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문화 재단
  •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이미지입니다.
  • 곁봄
  • ‘정신 집중’과 ‘답정너’ 교육, ‘정답’ 아니다
  • 정은균 _교사, 군산영광중
  • 2016.08.16
18호 곁봄 | 칼럼
‘정신 집중’과 ‘답정너’ 교육, ‘정답’ 아니다
관계와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힘
정은균 / 교사, 군산영광중

 

 ‘사람=삶을 앎’을 키우는 교육

 

  지난 7월18일 군산청소년학생연합(군청학연)이 주최하고 군산교육지원청, 전교조군산중등지회 등이 후원하는 ‘군산 청소년・학생 100인 원탁회의(이하 원탁회의)’가 열렸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이번 원탁회의에 군산시 내 11개 중・고교 재학생 130여 명이 참여했다. “청소년이 제안하면 군산이 바뀐다”라는 캐치프레이즈와 ‘청소년이 말하는 군산시의 청소년 교육 정책’이라는 주제를 원탁에 올려놓고 대토론회를 벌였다.

 

<군청학연 100인 원탁회의>

 

  원탁회의 기획과 준비, 진행 등 모든 과정이 학생들의 자발적이고 직접적인 판단과 결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학년 초부터 매월 1회 모임을 가졌고, 매 모임 때마다 25명 안팎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날 원탁회의는 지역 청소년과 학생들이 자신들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들을 위해 지역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두루 고민하는 마당이 되었다.

  작년 여름 3학년 학생들에게 ‘모둠별 작가 인터뷰’를 방학 과제로 냈다. 종업식이 있던 주 마지막 수업 시간에 과제를 설명했다. 한숨을 쉬거나 “우우” 소리를 내며 ‘저항’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럴 만했다. 작가를 직접 선정한 뒤 전화번호나 이메일 주소를 확보해 섭외하는 일, 활동 이력과 저서들을 두루 조사해 훑어보고 인터뷰지를 만드는 일, 이를 바탕으로 전화 통화나 이메일 교환이나 직접 대면 방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결과를 정리하는 일 모두 쉽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를 기대하면서도 걱정이 없지 않았다. 개학 후 반별로 2~3시간에 걸쳐 발표 시간을 가졌다. 기대 이상이었다. 고리타분한 ‘물건’에 불과한 것으로 보곤 했던 책을 정신과 영혼의 집적물로 새로 바라보게 된 학생들이 나타났다. 수업 후 복도로 나서는 내게 달려와 “이번 과제를 하면서 작가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라고 말한 학생도 있었다. 인근 고등학교로 진학한 그는 지금 글쓰기 활동을 부지런히 계속하고 있다!

 

<작가 인터뷰 결과 발표>

 

  어느 책에서 우리말과 우리글 연구에 평생을 바친 김수업 경상대학교 명예교수가 ‘사람’을 ‘삶을 앎’으로 풀이했다는 대목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이 전제에 충실한 교육을 반대하고 싶은 이가 있을까. 삶이 함께하는 교육은 살아 움직인다.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은 흥겹다. 교과서 속 박제화한 지식 배움을 통해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들이다. 교실에서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가르침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성과 교양의 화신이 ‘기계’가 된 이유

 

  삶에 기반한 학교 교육,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앎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일화 두 개를 이야기하고 싶다. 미국 미시건주립대학교 생리학과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교수가 부인이자 역사학자인 미셀 루트번스타인과 함께 쓴 『생각의 탄생』(에코의서재, 2007.)에 소개한 일화들이다.

  첫 번째 주인공은 루트번스타인 교수의 대학 시절 친구 ‘존’이다. 대학 역사상 가장 총명한 학생들 중 하나였던 존은 책벌레였고,  모든 과목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했다. 

 기계학 연속 강의가 끝난 지 몇 주 지난 어느 날이었다. 존이 물리학과동 강의실의 육중한 참나무 문 앞에서 문을 열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루트번스타인과 함께 있던 친구 중 하나가 손잡이 부분을 살짝 밀어 열어 주었다. 그들은 얼마 전 끝난 예의 기계학 강좌에서 문과 관계되는 물리학 원리인 토크(Torque; 물체를 회전시키는 힘) 방정식을 배웠다. 방정식을 완전히 마스터한 존은 중간고사에서 사상 최고 점수를 받았다. 문을 열어준 친구가 얼떨떨해 있는 존에게 원리를 상기시켜주었다.

  존은 한참을 더 헤맸다. 가까스로 원리를 이해한 존은 문의 크기와 힘과 그것이 가해지는 지점까지의 거리 등 역학적 요소들을 넣어 문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에 힘을 가할 때 적은 힘으로 문을 열 수 있다는 토크 방정식의 ‘답’을 다시 알아냈다. 그러나 루트번스타인은 존이 토크 방정식의 ‘환상’을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실재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이 등장하는 두 번째 일화를 보자. 스티븐은 당대의 걸출한 교양인이었다. 정치와 종교와 문예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했으며, 방대한 분량의 『영국인명사전』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위대한 문학가가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루트번슈타인은 스티븐이 죽은 후 울프가 남긴 말을 빌려, “케임브리지적인 분석 정신의 경탄할 만한 전범”이었던 스티븐이 실생활 측면에서 “매우 조야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울프는 아버지가 받은 케임브리지 교육이 일방적이고 두뇌만 집중적으로 사용토록 하여 정신을 불구로 만드는 교육이었다고 혹평했다.

  학교 공부에만 과도하게 매달린 스티븐은 예술을 접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이는 음악, 미술, 연극 등에 대한 심각한 결핍증을 불러왔고, 그 결과 지적 편중과 좁은 시야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훗날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가 되어서도 학생들에게 늘 시험만 생각하고 책에만 매달리며 학사 학위를 따기 전까진 아무것도 즐기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문학비평이 아닌 다른 분야에는 스스로를 ‘무교양 속물주의자’로 부를 정도로 무지했다고 한다.

  지성과 교양의 화신과도 같았던 스티븐의 말년은 어땠을까. 예술가들을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개인적 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존재라고 여겼던 그는 65세쯤 되자 그 자신이 주변과 완전히 격리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감정을 직시하지 않고 거부했으며, 스스로를 허위의식으로 위장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감정과 공감력을 잃은 ‘기계’가 된 것이다.

 

  루트번스타인은 존과 스티븐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신에게 ‘주입’시키는 데는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둘 다 실제로 무엇인가를 행하는 능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고 지적하면서, ‘알기’와 ‘이해하기’, 그리고 환상과 실재를 분리시킨 교육이 그들의 총명한 머리를 한쪽만 쓰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루트번스타인은 삶에서 유리된 교육, 상상력이 부족하고 마음과 몸, 지성과 직관을 연결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는 교육의 결과를 “심각한 장애”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미국 작가이자 화가인 폴 호건의 말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이 묘사하고 있는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단편적인 지식 암기 중심의 교육,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의 폐해는 명백하다. 그것은 지식의 개념을 좁게 만든다. 배움을, 교실에서 교과서와 교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믿게 만든다. 아이들은 스스로 배워 알고자 하는 의지와 흥미를 잃는다. 어린 시절 넘쳐나던 상상력이 시나브로 죽어간다.

 

 

 “1온스의 경험이 1톤의 이론보다 낫다”

 

  진짜 교육은 학교에만 있지 않다. 학교 교육은 오히려 문제투성이다. 윌리엄 토리 해리스는 1900년 무렵 미국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학교 의무교육 시스템을 규격화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나이가 같은 학생들을 한 학년으로 묶어 나눈 뒤 한 교실에 몰아넣고 가르치는 시스템을 개발한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해리스는 학생 100명 가운데 99명은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 걷고 이미 굳어진 관행을 따르면서 기계처럼 움직인다고 보았다고 한다. 교육은 개인을 로봇처럼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며, 학교는 학생들에게 바깥 세계와 단절하는 힘을 키워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와 교사는 교과서와 교육과정에 따라 ‘기계’를 만들어 낸다. 교육과정을 가리키는 ‘커리큘럼(curriculum)’은 ‘경주마가 목표 지점까지 도달하는 길’을 뜻한다. 미국 교육운동가 존 테일러 개토의 말을 빌리면 학생들은 “무책임한 사람을 기르는 양성소”가 된 학교에서 질주하듯 살아간다. 눈가리개가 있어 옆을 볼 수 없는 경주마처럼 그들은 주변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은 프러시아(독일)의 의무교육 시스템에 터를 두고 출발했다. 우리나라의 학교 시스템은 일제 강점기 시절 미국식 교육 시스템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손을 거쳐 들어와 정립된 것이다. 그 뒤 한국 교육은 큰 변화 없이 과거의 시스템을 답습해 오고 있다. 화려해 보이는 교육 지표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배운 괴물들의 사회”가 돼 버린 이유가 아닐까. 새로운 학교, 과거와 다른 학교 교육을 ‘상상’해야 하는 이유다.

  많은 학교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기존의 지식을 더 많이 전달해주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고 믿는다. 또한 교사와 교과서가 알려주는 지식을 더 많이, 더 완벽하게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학생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교육에 대한 교사의 관점, 교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교육방법과 태도를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존 듀이를 비롯한 무수한 교육자들의 주장을 따라 관계와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나’는 ‘너’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골치 아픈 ‘품사’는 품사 유형 목록이나 예시 단어로서가 아니라 언어(모어)와 언어생활과 사회적 언중이라는 넓은 자장권 안에서 정의될 때 살아있는 지식이 된다.

  지식은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관계와 경험을 통해 구성된다. “1온스의 경험이 1톤의 이론보다 낫다”라는 듀이의 경구를 새겨보자. 규율과 통제 위주의 ‘정신 집중’ 교육, 획일적인 ‘답정너 교육’은 답이 아니다.

   아이들은 배움이 아니라 가르침에 저항한다. 미국 뉴욕 프리스쿨에서 35년 가까이 이른바 ‘문제아’들을 만나고 있는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선생님이 한 말이다.

 

  어떤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언컨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