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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직 _문화평론가
  • 2017.07.27
21호 곁봄 | 칼럼
우리는 미적 공화국의 자유인이다
 
고영직 / 문학평론가

 어느 기획자는 “기획은 관계의 호출이다”(정민룡)라는 ‘기획자의 철학’을 강조한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잇는 기획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개관한 광주 북구문화의집 정민룡 관장은 이러한 기획자의 철학을 강조하는 현장 중심의 문화기획자일 뿐만 아니라, 그런 기획의 철학을 현장에서 실제 구현하고자 하는 우리 시대 문화예술교육자이다. 2015년 9월, 160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우락부락캠프 형식으로 광주비엔날레전시관에서 2박 3일간 주최한 <어린이놀이도시 in 광주>는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어린이 친화도시’를 구상하려는 정 관장의 의도를 잘 엿볼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2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프로젝트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다. 

 

<어린이놀이도시 in 광주> 프로젝트와 ‘경험’

 

 

 

 정 관장은 당시 프로젝트에서 교육 주체인 어린이들이 5백평 남짓한 전시장에서 재미와 장난의 형식으로 자신들이 살고자 하는 어린이 친화형의 도시를 직접 종이집을 지으며 구현하고자 했다. 기획자는 물론 참여 예술가들의 개입은 최소화했다. 그런데도 참여한 아이들은 2박 3일간 자신들만의 ‘도시’를 구현해냈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애 최대의 풍경을 연출한 도시의 모습에 탄성을 질렀다. 한마디로 말해 어린 미적 인간들이 무수히 탄생한 것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이들이 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배웠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학교에서는 잘 가르치지 않는 협력의 예술을 배웠으리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아니, 협력 자체가 예술이라는 점을 몸으로 경험했으리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이들이 겪은 그날의 사건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집 만드는 매뉴얼을 터득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가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친구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오가타 다카히로)고 한 말의 의미를 경험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과 사회(도시)에 대한 더 심화된 인식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이 의미는 퍽 중요하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이들이 원하는 도시란 결국 ‘자유로운 도시’였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도시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자율적이고, 자기 심판적이고, 독립적인 도시야말로 자유로운 도시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자유로운 도시를 꿈꾸는 아이들이 배운 것은 결국 ‘도시는 사람이다’라는 점을 배웠다고 확언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적 의미를 그리스 정치절학자 코리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1922-1997)의 ‘아스티노모스 오르게(Astynomos Orge)’라는 개념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아스티노모스’의 뜻은 ‘제도 만들기’이고, 오르가슴의 어원인 ‘오르게’는 강한 충동 혹은 정열을 의미한다. 시민들이 도시 문제 같은 공적 문제에 대해 열정을 바탕으로 한 제도 만들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개념인 것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이들이 우리가 사는 도시 혹은 나라의 주인은 누구여야 하는가에 대해 배운 셈이랄까. 쉽게 말해 도시의 주인은 선출된 시장(市長)도 아니고, 선출되지 않은 시장(市場)은 더더욱 아니며, ‘시민(市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경험을 배운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가치 있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으면서 배움이 일어나는 ‘사건’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정민룡 관장이 왜 “기획은 관계의 호출이다”라는 명제를 문화기획자로서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말을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적용해보자면 ‘교육은 관계의 호출이다’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법하다. 
 
 
협치의 ‘평상’을 놓자
 
 그러나 지금·여기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배움이 일어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가. 나는 몹시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여럿 있다. 정책추진 과정에서 문체부-아르떼-광역재단으로 이어지는 톱다운(top-down) 형식의 문화행정이 서비스 전달체계로서만 작동할 뿐 수평(水平)적 협력체계가 부재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지역에서 필요한 문화수요가 아니라 정부 지원방향에 따라 정책사업이 전개됨으로써 지역의 문화자치권이 훼손되고, 지역 광역문화재단이 정부의 ‘위탁기관화’된 현상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학교예술강사 근로계약 문제를 광역문화재단에 전가함으로써 유례없는 ‘파행’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신뢰의 철회 현상을 빚은 문체부의 그릇된 문화행정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문화행정의 파행들은 ‘자율, 분권, 협치’라는 문화정책의 기조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에서 전달체계로서의 문화(예술)행정이 아니라 거버넌스형 문화(예술)행정체계로의 전환을 이룰 때 비로소 바로잡을 수 있다. 결국, 협치의 ‘평상’을 놓아야 한다. 이 문제는 문체부-아르떼가 지역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정책의 철학 문제와 결부된다. 예를 들어 정책사업 프로그램에 대해 컨설팅 운영관리 차원에서 추진되는 기존의 성과관리 방식으로는 그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다. 지역은 단순히 ‘관리’의 대상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도 앞에서 언급한 <어린이놀이도시 in 광주> 프로젝트의 경우처럼, 참여자들이 이야기 소비자가 아니라 이야기 생산자가 되는 문화예술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 광역문화재단(광역센터)의 역할과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 지역화와 협치에 대해 분명한 자기 관점을 갖고 내부 혁신을 해야 함은 물론이고, 지금보다 ‘더 많은’ 정책의 자율성을 갖고 지역에 필요한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주도할 수 있는 정책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같은 1년짜리 프로그램 중심의 정책사업에서는 경험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문화예술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프로그램 중심에서 벗어나 ‘마을예술학교’ 같은 새로운 정책사업의 트랙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체험에서 경험으로, 가르침에서 배움을 위한 코칭으로 정책사업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은 속에 든 것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자발적 사회성’을 형성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교육철학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으며, 단순한 기능주의자가 아니라 의미생산자가 되기 위한 다양한 실험들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의미생산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를 지속적으로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누군가가 “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열망이다”라고 한 문화적 맥락과 통한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가 꼭 성공한 이야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라틴어로 ‘잉여’를 뜻하는 릴리쿰(reliquum.co.kr) 구성원들이 쓴 『손의 모험』(2017)을 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멀쩡한 스마트폰을 분해하고 조립하는가 하면, 『월간 실패』 같은 잡지를 발행해 자신들이 실패한 경험 이야기를 타인들과 기꺼이 나누려고 한 자세였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이와 같은 다양한 실패의 경험들 또한 공유되며 배움이 일어나는 사건들이 더 많아져야 하고, 그런 사건들을 통해 배움이 되는 경험들 또한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런 과정들 속에서 자신의 진짜 생활을 복원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리듬이 형성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나와 우리는 일상의 강박적 리듬의 구속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미적 공화국의 ‘자유인’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