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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문화정책을 위하여 -‘나 자신의 노래’를 부르자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6.08.29
18호 곁봄 | 칼럼
나의 문화정책을 위하여
‘나 자신의 노래’를 부르자
고영직 / 문학평론가
  2008년 발매된 김창완밴드의 앨범 《해피니스트(The Happiest)》에 수록된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라는 노래를 듣는다. “여자들은 여자들을 살고 남자들은 남자들을 살고 / 어린애는 어린애로 살고 어른들은 어른들로 살지.” 지게차 사고로 숨진 동생을 생각하며 작곡한 이 노랫말이 환기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간명하다. ‘이 현재의 순간(the present moment)’ 나와 당신은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정녕 나와 당신은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고 있는가? 19세기말 위대한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이 노래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를 나날의 삶과 노동에서 만끽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나 우리는 진짜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다. 사람은 빵이 아니라 의미를 먹고 산다는 차원에서 볼 때 특히 그러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선물’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그 자체로 진실이지만, 우리의 하루하루는 진짜 생명의 삶이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연명’의 형식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2년에 작고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여성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가 유작시집 『충분하다』에서 언급한 '겨우 연명하며 사는 그런 사람들’에 관한 비유가 단순히 시적 비유로만 생각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보다 능숙하게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내면과 주변을 말끔히 정돈하고,

     모든 사안에 대해 해결책과 모범 답안을 알고 있는 사람들.

     _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 「그런 사람들이 있다」 제1연

 

  시인이 시에서 언급하는 ‘그런 사람들’의 윤리학이란 “자신의 내면과 주변을 말끔히 정돈하고”라는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오직 힘을 숭배하는 세상의 힘에 굴복하며 자발적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자기계발로 무장하고, 처세술의 윤리를 철저히 내면화하며 스스로의 삶에 대해 질문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한다. “모든 사안에 대해 해결책과 모범 답안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은 지금·여기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생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묵수하며, ‘소비자 천국’의 사회를 구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터이다.

  그러나 그런 삶의 양식이 나와 당신이 진짜 바라는 생명의 삶인가. 이 과정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어떠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나키스트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 교수가 역설하는 ‘예시(豫示)적 정치’의 개념은 나와 당신의 새로운 삶을 향한 대안적 사유와 실천의 좌표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레이비가 말하는 예시적 정치란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형식의 사회성을 창출하여 이미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직접행동의 원리를 철저히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함께 삶(Life together)의 원리를 서로 배우며, 돈을 숭배하는 삶의 형식이 아니라 자치와 자급의 삶을 일상에서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 인구 3천 명 남짓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작은 도시 마리날레다(Marinaleda) 공동체가 그 케이스가 될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 협동조합, 실업률 0%, 무상 주거, 무상 의료 같은 정책과 제도들이 더 이상 꿈같은 기적이 아니라 일상으로 구현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리날레다 공동체를 이끄는 산체스 고르디요 시장이 1985년 어느 인터뷰에서 언급한 다음 진술은 무엇이 진짜 생명의 삶인지를 증언하는 선언문이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정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반동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에 유토피아를 세워야 합니다. 벽돌을 쌓듯이 차곡차곡, 끈기 있게, 꾸준히, 우리가 오랜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사람에게 빵이 있고, 시민들 사이에 자유가 있고 문화가 있을 때까지, ‘평화’라는 말을 존경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현재에 세워지지 않는 미래는 없다고 믿습니다. 진심으로.”

 

 

“메신저가 메시지다”

 

  지상에 구현된 스페인 마리날레다 커뮤니티 같은 유토피아를 마냥 부러워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마리날레다 커뮤니티라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는 것 또한 아니다. 세상에 완벽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와 당신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금·여기에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다양한 (문화예술교육)활동들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사회 따위란 없다’(마거릿 대처)는 말은 거짓말이다. 우리는 저마다 고독한 존재이지만 고립되지 않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사회적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사회적 커뮤니티는 사회적 안전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세상은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거룩한 분노’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분노의 파토스가 사회적인 것을 (재)구성하는 힘으로 곧장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엄연하다. 오히려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했다. 세상의 힘에 맞서는 진짜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하고 행동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 런던정경대 사회학과 교수인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 『투게더』에서 주장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진짜 힘'으로서의 ‘협력의 의례(儀禮)’ 또는 ‘의례적 연대’는 매우 소중하다. 세넷 교수가 말하는 협력의 의례(ritual)는 “협력 자체를 목적으로 삼던 의례”를 말한다. 사회적 커뮤니티와 협력의 기풍이 무너진 지금·여기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협력의 의례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문화에술교육(활동)이 하나의 가능성이 되어야 한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

  이 점에서 문화예술(교육)활동은 ‘메신저가 메시지다’라는 점을 직접적으로 구현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그런 사람들이 하는 활동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내가 바로 나의 메시지’라는 태도로의 전환을 모색하며, 지금·여기에 그런 삶의 가치를 직접 구현하려는 사람들의 실험이 더 많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메신저’란 어떤 ‘위대한 개인’ 같은 특별한 존재가 절대 아니다. 교사, 예술강사, 교육자, 예술가, 문화기획자, 매재자 등등……, 그 어떤 이름들로 불릴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할 줄 알고 다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무엇보다 자기 바깥의 대상들에 대해 호기심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경탄할 줄 아는 마음, 즉 시심(詩心)을 품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국가와 자본의 위력에도 위축되지 않으며, 시들지 않은 내면의 목소리를 간직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내면의 목소리를 간직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직접 부딪치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본능과 실행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을 ‘삶의 장인(匠人)’이라는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나의 문화정책을 위하여

 

  다시, 삶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활동)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삶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활동)은 왜 중요한가. 문화이론가 앙리 르페브르가 감성과 육체가 체험하는 구체적 보편으로서 현대 도시의 ‘리듬’을 연구한 『리듬분석』의 연구 성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앙리 르페브르는 자본/권력에 포섭된 시간·공간으로서 선형적 반복의 리듬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순환적 반복의 리듬을 우리 일상에서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인간에게 가장 커다란 위험은 ‘세인(世人, Man)’이 되는 것”이라고 역설한 독일 신부 로마노 과르디니의 진술과도 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여기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강요된 특정의 ‘리듬’에서 벗어나, 우리는 무엇이 나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나 자신의 삶을 진짜 살 수 있는 리듬인지를 성찰하고, 그런 삶을 향해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점에서 삶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활동)이란 ‘나의 문화정책’을 적극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활동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문화예술교육(활동)의 목표를 재설정하고, 과정을 재설계하며, 참여자들과 함께 ‘직접 유토피아’를 지금·여기에 이루려는 다양한 교육 활동들이 요구된다. 소위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교육(활동) 현장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현장을 접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문화정책의 기획과 추진에 있어서 담대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결국, 그 누구도 나를 함부로 취급할 수도 없고, 나라는 존재가 함부로 취급되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 발상의 전환과 실제적인 행동의 과정에서 나 자신의 ‘리듬’을 회복하기 위한 여행이 시작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것을 교육목표로 하는 덴마크 자유학교 폴케호이스콜레를 탐사한 일본 저널리스트 시미즈 미츠루는 『삶을 위한 학교』(1996/2014)에서 어떻게 덴마크 학교 교육이 삶을 위한(문화예술활동) 학교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런 경험들을 나침반 삼아 나 자신이 발딛고 사는 지금·여기 삶의 현장에서 삶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활동)을 고민한다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그런 삶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활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치지 않고, 그 길을 꾸준히 가려는 인내심과 용기 그리고 동료들이 소중하다. 그 길에 이르는 단 하나의 ‘정답’ 같은 것은 없다. 특정 ‘매뉴얼’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여기 사회질서가 요구하는 리듬에 저항하려는 마음의 태도와 그런 마음의 태도를 습관화할 수 있는 ‘맷집’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나와 너의 문화정책을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정책’을 직접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 우리들의 마음의 습관이 더욱 견고해질 때, 나와 당신은 이 현재의 순간에 생물학적인 생존이 아니라 문화적 생존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생명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으리라. 그 길이 결코 멀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