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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가르치지 않고 배우게 할 것인가
  • 김찬호 _사회학자
  • 2017.07.27
21호 곁봄 | 칼럼
어떻게 가르치지 않고 배우게 할 것인가
 
김찬호 / 사회학자
 
 
  1999년 뉴델리 NIIT 공대 컴퓨터 과학자들이 <벽에 뚫은 구멍(Hole in the Wall)>이라는 이색적인 실험을 했다. 어느 빈민가를 둘러싸고 있는 벽에 구멍을 뚫고 터치스크린 컴퓨터를 설치해놓았다. 그곳에 사는 아이들은 컴퓨터는커녕 신문을 본 적도 없고 학교 문턱에 가본 적도  없는 문맹 상태였다. 더구나 컴퓨터 조작에 필요한 영어를 접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3개월 뒤에 가보니 아이들은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고 한다. 장난감처럼 갖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사용 방법을 깨우친 것이다. 

 

  무척 놀라운 이야기로 들리지만, 아이들의 학습은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 스마트폰 같은 기기를 던져주면 혼자서 만지작거리면서 시스템을 금방 깨우친다. 도구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말을 배우는가. 체계적인 문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그냥 깨우쳐간다. 어떻게 가능할까.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정보나 지식을 두뇌 안에 입력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참여하고 스며들면서 존재를 형성해간다. 신체가 성장하듯이 언어가 삶의 일부로 조직화된다. 사리를 터득하고 문화를 내면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앎이란 타자와 상호작용하면서 자아를 창조해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물론 모든 학습이 그렇게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어느 나이에 이르면 일정한 기획 속에서 체계적으로 배워야 하는 과제가 생긴다. 수렵채취 사회에서 누구나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생존 기술들을 의식적으로 연마해야 했다. 농경 사회에서도 작물 재배와 동물 사육의 방법을 배우고, 일부 아이들은 서당에서 매를 맞아가면서 글공부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부는 일상을 영위하는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이뤄졌고, 별도로 추진된 의식적인 학습도 생활세계와의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교사의 역할을 했다.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문화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일은 기성세대 모두의 몫이었다. 

 

  그러다가 산업사회에 들어서고 학교가 제도화되면서 학습은 기계적인 주입이 되었다. 생산체제가 요구하는 노동력을 대거 양성하기 위해 지적 능력을 효율적으로 향상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획일적인 교실 수업과 표준화된 평가의 방식이 보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연령별로 구성된 학급을 통해 국가가 제공하는 교과 내용이 가르쳐진다. 그리고 경쟁이 필수적인 조건이 되고, 보상과 처벌이 주요한 학습 동기가 된다. 시험 점수를 잘 따기 위해 전력투구하게 되는 과정에서 배움의 즐거움은 사라져간다. 개개인의 발달 속도가 고려되지 않고 지능 및 역량의 다양성이 무시되기에, 많은 학생들에게 공부는 버거운 과업으로 여겨진다. 

 

  한국이 압축 성장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 하나로 교육열이 반드시 언급되는데, 대량생산 방식의 인재 육성과 치열한 경쟁의식이 그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결과 전 국민의 평균적인 지적 능력을 일정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 역효과가 점점 부각되기 시작했다. 가장 자주 지적되어온 것이 인성(人性)의 황폐화인데, 반대급부로 국가 경쟁력이 높아진 측면이 있어서 그다지 절박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경쟁력 제고에도 그런 교육체제가 걸림돌이 되는 것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 활발해진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담론에서 더욱 강력하게 문제가 제기된다. 

 

  엘리트 교육에 온 힘을 기울이는 미국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Pathways’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하버드대학 의과대학의 새로운 커리큘럼을 보자. 해부학이나 생리학 등 방대한 기초지식과 각 전공별 이론을 암기시키는 데 치중하는 기존의 방식을 지양하고, 능동적 학습과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임상 경험의 시기를 앞당기고, 학생들 저마다의 경로를 제공하는 맞춤형 학습을 설계한다. 실습을 앞당긴 이유는 환자와 질병을 장기간 볼 수 있고 동료들과의 관계 경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위력이 빠르게 신장되는 의학 분야에서 의사의 역할이 변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국에서도 서울의대의 경우, 자기주도 학습, 연구역량 및 임상실습 강화, 선택교육과정 확대, 평가와 피드백 강화 등을 골자로 한 커리큘럼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임상 경험을 빨리 접할 수 있도록 학생 인턴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연구역량을 강화해 의과학자를 양성하는 의학연구 멘토링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미국의 다른 어느 의과대학에서는 더욱 획기적인 시도를 한다. 학생들을 미술관에 보내서 그림과 조각을 감상하도록 하는데, 과중한 학업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정서를 순화하기 위한 가외적인 활동이 아니다. 관찰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예술 작품을 요목조목 들여다보면서 의미를 찾아내는 안목이 높으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가 놓여 있는 여건 등을 섬세하게 고려하여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능력도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눈과 환자를 보는 눈이 상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가르쳐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스스로 깨우쳐 가야 하는 감수성이다. 

 

  ‘이론’을 뜻하는 ‘theory’의 어원은 ‘theoria’인데, 그 의미는 관찰, 여행, 해석 등이라고 한다. 이론이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추상적인 결과물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출발은 사물을 정확히 보는 데 있음을 암시한다.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대상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지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각만이 아니라 오감(五感)을 통해 외부세계에 폭넓게 접속하고 그 본질을 파악하는 작업인 것이다. 지금의 제도교육은 구체적인 경험과 감각적인 인터페이스를 차단하고 딱딱한 기호들을 주입하는 방식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무섭게 진화하는 지금,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지성을 견고하게 세우고 넓히지 않으면 기계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것이다. 

 

  지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젤랄루딘 루미가 오래 전에 통찰한 것에서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두 가지 종류의 지성이 있다. 그 하나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 책이나 교사로부터 개념을 배우고 암기를 하면서 배우는 지성, 전통으로부터 또한 새로운 학문으로부터 배우는 지성이다. 그러한 지성의 힘으로 너는 세상에서 일어선다. 등급에서 남을 앞서기도 하고 남에게 뒤처지기도 한다. 그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에 따라. 그 지식의 장 안팎으로 드나들며, 네 안의 지식의 판에 더 많은 지식을 새긴다. 또 다른 종류의 지성이 있다. 네 안에 이미 완성되어 존재하는 지성, 샘에서 흘러넘치는 샘물 같은 지성. 그 신선함이 가슴 한가운데를 적신다. 이 지성은 시들지도 썩지도 않는다. 그것은 늘 흐른다. 그것은 주입식 학습의 경로를 통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이 두 번째 지성은 샘의 근원이다. 네 안에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두 번째 지성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심신의 기운이 앎으로 연결되는 통로다. 나와 세계를 이어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유되는 소우주다. 그것을 건설하는 일은 배움의 기쁨을 수반한다. 그러한 지적 활동은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자체가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육의 성패는 그것을 얼마만큼 이끌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어떻게? 호기심이 유발되고 그것을 따라가면서 자아와 대상을 탐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때로 기존의 질서를 흔들어서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고, 불확실한 목표에 도전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답을 주는 대신 피드백을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어느 책의 제목대로, ‘가르치지 말고 반응하라.’ 

 

  하지만 가르침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 본디의 의미를 구현해야 한다. ‘가르치다’는 말은 ‘갈다’와 ‘치다’가 합쳐진 것이다. 밭을 갈 듯이, 양을 치듯이, 생명을 돌보는 일이 곧 가르침이다. 정성을 기울이되 재촉하지 않고 스스로 무르익도록 기다리며 보살피는 양생(養生)이다. 교육은 배움의 능력을 북돋는 복합적인 활동이 되어야 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의 벽을 낮추고 공동의 지성을 빚어내고 나누는 사회적 행위로 전환하는 것이다. 지식의 일방적인 전달(transmission)을 넘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함께 변화(transformation)하는 단계로 나아갈 때 앎은 삶으로 통합될 수 있다. 

 

  지식이 일부에게 독점되어 있었고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에는 가르침이 절실했다. 그러나 정보와 지식이 2년마다 두 배로 폭증하고 그 접근 가능성이 엄청나게 넓어지는 지금, 그 무한한 자료들 가운데 필요한 것을 선별하고 조합하여 자기 나름의 지성을 쌓아가는 역량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에리카 다완은 그것을 ‘연결지능’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는데, 그 의미는 이러하다. ‘세계의 다양하면서도 이질적인 사람들과 복잡한 정보관계망, 여러 분야의 지식과 경험, 자원 등을 결합하고 연결해 통합을 이루어 나감으로써, 다가오는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치와 의미를 창출하고, 난관 타개의 돌파구를 발견하는 재능.’ 

 

  그런 재능은 맥락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안목과 과제의 본질을 파악해내는 직관을 내포한다. 그것은 머릿속에 지식을 잔뜩 집어넣는 데서 생겨나지 않는다. 상황에 부딪쳐서 씨름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면서 터득해가야 한다. 리얼리티에 대한 통찰과 문제의식이 명료할 때, 방대한 정보와 지식과 경험과 자원들이 취사선택되고 편집되어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얄팍한 지능이 아니라 깊은 지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그러한 지성은 다양한 장(場)에서 존재를 연습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줘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지 않아도 받는 사람이 있다. 가르쳐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배움의 능력이 있다.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씨앗에 물을 주지 않았을 뿐이다. 시인 예이츠는 말했다. ‘교육은 양동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밝히는 것이다.’ 그 불이 켜지면 경이(驚異)로운 일이 일어난다. 내면의 탁월한 잠재력을 두드리는 놀이가 시작된다. 배움은 생명의 리듬과 역동을 따라가면서 공동의 세계를 디자인하는 유쾌한 모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