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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적 경지와 교육적 경지의 거리
  • 이기복 _청석에듀시어터 대표
  • 2016.12.27
20호 곁봄 | 칼럼
예술적 경지와 교육적 경지의 거리
 
이기복 / 청석에듀시어터 대표
  예술교육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험하게 되는 것이 예술적 경지와 교육적 경지의 간극에서 느끼게 되는 딜레마이다. 청소년 관련 연극제에서 심사를 하며 느끼는 것은 예술적으로 뛰어나게 포장된 청소년극보다는 투박하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하고 있는 작품에 더 많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연극을 가르치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분명하다. 그들을 뛰어난 공연예술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예술적 경지와 교육적 경지는 사실 거리가 없다. 마하트마 간디의 묘소 비문에는 '7대 사회악(Seven Social Sins)‘이 새겨져 있다. 
 
1. 철학이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
2. 노동이 없는 부(Wealth without work) 
3. 윤리가 없는 쾌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
4. 인격이 없는 교육(Knowledge without character)
5. 도덕이 없는 경제(Commerce without morality) 
6. 인간성이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
7. 희생이 없는 종교(Worship without sacrifice)
 
  예술은 인간의 삶을 깊게 이해하고 조화롭게 발달시킨다는 점에서 교육과 밀접하다. 인간을 사랑하고 섬세한 감정과 강렬한 열정으로 인격을 개선한다는 측면에서 교육자의 삶은 예술가의 그것과 동일하다. 간디가 주장한 ‘인격이 없는 교육(Knowledge without character)’은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나 흔한 사회적 병폐로 자리 잡고 있다. 예술교육은 인성교육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예술교육자는 긍지를 가지고 교육 현장에 헌신하게 된다. 그러나 교육에 있어서 예술적 경지는 방법론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이지 궁극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교직에서 퇴임하고 청소년 연극교육과 관련된 일을 구상하고 있던 필자에게 연극을 활용한 청소년 힐링캠프에 참가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로 부각된 학교폭력 관련 캠프였는데, 그 대상이 피해학생이 아니라 가해학생이라는 것이다. 전국의 학교폭력 가해학생들과 그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이 캠프의 운영은 “학교폭력은 비도덕적 범죄행위이므로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마라”는 식의 훈육(訓育)이 아닌,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무용, 음악, 미술, 영상, 극작 등의 예술행위를 통해 몸과 마음을 열고 마음껏 놀게 하면서(play)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도록 하는 열린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자신들의 문제점을 풀어내고 그 해결책을 스스로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상담과 맞닿아 있지만, 독특한 것은 무대 위에서 친구들과 함께 만든 연극(뮤지컬)으로 자신들의 문제들을 치유(힐링)한다는 점이다. 
  마음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지는 일방적인 훈육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활의 경험에서 알고 있다. 캠프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3박4일 간의 기초캠프에서 몸과 마음을 열게 되고, 자신들의 처지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노래로, 글로 표현한다. 처음부터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들의 표현 속에는 반성보다 분노가, 믿음보다 불신이, 자발적인 의욕보다 수동적인 무감각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서히 무대화가 이루어지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에 당사자인 자신이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무대는 행위를 하는 자(배우)의 공간이지만 지켜보는 자(관객)를 전제하고 있다. 관객은 배우와 교류하면서 환호를 지르기도 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응을 보인다. 상호 소통의 무대 메커니즘을 경험하면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일방적인 주장과 표현들을 다듬기 시작한다. 피해학생과 부모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고 학교로 불려와 사과하는 자신의 부모가 되어보기도 하면서, 더러는 눈물을 글썽인다. 자신들이 만든 어설픈 대본이지만 기초캠프의 성과로는 충분하다. 그들은 토요휴업일을 이용한 세 번의 추수관리와 심화캠프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기초캠프에서 자신들이 펼쳤던 이야기들을 충분히 되새김질하고 모인 아이들은 보다 성숙한 자세로 자신들의 작품을 다듬기 시작할 것이다. 교사들은 철저하게 그들의 작업을 인정해주고 적절한 조언으로 의욕을 고취시키면 된다. 무대가 주는 즐거움을 맛본 학생들은 이미 치유의 과정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3박 4일간의 제1기 캠프가 끝나고 제2기 학생들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연극이 청소년 인성교육에 얼마나 좋은 도구인지, 무대가 인간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지 새삼 확인하고 있다.
 
  21세기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시대이다. 우리 주변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나 ‘스토리를 발견하고 창조할 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천만 관객을 훌쩍 넘어버린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도 스토리텔링의 성공 사례 중 하나이고, 요즘 유행하는 TV 토크쇼들 역시 스토리텔링에 기초한 프로그램이다. 인간은 누구나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사회 어디에나 ‘스토리’가 넘쳐난다. 연극, 영화, 소설, 게임, 드라마, 광고 등은 넘쳐나는 ‘스토리(Story)’를 효과적으로 텔링(Telling)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매체들이다.
  그렇다면 청소년 연극과 스토리텔링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경기도는 우리나라 청소년 연극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지역이다. 해마다 전국청소년연극제에 출품하는 전국의 200여 고등학교 중에서 경기도가 50~60개를 차지한다. 질적으로도 역대 전국청소년연극제 대상 수상학교 16개 가운데 4개 학교가 경기도에 소재한 학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연극반을 지도하려는 교사들은 줄어들고 있다. 연극반 지도 교사들은 본인의 교과 수업, 담임 업무, 부서 업무, 야간 자율학습 감독 등과 같은 일반 교사의 업무와 별도로 연극반을 지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습 공간의 확보 문제, 행정실과의 마찰, 예산 확보의 어려움, 연습과 공연을 위한 공문 작성, 학생지도부장·학년부장·담임교사들에게 허락을 받아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학생들을 연습시키는 문제 등 수많은 어려움이 연극반 지도 교사의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학교의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문제 교사 바라보는 하는 관리자들이 있는가 하면, 학생들의 장래를 망치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동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이유만으로 연극반 지도 교사의 감소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런 이유들은 과거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연극반을 운영하는 것이 학생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스스로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방적으로 기존의 대본을 정하고 짧은 시간에 무리하게 연습을 진행하다보면 교사도 학생들도 모두 지치기 마련이다. 지도 교사는 탁월한 기존의 연출을 모방하려 할 것이고, 학생들은 대본의 이야기를 왜 해야 하는지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해 소극적으로 변한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방법은 스토리텔링에 있다. 학생들 스스로 이야기의 소재를 찾도록 유도하고 그것을 연극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가르치면 된다. 아이들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탐색할 것이고, 애정 어린 눈으로 주인공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토론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포럼연극(Forum Theatre)을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아이들은 훨씬 적극적으로 변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교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약간의 의견을 제시하면 된다. 작품을 잘 포장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아이들의 진솔하고 발칙한 이야기가 충분히 연극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수다를 떨다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를 뿐더러 다음 연습 시간이 어느새 기다려진다. 아이들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교사 역시 자신의 일에 커다란 긍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공연이 끝나고 한턱내기로 하고 찾은 식당이었다. 공간도 적당하고 가격도 저렴하여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모두 좋다고 난리들이다. 대부분의 고기가 수입산이었지만 잡채, 샐러드, 초밥, 국수, 과일, 아이스크림 등 제법 먹을 만한 메뉴들이 마음에 들어서 장소를 정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한가하던 식당은 우리 아이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우리로 인해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 할까봐 걱정이 됐지만 즐거워하는 학생들과 접시를 들고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서로 선생님 옆에 앉겠다며 고기를 들고 온다. 열 가지가 넘는 여러 종류들의 고기를 모두 담아 와서 굽기 시작한다. 일부 음식은 금세 동이 났고 종업원들은 모두 우리 학생들의 엄청난 먹성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였다. 두 번, 세 번 아이들의 음식 나르기가 계속될수록 나는 식당 종업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러다가 이 식당 망하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들의 식탐은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두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나서야 우리 아이들의 ‘고기 뷔페 습격사건’은 끝났다. 계산을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전하자 식당 주인은 오히려 맛있게 먹어주는 아이들 때문에 좋았다며 환하게 웃는다.
  요즈음 청소년들이 이기적이고 편식과 음식 투정이 심하다고 하지만 모두가 모여 함께 식사를 해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가끔 아이들과 휴일에 연습하면서 각자가 집에서 가져온 밥과 반찬들을 큰 그릇에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비벼 먹기를 하는데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맛있게들 먹는다. 서로가 서로의 밥도 퍼주고 비비느라 고생한 친구들의 실력에 감탄하며 맛있게 먹는다. 아이들의 음식 투정이나 편식은 함께 어울리며 음식을 나누는 대가족 제도가 TV를 앞에 두고 대화 없이 혼자 밥을 먹는 핵가족 제도로 변한 데서 상당 부분 기인한다. 함께 밥을 먹으면 강한 동질감과 유대감이 형성된다. 개인주의적 모습은 사라지고 남을 배려하며 음식을 서로 권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형성된다. 그렇게 먹는 밥은 맛도 좋다. 자신들이 만든 비빔밥을 선생님이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만으로도 아이들은 행복해한다. 우리 아이들의  ‘고기 뷔페 습격사건’도 고기 자체의 맛 때문이라기보다 공연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선생님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느꼈던 그런 감정 때문일 것이다. 
 
  충청남도 대천항에서 20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원산도에는 서해안 유일의 낙도 중학교인 원의중학교가 있다. 13명의 교직원과 전교생 18명이 재학 중인 이 학교에서 영어 뮤지컬 동아리를 만들고자 한다며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섬 학교의 특성상 문화적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어서 주기적으로 섬에 들어와 뮤지컬을 만들어줄 전문 극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원들과 회의를 하고 간단한 공연을 만들어 원산도를 방문하기로 했다. 원산도는 충청남도에서 안면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학부모들 대부분이 1965년에 개교한 원의중학교 출신들로 학교와 지역사회가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학교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과 태도는 육지 학생들의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즉각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쉽게 지루해하며 반응 속도가 빠른 육지 학생들과 달리 원의중학교 학생들은 정이 많고 끈기가 있지만 자신의 감정 표현에 소극적이었다. 이 학생들과 한 달에 한 번 만나 뮤지컬을, 더구나 영어 뮤지컬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이 될 것인지 단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반대하는 단원은 없었다. 
  대본, 안무, 노래, 대사 등으로 역할을 나누고 교육을 시작했다. 공연이라는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 중심의 즐기는 뮤지컬 체험을 목표로 삼았다. 여름방학 중에는 광주시청소년극단 학생들과 함께 원산도를 방문하여 2박 3일 뮤지컬 캠프도 같이했는데,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가능성을 확인했다. 가을에는 원의중학교 학생들이 학교 축제에서 뮤지컬 공연을 했다. 연습을 시작하면서 짧은 기간 탓에 완성도 높은 멋진 공연이 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았지만, 배우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 훌륭한 연극적 체험이 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해보였다. 왜냐하면 우호적인 관객(학부모)들로 객석이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공연에 초대된 학부모들의 반응은 다양하지만 공통된 특징이 있다. 혹여 실수할까봐 가슴 졸이는 분, 별로 웃기지 않는 장면에서 크게 웃는 분, 슬픈 장면이 아닌데도 눈물을 흘리는 분, 지나치게 감탄하는 분 등 다양한 반응 속에는 자식에 대한 대견함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무대 위에 선 자식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모는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낳고 길러온 현존재(現存在)로서의 자식의 모습과 자식이 창조해 낸 허구적 인물(배역)이 중첩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자식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만을 보아온 부모가 연극을 통해 창조된 자식들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서 자녀를 훨씬 깊게 이해하게 된다. 이렇듯 연극은 특정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예술이 아니다. 연극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그 자체가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육 수단 중 하나이다. 
 
  광주시에 거주하는 청소년들이 모여 뮤지컬을 공연하고 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하는 정기공연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특별하다. 고등학생들로 구성된 공연팀과 서울에서 살고 있는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함께 출연하기 때문이다. 그는 청소년 힐링캠프에서 만난 적이 있는 소위 부적응 학생이다. 3박 4일 간의 캠프 일정 동안 내내 표정이 불안하고 어두운 아이였다. 광주시청소년극단이 출연한 뮤지컬 갈라쇼를 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선뜻 출연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연습 과정에 성실하게 임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공연의 앙상블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까지 어린 여학생 혼자 오가는 것도 마음이 걸렸다.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한 번만 믿어달라며 계속 전화가 왔다. 결국 금연과 성실한 연습 참여를 다짐받고 출연을 허락했다. 어제 그 아이의 공연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필자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 상처받은 한 소녀의 역할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완벽하게 극 속으로 녹아들어가 한 인물을 표현하고 있는 그 아이의 얼굴에서 더 이상 어둡고 불안한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되레 고등학교 오빠인 상대 연기자를 어른스럽게 배려하고 있었다. 금연으로 인해 목소리는 맑아졌고 훈련 과정에서 습득된 진지함과 경청하는 자세는 무대 위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어제 그 공연을 보면서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변화시켰을까? 내가 저 아이에게 해준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관심과 믿음이었다. 나는 아이의 아픈 과거나 가정 문제에 대해 별 문제 삼지 않았고 자세히 묻지도 않았다. 철저하게 공연에서 그 아이가 맡은 배역만을 가지고 대화했다. 제대로 표현했을 때는 칭찬했고 해석이 잘못된 연기를 할 때는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하였다. 무대 위에서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적하면서 따로 불러 설명해주었다.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 이유도 상투적인 사회 통념을 들이대기보다 좋은 연기에 지장을 주기 때문임을 얘기해주었다. 다른 아이들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적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반드시 지적했다. 아이는 항상 곁에서 머물며 지적을 기다렸다. 그 지적이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자신을 인정해주는 따뜻한 관심 속에서 변화한다. 따뜻한 관심이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어주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흔히 과잉보호나 엄격한 훈육으로 자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그들을 품안에 끌어안으려고 하지만 그들은 대화가 통하는 친구에게 외려 끌린다. 자아의식의 발달과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안감이 해방과 독립에 대한 욕구로 이어지면서,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거나 자신에게 공감하고 경청해주는 소위 ‘이해자’를 찾는 쪽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청소년들의 일탈에 흥분하고 분노하기보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이유 있는 고민과 반항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해자’로서의 어른들의 자세가 필요한 이유이다.  
  다시 마하트마 간디의 묘비명으로 돌아가보자. 간디가 지적한 7대 사회악에 예술에 대한 언급은 왜 없는 것일까? ‘수준 낮은 예술’, ‘아마추어적인 예술’이라는 식의 지적을 그가 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쩌면 이는 교육과 예술을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본 간디의 철학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격이 없는 교육(Knowledge without character)’을 ‘인격이 없는 예술(Art without character)’로 바꿔보면 자못 뜻이 분명해진다. 예술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인격을 고양시키는 것이지 뛰어난 예술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