발을 벗어 들어야 했습니다. 실내 바닥은 생각보다는 매끄럽고 친절했습니다. 찰-싹찰-싹, 발바닥들이 만들어낸 리듬은 건물입구를 지나 아스팔트 바닥을 만나자 곧 사그라집니다. 낯선 감각에 약속이나 한 듯 모두의 발걸음이 더뎌지자 임상빈 작가는 말했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그보다 하루 전, 첫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작자로 그리고 현장에서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하는 매개자로 활동하고 있는 열다섯 명 남짓의 참여자와 5인의 모더레이터가 이 기록의 배경입니다. 작업 활동과 교육 활동의 간극을 좁히고, 창작의 발단이 되는 상상력을 문화예술교육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보는 것이 워크숍의 목표라고 모더레이터 김월식 작가는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창작 직전의 작가는 어떤 징후를 가지는가....” 술을 마시다가, 잠을 자다가, 산책 하다가… 어떤 행위의 한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어떤 ‘무지개가 떠오른’ 경험은 아마도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무지개가 뜨는 시간처럼’ 은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옥인컬렉티브(김화용+이정민)의 최근 퍼포먼스 제목입니다. 무지개는 분명 존재하지만 환영과도 같고 견고하지 않은 대신 실제보다 더 실제와 같은 순간의 공감을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무지개가 뜨는 시간은 어쩌면 작가의 작업언어가 매개자의 교육언어로 번역되는 지점, 상상력의 징후가 관측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모더레이터 옥정호 작가의 표현을 빌면, ‘세상을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결국 세상을 이야기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 도달하고자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씁니다. 옥정호 작가가 워크숍에서 참여자들과 함께 한 요가도 그런 방법 중의 하나죠. 요가는 정신을 수양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몸을 단련하는 수련방법입니다. 어려운 동작을 유지하며 오직 호흡에만 집중하면 의식하지 않았던 다른 차원의 정신이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머리가 아니라 의외로 몸을 움직이는 경험에서 생각이 시작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신발을 신고 흙길을 걸을 때, 보폭의 넓이와 속도는 어떤 감각보다는 우리가 머릿속에 미리 넣어둔 정보를 통해 조정됩니다. 이때의 걷기는 몸을 움직이는 경험보다는 머리를 굴리는 경험에 가까울 것입니다.

 

 

 맨발로 흙길을 걸을 때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발바닥의 촉각을 곤두세우며 끊임없이 시각적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바닥에 유리 파편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어요.” “저기 보이는 게 두더지 굴이예요.” “여기는 돌조각이 많네요. 조심하세요.” 고개를 숙인 참여자들은 저마다 맨 발바닥이 읽어낸 길의 행간을 공유하며 신중하게 한 장 한 장 걸음을 넘깁니다. 갈래 길에서 어느 방향을 선택할지는 발바닥의 감각에 달려 있습니다. 맨발로 걸어보니 내리막길은 오르막길 보다 험난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잔디에는 가시 같은 날카로운 풀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임상빈 작가는 교육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위험한 상황에 두는 게 즐겁다고 말합니다. 안된다고 찌푸리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즐거움을 느끼는 ‘교육적 마조히즘(Masochism)’, 하지만 이것의 다른 말은 ‘패배하는 것을 겪어보는 것, 즉 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로소 스스로 깨우쳤을 때,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냐고 화를 내면 성공입니다. 실패-짜증-분노-포기의 단계를 유도하지만 성공하는 아이는 꼭 있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잘하는 것에는 놀라지 않습니다. 옆 친구의 성공을 목격했을 때 집중하고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되는 것이죠.
 
 예술의 영역에서는 실패의 쓴맛을 본다 해도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위험과 어려움을 버리고 조심성을 취하게 되면 감각은 죽고 도구만 발전하게 됩니다. 정교한 도구에 기대 신체감각을 사용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죠. “충실하고 복잡한 사물들의 이런 세계 앞에서, 아이는 결코 창조가가 아닌 소유자나 사용자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는 세계를 창안하지 않고 단지 세계를 이용한다. 아이에게 모험도, 놀라움도, 기쁨도 없는 제스처들이 마련된다.” “게다가 이런 장난감은 매우 빨리 죽고 일단 죽으면 아이에게는 어떠한 사후의 삶도 없다” (현대의 신화, 롤랑바르트, 동문선, 1997)
 
 수업을 위해 잘 마련된 도구나 키트(Kit)는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가 『현대의 신화』에서 지적한대로 현실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 완성된 플라스틱 장난감과 같이 참여자를 순응시기키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키트(Kit)에 대한 언급은 자연스럽게 나쁜 예술교육에 대한 불평으로 넘어갑니다. 문화예술교육에서 도구에 대한 우려는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습니다. 역효과를 알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수업의 주요 피드백이 아이가 아닌 부모와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이 책이 아이와 어른이라는 연령대가 전혀 다른 두 독자를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지닌 것과 같습니다. 
 
 키트(Kit) 이야기를 하면 또한 색칠공부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완성해보는 경험에 가치를 둔다면 색칠공부와 같은 기능교육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옵니다. 언제 붓을 놓을지를 아는 화가가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데요, “예술가는 완성의 정도를 자기가 정한다.” 라는 김월식 작가의 대답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색칠공부를 선택한 자기기준, 흐리게 칠할 것인지 빈칸으로 둘 것인지를 선택하는 자기 성찰과 수행의 과정이 반드시 더불어 일어나야 하는 것이죠. 일상의 반복된 행위, 예를 들면 매일하는 빨래도 삶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성찰과 만나 예술교육이 될 수 있다고 김월식 작가는 덧붙입니다. 
 
 “어느 순간 나만의 식판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칸칸이 들어가는 메뉴도 다 정해져 있고 설거지도 쉬운.” 그간 해온 작업과 고민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참여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수업 기록을 남겨야 하니 카메라도 신경 쓰고 아이들이 머뭇거리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샛길로 빠져도 보고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사유에 잠기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은 이론처럼 모두가 알고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 스스로 더듬거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전에 선생님 스스로에게도 더듬거리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의 뻔하지 않은 더듬거림이 바로 상상력의 징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맨발로 흙길을 더듬거리던 임상빈 작가의 워크숍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뒤늦게 말씀드리는데, 이 워크숍은 <야생을 기웃거리는 산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어딘가를 또는 누군가를 기웃거려 본 경험은 다들 한 번 이상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기울이다’ 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사전적 의미는 ‘몸이나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다’ 입니다. 슬금슬금 넘겨보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요. 마음이나 몸, 둘 다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이는 것이네요. 그럼 ‘야생’이라는 단어는 어떤 감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다듬어지지 않은, 예측하기 어려운’ 느낌이 듭니다.

 


 

 임상빈 작가가 맨발로 등산을 하게 된 이유는 문화예술교육에서의 키트(Kit) 이야기와 조금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취미삼아 등산을 하는데 전문적인 장비도 없고 마련하기에도 부담이 되어 맨발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값비싼 등산화, 등산복 풀세트를 장착한 사람들은 산길에서 임상빈 작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정체가 궁금해진 몇몇은 같이 걸으며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등산화를 신은 사람과 맨발로 걷는 사람의 보폭과 속도는 다를 수밖에요. 이건 저도 참여자들과 맨발로 흙길을 걸어보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전엔 사실 맨발로 산길을 걷는 사람의 속도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죠.
 
 신발을 신은 상대방의 속도가 자신에겐 너무 빠르게 느껴지고 과연 내 발밑의 땅은 안전한지를 끊임없이 살피면서 자연스럽게 그 전엔 할 수 없었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상력을 위한 새로운 자극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있죠. 맨발 등산은 다른 경험을 하고 자극을 얻는 방법론적 접근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자극과 불편함을 주는 방법을 그는 수업에서도 사용합니다. 개인적인 거리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물론 동의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육에서의 배려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따지다 목적성이 훼손된다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군요.
 
 느끼고 생각하는 상태로 이끌기 위해서는 시키지 않고 본인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게 중요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어려움을 겪으며 기웃거리고 더듬거리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죠. 흙길에 진입한지 십분 정도 지났을까요, 바닥에 숨어있는 유리파편들 때문에 맨발을 포기한 참가자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 다른 한 명의 참가자도 신발을 신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놀이를 시작할 시점입니다. 야생은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무한한 놀이를 창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줍니다. 흙길을 더듬거리던 참가자들이 하게 될 새로운 놀이는 ‘살갗에서 살갗으로 개미 옮기기’ 입니다. 
 

 개미가 기어가는 느낌, 생각만 해도 간질간질 피부의 솜털이 일어나는 기분입니다. 참여자들은 먼저 허리를 숙여 땅바닥에서 개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발밑을 자세히 보니 개미가 많긴 많은데 죽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잡아 올리려 하니 이것도 역시 생각과 다르게 쉽지 않습니다. 잡힐 듯 말 듯 분명 눈앞에 보이던 개미는 어디론가 쉽게 사라져버립니다.  손끝의 속도가 개미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이 이 놀이를 터득하는 첫 번째 핵심인 것 같습니다. 느릿느릿 숲길을 걷던 참여자들은 이제 허리를 낮추고 개미 생포 놀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엇!” “앗!” “아!” 아슬아슬하게 놓친 것이 분명한 감탄사가 터져 나옵니다.

 

 

 한 참여자가 개미 생포에 성공했습니다. 다음 단계는 서로의 살갗에서 살갗으로 개미를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땅바닥에서 알 수 없는 높이까지 솟아오른 개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손바닥에서 팔목으로 팔뚝으로 역시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어디론가 향합니다. 다른 참여자가 개미의 이동방향을 예측하여 자기 팔을 대 봅니다. 그러나 올라타는 것 같다가 방향을 바꿔 바람처럼 뚝 떨어집니다. “하아!” 모두가 일제히 안타까운 탄성을 뱉어냅니다.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 땅바닥에 떨어진 개미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개미의 속도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을까요, 참여자들이 저마다 개미 생포에 성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살갗으로 옮기기는 여전히 쉽지 않네요. 여러 크기의 개미로 시도해본 결과, 작은 개미가 조금 느린 것이 어쩐지 어리숙해 보입니다. 이제는 작정하고 작은 개미만 잡아봅니다. 손에서 팔과 팔로, 한 명에서 다른 한 명으로 개미 옮기기도 성공입니다. 하지만 두 명 이상 이어지는가 하면 개미는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떨어지는 대신 다른 팔에 올라탈 것이라 예상했지만 개미는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거죠. 떨어지는 게 두려운 것은 인간입니다. 아니 두려움이 인간의 감각이겠죠.
 
 ‘살갗에서 살갗으로 개미 옮기기’ 놀이는 이쯤하고 숲속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임상빈 작가의 커피를 맛볼 시간입니다. 적정기술을 이용해 직접 제작한 버너와 즉석에서 원두를 갈아 모카포트로 추출하는 커피입니다. 펩시콜라 캔을 재활용해 만든 버너와 함께 가지고 다니는 이동식 커피 추출 세트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도 모두의 관심을 끕니다. 성능은 물론 캠핑 버너가 훨씬 좋은 듯합니다. 화력이 약하기 때문에 물이 끓고 커피가 추출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거든요. 효율성의 관점으로 보면 비효율, 크게 쓸모는 없어 보입니다. 커피 맛은 어땠을까요? 맨발로 숲길을 걷고 개미를 잡아봐야 아는 맛입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맨발의 고통과 개미 발걸음이 만든 감각의 변화와 떠오른 상상에 대해 토해 놓는 것’이 임상빈 작가의 생각이었습니다. 워크숍 계획안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역시 더듬거리고 기웃거리다보니 샛길로 빠지게 됩니다. 숨겨놓은 진짜 계획이었을까요, 참여자들은 첫날보다 더 자유롭게 각자의 문화예술교육 철학과 고민을 내어놓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서 언어적 소통의 어려움, 교육자적 입장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짜인 틀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수업을 마쳐야 하는 답답함.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결국에는 누군가 정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끊임없이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해 나가야만 하는 근원적인 고민으로 이야기가 모아집니다.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예술가의 입장을 교육가에 무게를 둘 것인가 예술가에 무게를 둘 것인가 대한 논의를 자주 듣게 됩니다. 수업을 하는 예술가 스스로도 해보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주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하지요. 문화예술교육은 기본적으로 차이, 타인과 다른 나를 구분하는 것에 바탕을 둔다고 김월식 작가는 이야기 합니다. 예술가의 작업이 근본적으로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예술가의 문화예술교육이 왜 중요한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80%는 뒷담화, 내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뒷담화‘ 지뢰밭에 이어 마지막 날 다른 참여자가 내놓은 소감입니다. 좋은 예술교육 프로그램, 좋은 교육자에 대해 가졌던 강박과 조급에 대한 뒷담화였죠. 성취에 대한 획일화된 관점은 ‘좋은’이라는 정확하지 않은 수식어를 만듭니다. ‘좋은’이라는 말은 다양성과 차이를 지워버립니다. 열 명의 참여자가 있다면 그 열 명의 참여자가 느끼는 ‘좋은’ 부분을 각자 그들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열어주는 것이 문화예술교육의 역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 과정이 누구에게는 어색할 수도 불편할 수도, 말 그대로 ‘더운밥 먹고 하는 이상한 짓’ 일수도 있겠죠. 

 

 

 

 

 저는 사실 성실한 관찰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3일의 워크숍 기간 동안 제가 수집한 단어는 ‘번역, 어색함, 위법, 근육, 걷 기, 흙, 두더지, 오해, 야생, 위험, 도둑질, 아무말, 개미, 알, 체스, 맨발, 불편, 핑계, 궁시렁 궁시렁, 토끼굴’ 정도입니다. <상상력의 징후>는 ‘아무말대잔치’ 였습니다. 그 ‘아무말’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상상력이 아니라 확신의 징후가 드러나겠죠. 그래서 우리는 사회와 관습과 나, 시스템과 개인의 경사가 만나는 지점의-예술가에게는 ‘세상과의 불화’, 문화예술교육 매개자에게는 시스템과의 투쟁–결과의 문턱에서 토끼굴을 통해 핑계를 만듭니다. 
 
 이제 관찰기록을 끝내려 합니다. 글을 읽는 동안 당부 드린 대로 상상을 멈추셨나요? 그렇다면 상상력의 징후는 이제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