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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동이 삶을 지속하도록 하자 - 청주 공룡들을 찾아가다
  • 채효정 _정치학자. 경희대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
  • 2016.08.24
18호 가봄 | 현장스케치
운동이 삶을 지속하도록 하자
청주 ‘공룡’들을 찾아가다
채효정 / 정치학자. 경희대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
숨은 별 찾기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런 느낌이 든다. 캄캄한 밤하늘 어슴푸레 빛나고 있는 별 하나. 칠흑 같은 밤바다를 항해하다 저 멀리 어둠 속에 흔들리는 등대의 불빛. 세상을 다 밝힐 만큼 환하진 않지만, 그 빛을 의지하고 가면서 나도 내 속에 품은 빛을 잃지 않도록, 딱 그만큼, 너도 그만큼만 밝아라, 하고 일러주는 사람. 북극성, 남십자성처럼 밝고 굳게 자리를 지키며 좌표가 되는 별하고는 다른 별. 흔들리며 함께 가는 별. 세상이 밝아지는 건 작은 불씨들이 모여질 수 있을 때다. 어떤 힘센 바람이 훅 불어 꺼트릴 수 있을 만큼 작은 존재라 해도, 그게 무서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저마다의 불씨가 있어 점화의 때가 오면 서로에게 불을 붙여주며 들불처럼 산불처럼 번져갈 거라는 게 나의 믿음이다.  
 

 

  그런데 불씨가 살아남으려면 아궁이가 필요하다. 인간의 온기를 지키며 살아갈 보금자리가. 오늘 나는 그 보금자리를 찾아간다. 〈청주공룡〉(이하 공룡). ‘공부해서 용 되자’는 뜻을 가진 이 ‘생활교육공동체’는 이제 전국적으로 꽤 유명한 곳이 되었다. 나는 여기가 유명세를 타기 전부터 익히 듣고 있었다. 실은 이번 기회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학벌없는사회〉라는 단체에서 각 지역의 생활교육공동체를 탐방하는 계획을 세웠을 때 제일 먼저 방문 목록에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 때는 기회를 놓쳤고, 지금은 기회를 잡았다. 이번 기회엔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알고 싶다. 
 
 
편한, 너무나 편한
 

 

 

  청주의 구도심 사직동 시장 골목에 있는 마을 카페 〈이따〉가 이들의 아지트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넓다. 공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부엌. 아 부럽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저 어떡하죠? 오자마자 부러워요!” 부럽다. 편한 공간이다. 마음의 문턱이 없다. 흙 묻은 장화에 더러워진 옷이라도 들어와 털썩 앉기가 부담스럽지 않은 이 공간은 입구에 붙여 놓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천원’ 종이처럼 편하다. 가끔 너무 세련되고, 너무 지적이고, 너무 깔끔하고, 너무 멋진 공간이 싫을 때가 있다. 공간 자체가 특정한 미적 취향을 우월적으로 드러내면서 문화적 열등감과 소외를 야기하고 그 공간에서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것을 종종 보았다. 그래서 가난의 미학 없이 멋지기만한 공간이 나는 싫다. 공간은 사람을 닮아가기에, 마을 카페 〈이따〉의 분위기는 공룡의 분위기이기도 할 것인데, 첫 번째 느낌도 두 번째 느낌도 ‘편하다’는 것이다. 압도적으로 편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벽 한쪽을 채우고 있는 포스터나 플래카드에서 드러나는 정치색(?)이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 소도시 시장 모퉁이에 있는 카페 치곤 사람들에겐 낯설만한 풍경인데, “영업에 지장은 없나요?” 웃으며 물으니, “뭐 그게 불편해서 안 올 사람은 안 오겠죠. 어쩌겠어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잖아요. 그런데 대부분 금방 익숙해져요. 자꾸 보다보면 그냥 원래 거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세월호 포스터보다 ‘팥빙수 개시’ 같은 게 눈에 띄죠” 또 편한 대답이다. 
 

 

  거기 불을 닮은 사람이 하나 있다. 내내 뜨거운 사람, 박영길. 밤에는 음식물 쓰레기 수거원으로, 낮에는 공룡의 활동가로, 농사도 짓고, 교육도 하고, 책도 쓰면서 대체 잠은 언제 자나 싶은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나자 마자 “진짜 사람인지 검증부터 합시다(웃음)”라고 말했을 정도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힘에 부치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내내 수월하다. 공간의 편안함이 목소리의 편안함과 묘하게 일치한다.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 그건 이미 그의 활동이 ‘해야 한다는 당위’보다 ‘살아간다는 일상’이 되어있다는 의미다. 또 부럽다. 힘에 부쳐하며 일했던 날들. 나는 반드시 해야겠다고 이를 악물 때가 많았고, 그 일이 성사될 때마다 어딘가에선 삶의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고 부서져 나갔다. 상처투성이로 남은 자리에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 부지깽이로 끊임없이 자기를 쑤셔대야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찌 이리 편한가. 이 엄혹한 시절에 엄청난 활동력을 보여주면서도 말이다. 
 
 
언젠가는 망한다 
 
  편안한 이유를 알았다. “언젠가는 망해요. 조직이고 단체고 다 끝이 있죠.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망하더라도 같이한 사람들이 나중에 만나서 웃으면서 얘기했음 하는 거죠” 나는 이 말에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지 모른다. 날마다 전전긍긍한 건 결국 망할까봐 두려워서였던 것이다. 날마다 각오를 한다는 건 날마다 패배를 두려워한다는 뜻이었다. 이날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비결을 하나 배웠다. 조직을 지키고 키우려고 하지 말고 사람을 지키고 사람을 키우자.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고 관계다. 여기서 사람이 성장하고 관계가 단단해지면 조직의 틀은 얼마든지 바꿔갈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종종 거꾸로 생각한다. 조직이 위기라고, 단체가 흔들린다고. 아니다, 흔들리는 것은 늘 사람이다. 사업으로 정체성을 인정받고 규모를 확장해서 인적 재정적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게 그동안 일반적인 시민단체의 운동 방식이었다면, 공룡은 사람이 비빌 곳이 되는 게 먼저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망한다니….’ 쿵, 가슴 속에 계속 울려오는 이 메아리가 메신저로부터 수신된 첫 번째 메시지였다. 이 말에는 운동에 대한 생태주의적 관점이 녹아 있다. 어떤 운동이든, 성장과 소멸이 있다. 이념의 좌표는 영원할지 모르지만, 생명력을 가진 현장의 운동은 태동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망하면 끝이다가 아니라, 우리가 망하면 다음 사람이 온다는 믿음. 결국 이것이 가장 중요한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전자의 운동이 단체와 조직에 공학적으로 집중한다면 후자의 운동은 생태주의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전자는 승리에 집착하지만, 후자는 과정에 의미를 둔다. 전자가 공간성의 사유 위에서 운동의 확장과 발전을 고민한다면, 후자는 시간성을 수용하면서 어제의 사람으로부터 내일의 사람으로 이행해가는 교육학적 성장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시간을 쌓는다
 
  언젠가 망할 것이라면 왜 활동을 함께하는가. “그래서 자기에게 시간을 축적해야한다고 말해요” 대답도 덤덤하다. 사람이 비빌 언덕이 되자는 공룡이지만 어찌 보면 놀라울 만큼 참, 사람 욕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단다. 역량 있는 활동가 한 사람이 나가면 그만큼 조직으로서는 손실이니까 사람 하나 나가는 것을 늘 ‘마이너스’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셈법이 여기서 뒤집어졌다. 활동가를 조직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성장해서 나갈 수 있는 삶터를 만들자고 생각하는 것. “상담을 좋아하는 친구는 여기에서 배우고 다른 상담 센터로 갈 수도 있죠. 교육 활동을 하면서 대안 교육에 대한 자기 전망을 가지고 대안 학교로 가기도 하고요” 자기 성장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그 시간을 함께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 관계가 서로에게 ‘플러스’ 된다는 생각을 나는 왜 일찍이 하지 못했을까. 
 
  관계를 맺어가는 것은 서로에게 간섭하거나 개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한뜻으로 결사한다고 해서 삶의 방식까지 비슷해질 수 없다. 그래서 공룡의 활동가들은 코드를 맞춰 가는데 에너지를 쓰기보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필요할 때 서로를 도와주는 ‘따로 또 같이’를 원칙으로 한다. 재정 운영도 같은 식이다. 미디어 팀, 교육 팀, 농사 팀, 카페 운영 등 각자의 영역에서 일한 수입을 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만큼 재정에 보탠다. 카페나 농사, 교육, 미디어 제작으로 얻는 수입은 카페 임대료와 공룡 식구들의 식비, 공간 유지비 등을 충당할 정도면 되고, 나머지는 각자도생이다. 하지만 반드시 함께 의논하는 문제가 있다. ‘집’이다. 공룡은 집 문제만큼은 같이 푸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주거가 안정되지 못하면 활동 역시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룡 활동가들은 대부분 거점인 카페 〈이따〉에서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에 살고, 누군가 이사를 해야 하는 등 집 문제가 생기면 공동의 문제로 인식하고 함께 풀어 나간다.  
  공룡이 함께 해결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밥’이다. 아직 논을 얻지 못해 주식인 ‘쌀’은 해결하지 못하지만, 함께 일구는 밭 2천 평은 공룡 밥상의 밑천이다. 처음에 밥을 해 먹자고 한 것은 외식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카페 공간이 있으니 커피 값도 줄었다.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반 자급을 하는 것은 공룡 활동의 가장 중요한 토대다. CMS 후원도 받지만 그건 필요 경비의 +α 정도로 비중이 크지 않도록 하고, 대신 몸 써서 하는 일로 돈을 벌자고 했다. 몸노동을 꼭 하자고 한 것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도 있었다. “활동가가 몸으로 하는 일을 두려워하면 안 되니까요” 어쩐지! 서류 작업으로 돈을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기 힘든 자신감과 편안함은 몸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에이전시는 되지 말자.
 
  그래서 공룡은 딱히 활동에 대한 욕심도 없어 보인다. “우리가 스트레스 받으면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하지 말자고 해요” 하지만 하고 싶은 활동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위한 사업을 벌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각종 지원 사업에 매달려 사업 계획서와 보고서 작업으로 활동 자체보다 ‘활동을 했음을 증명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는 현장 실무자들은 알 것이다. 단체의 운동 역량을 ‘지원 사업’ 따내기에 소진시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기형적 구조로 기울어진 것이 이미 오래임을. 공룡은 그런 모델의 위험성을 일찌감치 감지했던 것 같다. “우리는 지원 사업 별로 안 해요. 돈 쓸 데가 없으니까요” 돈이 들어오면 그 돈 쓰느라 또 뭔가 실적이 될 만한 사업을 만들어내야 한다. 역량의 소모만이 문제가 아니다. 돈은 상상력도 가로막는다. 관계와 지역 자원을 동원해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돈으로 쉽게 해결되면서 머릿속에서 다 지워지는 것이다. 지원 사업 모델에는 더 큰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마을 만들기 사업도 그래요. 예산을 풀기 전까지는 머리 맞대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요. 전문가가 들어오면서 진짜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대상이 되어버리죠. 관계가 망가지는 경우도 많아요. 이를테면 예전에 마을에서 공부방을 할 때는 아이들이 발표회를 하면 부모들이 같이 음식 준비를 하고 했거든요. 그런데 예산이 있으니 아무도 나오시질 않더라고요. 그렇게 지역의 질서, 생태계가 계속 망가지지요” 새겨들을 말이다. 
 
 
마을에 집중하되 마을에만 매몰되진 말자
 
  즐겁게 먹고 놀고 공부하고 활동하는 공동체라 해도 그 즐거움을 우리끼리만 누릴 때는 그저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가 된다. 그래서 공룡은 “마을에 집중하되 마을에 매몰되지는 말자”고 한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음식을 해주기 위해 공장 앞에 텃밭을 만들고, 청주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결합하거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것은 그런 의미다. 공룡 활동가들을 위한 밥상은 고단하고 지친 자리에 있는 이들의 밥상으로 수시로 확장되었다. 
 
  그래서 공룡의 밥상은 그냥 배만 채우는 밥상이 아니다. 학창시절, 지역 아동센터 활동가 시절, 그리고 공룡까지 운명이자 팔자인 듯 늘 요리를 담당(?)해왔던 박영길은 최근에 『요리활동』이란 책을 냈다. 여기에는 식비 절감 보다 더 중요한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기술’로서의 밥상의 의미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배를 채워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해주고 받는 것이란 걸, 개돼지가 아닌 인간의 밥상은 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경의라는 것을 박영길의 밥상은 보여준다. 지치고 고단한 날일수록 뭔가 근사한 요리를 해 먹자. 우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그의 밥상에선 요리도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다. 누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마음이 아픈 날에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그런 것이 요리 자체의 완성도보다 더 중요하다. 나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요리책 읽기도 좋아한다. 요리책을 읽다 보면 맛이 떠오르고 그 음식을 해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박영길의 『요리활동』을 읽을 때는 맛보다 마음이 먼저 그려지고 맛에 도전하기 보다는 ‘그런 식으로’ 해먹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일었다. ‘그런 식으로’라는 것은, 가족 친구 이웃을 넘어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밥상, 따뜻한 밥 한 끼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음식들, 책에 나와 있는 표현대로 ‘너와 나의 무너지지 않는 일상을 위해’ 요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약속했다. 공룡이 보여준 밥상의 연대를 나도 실천하기로. 언젠가는 공룡들과 함께하는 날도 있겠지.  
 

 

 

에필로그
 
  그날 나는 불씨 하나를 살려 집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나는 들불의 믿음을 가진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른다. 불이 붙는 것도 보았고, 세상이 한 번 뒤집어지는 것도 보았다. 역사책에서 본 영웅들이 내 주위에도 있었다. 내 아들은, 내가 가르쳐 온 학생들은 어떨까. 그들도 타오르는 불길을 볼 수 있을까? ‘착한 사람들은 다시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사필귀정 인과응보의 이야기를 그들은 현실에서 경험해본 적이 얼마나 될까. 현실에 없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의 이야기는 지킬 수 없는 당위가 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정의의 승리’는 책에서만 존재하는 환상이 된다. 오히려 현실은 그렇게 살다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를 날마다 증명하는 텍스트다. 그들이 읽고 있는 것은 책이 아니라 세상이며, 무서운 증거 앞에서 우리의 삶과 교육은 ‘그런 사람인 것처럼 살거나’, ‘그런 생각을 갖고만 살도록’ 하는 거짓된 처세의 삶과 교육으로 날마다 미끄러진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 꺼져 가는 불씨를 쏘삭거려 살려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올바른 내용보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메신저는 불을 전하는 사람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는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그 불씨를 피우고 옮길 차례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