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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정훈 _우리동네사람들
  • 2016.10.24
19호 곁봄 | 칼럼
마을공동체에서 꽃피는 문화예술교육
 
조정훈 / 우리동네사람들

 

  우선 제목에 대해 하나하나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마을’, ‘공동체’, ‘문화’, ‘예술’, ‘교육’은 근래 꽤나 ‘핫한’ 주제입니다. 실은 인류가 형성된 이래 있어 왔고 다루어져 온 오래된 주제일 텐데, 이것이 핫하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뜻일 겁니다. 
 
  몸이 그렇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평상시에 특별히 몸의 이상 반응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게 되면 발열 등과 같은 반응이 생기고, 아픔을 느끼고서야 아픈 부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픈 부위가 치료된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새로운 건강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몸이 가진 자연스러운 상태로 ‘회복’된다는 의미입니다. 원래의 상태, 즉 정상적인 상태가 되면 더 이상 ‘핫한 곳’이 아니란 뜻입니다. 
 
  따라서 마을공동체가 핫하다는 건 그만큼 우리의 관계망이 무너졌다는 의미일 것이며 공동체 회복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보자는 것보다는 무너진 관계망을 복원하자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절은 본질적으로 정상의 상황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살피고 돌보는 관계가 정상입니다. 그러나 이는 애써 선한 마음을 내어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관계를 맺으면 자연스럽게 사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회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는 건 이미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관계되어 있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 정상의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 만날 시간과 장소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물론 현대인들이 너무도 바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드뭅니다. 지금의 사회에서 관계가 무너졌다는 말을 하는 것의 근본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상대와 소통하고픈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요?
 
 
마음을 닫아버리게 되는 사회
 
  사람이 언제 타인과 소통하기 싫어지는지를 살펴보면, ‘주변에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나 ‘남에게 비난 받을까봐 두려울 때’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혼나거나 비난을 받으면 점차 상대와 함께 하고픈 마음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왜 비난하는 마음이 드는 걸까요? ‘화’는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진 심리 상태이고, 삶의 질을 결정하는 큰 요소임에도 잘 살펴보지 않는 주제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비난하고픈 마음이 들 때를 살펴보면 보통 상대가 ‘옳지 않은 일, 하면 안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이때 분노와 비난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내 입장에서는 상대가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달리 상대는 점점 나를 멀리하게 됩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나 역시도 그렇습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점차 남에게 비난 받을 일은 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억누르게 됩니다. 어느새 사람들 앞에서 눈치를 보게 되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없는 조심스러운 상태가 되는데, 점점 그 사람이 가진 생기가 없어집니다. 사람들과 관계 맺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은 줄어들고 누군가의 비난도 받지 않는 ‘안전 범위’ 안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은 늘어납니다. 요즘 ‘혼밥족’, ‘혼술족’이 두드러지는 건 진심으로 혼자 밥을 먹고 싶다기보다는 이런 현상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는 뜻일 겁니다. 
 
 
비난하는 마음
 
  더하여 살펴보고 싶은 주제는 ‘왜 상대를 비난하게 되는 것일까’하는 것입니다. 대개, 내 생각에 상대가 잘못했다고 판단할 때 비난합니다. 그런데 상대가 잘못했다는 건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나요? 바꿔 살펴보면 누군가 나에게 잘못했다고 할 때 그 사람의 판단에 수긍하면 관계의 갈등이 생기지 않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고 나 역시 화와 불만이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나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수긍이 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각자 자기 생각만이 옳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자기 생각에 옳다고 주장해 봐도 상대는 납득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통 싸움의 끝은 더 큰 분노가 되고, 불통의 경험만 쌓입니다. 그런데 옳다는 건 불변의 진리가 아니고 내 생각일 뿐일 가능성이 크지요. 각자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일 뿐인데, 왜 ‘옳다, 틀리다’는 생각으로, 거기에 분노까지 곁들여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하고 마는 것일까요? 상대를 비난하고 싶을 때 그 과정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면 신기한 일이 참 많습니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잘못되었다’는 일방적인 판단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 비난하는 마음이 줄어듭니다. 설사 상대가 나를 비난하더라도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살아온 습관과 인식을 그 자리에서 당장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상대를 비난할 때 역시 일방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상대의 이야기에 관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상대를 듣는다
 
  상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면 상대를 들으려는 마음 또한 생깁니다. 그 사람이 하는 표면적인 말 외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속마음은 어떤지 궁금해집니다. 말이 마음 속 이야기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살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허공에 대고 떠드는 듯한 경우의 대화가 많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공감을 받았다는 느낌보다는 허무하고 외로워지고, 결국 소통이 어렵다 느끼죠. 
 
  마음을 닫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 내 속마음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없어 병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의견의 다름이 조율되지 않으니 결국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고, 나 역시도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문화, 예술, 교육
 
  이 시대의 공동체 운동은 관계의 단절을 복원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내가 무조건 옳다는 고집을 버리고 ‘상대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지점을 스스로 점검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습니다. 일방적인 훈계로는 새로운 아집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인식의 틀이 ‘맞고 틀림’에서 ‘같고 다름’으로 전환되면 마음속에 답답한 채로 담아두는 이야기도 줄어들고, 다름을 조율하여 더 좋은 방향을 찾게 되니 삶의 질도 높아집니다.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관계망이 바로 진정한 공동체가 됩니다. 물리적 기반은 부차적인 조건입니다. 
 
  ‘문화, 예술, 교육’은 이런 공동체 운동을 촉발시키는 효과적인 매개로 기능합니다. 예술은 본래 ‘이렇게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역이었습니다. ‘문화, 예술, 교육’은 내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는 공동체의 훌륭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 예술 본연의 기능을 회복시켜 소통을 촉진시키면 자연스레 개개인이 가진 본연의 색깔들이 발현됩니다. 사람들의 색깔과 역사적 맥락, 그리고 현 시대적 맥락이 어우러져 생겨나는 흐름이 바로 ‘문화’가 됩니다. 그리고 교육은 개개인이 가진 색깔이 무엇인지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표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사회의 생각을 주입시키는 현재의 교육과는 그 목적이 다릅니다. 이런 흐름이 만들어지고 시간이 쌓이게 되면 더 이상 공동체 운동도 필요 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근원의 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이 시대의 공동체 운동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