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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 교육과 ‘역량’ 이전의 교육
  • 김인규 _서천고등학교 수석교사
  • 2016.12.27
20호 곁봄 | 칼럼
학교 교육과 ‘역량’ 이전의 교육
 
김인규 / 서천고등학교 수석교사
  늘 자는 아이가 있다. 수업 시간에 어떤 일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주변에서 재미있다고 떠들며 소란을 피워도 흔들림 없이 잔다. 깨워보지만 잠에 취한 눈빛으로 ‘나는 자겠다’는 의지를 잠깐 드러내 보이곤 다시 엎드려버린다. 언제부턴가 그리 되었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선택한 듯하다. 나는 이제 그 선택이나마 존중해주고자 한다. 
 
  그러게 말이다. 이 아이들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학교는 아이들에게 과업을 던져주었다. 좋은지, 싫은지, 필요한지 아닌지 반문하거나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이미 손에 쥐어져 있었다. 코흘리개 적부터 말이다. 어느 날 문득 피로가 엄습해 온 것은 아닐까. 그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깊은 잠에 파묻혀버린 것은 아닐까. 충분히 자고 나면 다시 일어날 힘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에 가만히 지켜본다. 교사로서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다가도, 과연 그 책임이라는 건 또 무엇일까 하는 요상한 생각에 길을 잃고 만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이 곧 시행되는데 주요한 특징은 교육을 통하여 길러야 한다는 핵심역량이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 총 6가지 역량이다. 면면히 살펴보면 다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우리 교육은 이미 차고도 넘치는 역량을 기르기 위해 매진해왔다. 어쩌면 편중되고 빠트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 굳이 저렇게 명시적으로 제시한 것인지 모르지만 이미 우리는 지쳐 있지 않은가? 무슨, 무슨 역량을 기르기 전에 우리는 먼저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걸까?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능력이 요구되고, 그것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즐거움에 앞서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학교가 하는 일 중 가장 큰 것은 미래 경쟁력을 기르는 것일 것이다. 한시라도 지체하면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 학교 교육의 가장 큰 강박이다. 그래서 학교는 쉼 없이 몰아붙인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경쟁력이라는 단어와 결합하는 순간 쉼 없이 뛰어야 하는 상황에 몰려버린다. 만일 ‘나는 그만 뛸래요.’ 하고 멈춰버린 아이가 있다면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이 지점에서 판단이 안 선다. 그것이 너무도 정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인간답다’고 할 때, ‘인간’은 ‘기능성’을 넘어선 존재를 말한다. 그것은 어떤 목적이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그 스스로가 존엄한 상태가 됨을 말한다. 그러니까 존엄성이란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 즉 ‘자유적 존재성’을 뜻한다. 설령 누군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부자유스럽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성에는 자유가 훼손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일컬어 진정한 ‘인간’이라 부른다.
 
  사람으로 태어나 성장하면서 점점 그런 인간됨을 자각하게 되는 일은 그 무엇에도 우선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맹목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어떤 일에서 기능적인 유능함에 종속시키지 않고 스스로 ‘자유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인간다움’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능력의 차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존엄해지는 토대가 된다. 교육의 근간은 거기에 자리하고 있다. 
 
 어느 강의에서 들은 말인데 학교의 그리스어 σχολείο 는 ‘time without destination’ 즉 도착지가 없는 시간을 뜻한다고 한다.(2016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더빌리지 워크숍, 파스칼 길렝(Pascal Gielen)의 강의에서.) 그 탐구에는 전제 조건이 없으며 어떤 역능이나 목표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학교’, 즉 ‘목적지가 없는 시간’을 떠돌 수 있기에 인간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다 힘들면 쉬어야 하고, 어디로 가라 정해놓고 바리바리 이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셈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공자, 『논어』, 「학이(學而)」편.) 에서 말하듯이 배움은 역능성이 아니라 즐거움에 속한다. 어쩌면 사람이 하는 일 중에 열려 있는 유일한 영역일 것이다. 
 
  늘 엎드려 자기만 하는 아이는 무엇에 지친 것일까. 무엇이 그렇게 자신을 닫아두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런 그 아이를 존중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그렇게 굳어져 왔을 그에게 자유롭게 떠돌 수 있는 근원적인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성장’과 ‘역량을 기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성장은 자기 존재성을 근간으로 한다면, 역량을 기르는 것은 외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존재를 돌볼 겨를도 없이 외적 요구가 엄습해왔을 때 아이들이 그것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알맞은 도움이 없이 그냥 내던져졌을 때 그것은 더욱 힘들다. 나는 학교가 아이들의 성장을 도모하는 자리로 돌아왔으면 한다. 그것은 지금 아이들의 광범한 요구이다. 그 어느 때보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그 역능성의 과잉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의사소통 역량’을 기르기 전에 과연 의사소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거나 탐구해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과연 의사소통은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 먼저 서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늘 엎드려 자는 그 아이는 스스로 의사소통을 거절하고 있지만, 어쩌면 엎드려 자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사소통에 대해 진지하게 마주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면 다른 방식의 접근도 가능했을지도 모르고, 학교가 그런 아이를 병적인 상태로 진단하기 전에 의사소통을 자체를 재검토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소통에 대한 우리의 관습과 태도의 문제일 수 있다. 그것을 아이는 그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그 많은 상담이 아니라 더 많은 방식의 의사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역량을 기르는 문제하고는 다르다.
 
  문화예술교육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지적 성장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 교육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요구가 컸다. 그로 인해 개발될 수 있는 감성력은 아이들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말에는 역능성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2000년 초반 시각문화교육이라는 용어가 적극적으로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시각문화에 있어서 문해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과, 미디어 사회의 필수적인 역량이라는 것이었다. 문화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은 문화예술교육의 확장에 대해 ‘무슨 예술이냐’라는 사회적 백안시에 대한 알리바이와 설득력을 제공하는 듯이 다뤄졌다. 그 결과 예술교육 또한 역량교육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보내는 좀 더 많은 시간이 방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더욱 떠돌면서 정해지지 않은 답을 찾으며 자기의 힘을 사용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자신에게 스스로 존재의 힘을 부여할 수 있다. 능력 경쟁은 이미 소수의 승리자와 대다수의 패배자로 나누며 분노감과 자괴감을 키울 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아이들은 성장을 하고 있기는 하다. 교실에서 엎드려 있던 녀석도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종종 본다. 그 아이도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학교나 교사보다는 친구의 도움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 아니 어쩌면 기특하게도, 스스로 성장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