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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곤 _경기도교육연구원 전문연구원
  • 2016.06.15
17호 곁봄 | 칼럼
지역, 문화예술 향유 권리가 실현되는 공간
이병곤 / 경기도교육연구원 전문연구원
 
 “한국 헌법은 상당히 훌륭하다. 지방자치 관련 조항은 제8장에 담겨 있는데, 지방자치 조직이 필요한 
이유는 헌법이 정하는 인권을 지역과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이케가미 히로미치, 2016년 4월 19일, 서울 강연)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생각이었으나 곰곰이 따져보니 맞는 말이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인권, 교육권, 노동권, 문화예술을 향유할 권리,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곳은 바로 가정과 직장이 있는 ‘지역’이다. 평범한 듯 하면서도 비범한 통찰을 전해준 이는 일본 지방자치문제연구소의 이케가미 히로미치 주임연구원이었다. 40년 간 지방자치 연구에만 몰두해온 전문가의 저력이 느껴지던 코멘트였다. 
 
 관념은 힘이 세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애국가, 국기, 국사를 중심으로 ‘국가’를 만나왔고, 개인과 국가가 뗄 수 없는 관계로 직접 결합되어 있다고 믿으며 자라왔다. 뉴스 보도를 위시한 ‘중앙 언론’은 항상 국가 차원의 큰 의제를 다룬다. 그 결과 내 의식 속에는 매일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 지역에 대한 존재감이 희미하기만 하다. 대단한 모순이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국과 잉글랜드의 공공예술 실천 사례>
 10년 전 쯤 영국의 유력지 가디언(The Guardian) 신문에서 읽었던 전면 기사 한 꼭지가 생각난다(당시에 이 기사를 스크랩을 하지 않았던 것이 한스럽다). 지면 사진 중앙부에는 해변가 백사장에 건물 4~5층 높이쯤 되는 ‘재활용품 쓰레기 탑’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장소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도시 ‘브라이튼’으로 추정되는데, 이 지역에는 동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이민이나 망명을 온 외국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안토니 곰리’로 추정되는 설치 예술가는 이들 이민자들에게 각자 의미를 부여한 재활용품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 골판지에서부터 스티로폼, 플라스틱, 헌옷 등의 물품들이 차곡차곡 쌓였고, 안토니 곰리는 자신의 영감에 의지하여 멋진 탑을 완성해 나갔다. 일정 기간 해변에 전시하여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한 뒤에 특정한 날짜를 정해 이민자와 브라이튼 시민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 탑에 불을 놓는다. 작가는 공동창작물이 타들어가고, 끝내 잿더미로 변화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러한 공공예술 실천 사례는 잉글랜드 남쪽 해안마을에서 저 멀리 스코틀랜드 북부에 이르기까지 차고 넘친다. 브라이튼 해변가의 탑을 쌓는데 일조한 북아프리카 모로코 난민 가정에 젊은 아들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아이는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스티로폼을 주우며 과거의 무슨 일을 떠올렸을까? 자신과 잠시라도 접촉을 했던 그 물건이 작가의 손을 거쳐 전시품의 일부가 되었을 때는 또 어떤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마침내 다른 사람들의 물품과 함께 활활 타들어가다 결국 똑같은 색의 재로 변하고 마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어떤 상상에 휩싸였을까? 그 아이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심미적 교육은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아름다움의 대상을 감지하는 능력을 키우려한다. ‘감지한다’는 것은 우리 내면의 의식이 어떤 대상을 향한 지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 작품이나 공연이 객관적 실체로서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인간의 특정한 의식과 만나야만 비로소 내면 안에서 심미적 대상, 또는 이벤트로 부팅이 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미적 의식이 활성화 되어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작품의 의미를 획득하고 성취해야만 한다. 
 
 이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려면 우리가 체험할 심미적 대상이 삶의 주변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문화예술 작품이라해도 접근성이 떨어지면 나의 ‘심미적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문화예술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면 확산되기가 무척 어렵다. 우리 헌법 제22조 제1항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는 이상이 올바로 실현되려면 히로미치 연구원의 통찰대로 ‘지역’이 그 전달 주체, 혹은 매개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음악이나 시각예술에 대한 공부를 혼자서 해왔다. 일명 자득지미(自得之味)를 누리면서 비공식적으로 배운 셈인데, 과장 보태지 않고 말하자면 나를 키워준 진정한 스승은 ‘런던’이라는 지역적 공간이었다.  
 
<런던의 공공예술 사례>
 런던에서 11년 살았다. 그 곳은 나의 거주지인 동시에 오랜 세월 훌륭한 관찰 대상이기도 했다. 런던 체류 기간을 돌이켜보면 거의 주거 불안정 상태와 다름없었다. 10여 차례 이사를 다녔는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되레 그런 사정이 여러 지역의 특성을 두루 관찰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런던 동부를 이스트 엔드(East End)라고 부른다. 도심의 유명 관광지에서 5~6km 쯤 떨어져 있다. 얼마 전까지 ‘칙칙한’ 동네로 알려졌다. 최근 들어 브릭 레인(Brick Lane)과 올드 스트리트(Old Street)를 중심으로 거리시장, 특이한 분위기의 카페와 바, 클럽이 들어서면서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됐던 것이다. 그 곳에서 1~2km 만 더 동북쪽으로 가면 바이너 스트리트(Vyner Street)가 나온다. 몇 년 전까지 런던 사람은 거의 모르던, 주택가와 창고가 뒤섞인 지역의 뒷골목이었다. 나는 이곳에 매달 첫째 주 목요일 저녁마다 방문했다. 
 
 

<바이너 스트리트에는 갈 때마다 풋풋한 생기가 넘쳐흐른다. 

10평 남짓한 작은 갤러리 공간에 대단한 작품이 걸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누리고, 소통하고, 해방감을 만끽한다. 

칙칙한 조지안 시대의 공장 창고 건물들이 예술의 힘을 빌려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바이너 스트리트에는 13개의 소규모 현대미술 화랑이 150m 정도 되는 골목에 띄엄띄엄 들어서 있다. 만약 외지인이 평일 낮에 그 곳을 거닌다면 창고 건물들만 즐비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첫째 주 목요일 저녁이 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5시 이전에 문을 닫던 화랑들이 이 날 만큼은 밤 9시~10시까지 관람객을 받아들인다.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10~20평 정도 되는 화랑들이 금세 사람들로 북적인다. 좁은 거리에는 버스킹 하는 악단들, 서커스나 상황극을 벌이는 공연 전문가들이 나타난다. 도심에서 만날 법한 '패션 피플'들이 파격적인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갤러리와 거리를 휘젓고 다닌다. 맥주병을 손에 들고 입장해도 상관없다. 이 작은 거리 중앙의 작은 교차로 앞에는 관록이 있을 법한 펍 ‘더 빅토리’가 자리한다. 현대미술 관람을 마친 청춘남녀들은 자연스레 이 펍 안팎에서 진을 치고 앉거나 서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첫 번 째 목요일 밤에 마치 마법처럼 변화하는 후미진 뒷골목 바이너 스트리트를 나는 정말 좋아했다. 2년 가까이 거의 빠짐없이 목요 순례를 지켰다.
(바이너 스트리트 관련 자료는 다음 웹사이트를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https://vynerstreet.wordpress.com)
 
 런던 ‘초보 시절’에 즐겨 찾던 곳은 유명하고, 크고, 작품이나 유물이 ‘빵빵한’ 내셔널 갤러리, 영국박물관, 테이트 갤러리,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이었다. 그러다 점차 사치앤사치, 캄텐아트센터 같은 중간 규모의 전시관들에 매력을 느꼈고, 조금 더 세월이 흐르자 바이너 스트리트 같은 후미진 골목길에 드문드문 박힌 작은 미술관들이 더 편안해졌다. 아담한 화이트큐브 미술관에 장바구니를 들고, 잠시 그림을 감상하러 들르는 중년 여성과 소박한 서펜타인 갤러리에 단장을 짚고 여유롭게 설치 미술을 둘러보는 은발의 노부부를 만났다. 화이트채플 미술관은 이민자들의 비율이 높은 지역 한 가운데에 있기에 흑인, 무슬림, 인도인 등 소수인종 관람객들을 유난히 더 많이 볼 수 있다. 작은 미술관이라 해서 ‘허접한 작품’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관록이 깊은 지역 미술관은 대가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판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자부심 또한 상당히 높다. 
 
 지역성과 강하게 결합된 문화예술 기관은 화랑뿐만 아니라 지역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에서는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 행사를 해마다 10월에 개최한다. 내가 살던 해크니구 소속 공립 도서관 여러 곳에서는 특별 도서전, 전시, 체험행사, 이민 온 흑인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행사 등을 진행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중부 리버풀(Liverpool) 해안가에는 테이트 현대미술관 분관, 리버풀 박물관 등이 해변가에 즐비한데, 그 가운데 ‘노예박물관(Slave Museum)’이 자리한다. 과거 ‘대영제국’ 시절 노예 무역과 노예 노동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던 역사, 노예 수송선 안에서의 비참한 환경과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도록 전시관이 구성되어 있다. 리버풀은 비틀즈의 도시로만 알려져 있으나 과거에는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다. 서아프리카에서 ‘사냥해온’ 흑인들이 1차로 미국 동부에 기착했다가 유럽으로 팔려나가기 위해 다시 리버풀을 경유했으며, 영국은 이러한 노예무역을 통해 거대한 산업 자본을 축적해나갔다.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가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은 '텅빈 공간'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존중받으며,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해방된 지역이었다. 

그는 1871년 파리 코뮌이 성립되던 시기에 정치와 교육과 예술을 맡아서 운영하던 직책에 있었으며, 

코뮌의 폭력적 와해 이후 망명 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사진은 파리 코뮌 당시 시민들이 설치한 바리케이트 장면.>

 
 
<문화예술교육의 새로운 전망, 지역공동체>
 문화예술교육을 숙성시키고, 새롭게 그 전망을 세워나가려면 지역공동체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미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발견하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고, 무엇인가 해보려 해도 너무나 부족한 시설, 공간, 전문가 문제 등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일 수도 있겠다. 그 모든 악조건이 새로운 시도를 위한 발판이 된다. 
 
 문화예술을 통한 교육은 사람을 깊이 있는 성찰로 이끈다. 우리 인간은 이성, 감정, 직관, 기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보고 듣는 오감과 달리 이들은 모두 내면에서 발생하는 속성을 가지기에 ‘내적 감각’이라 부르며, 그것을 작동하는 일 그 자체가 바로 ‘정신작용(mentation)’이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안다’는 것은 이 같은 정신작용을 통해 사태를 파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심미적 경험은 우리의 오감과 내적 감각 모두를 작동시켜서 앎으로 이끈다. 심미적 경험이 이뤄지는 동안 몰입, 탐색, 추론, 성찰, 깨달음 같은 정신적 행동이 우리 내면 안에서 접속되고, 분절되고, 종합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그것만큼 풍성하고, 융합적인 교육경험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심미적경험이 지역 안에서 더 자연스럽게 발생하도록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문화예술교육의 중요한 목적으로 세워져야 할 것이다. 지역은 결코 중립적으로 낭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 명백한 사례를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일생에서 바라본다. 그가 지지하고 실천했으며, 끝내 좌절했지만 아직도 인류에게 큰 울림으로 남게 만든 파리 코뮌, 바로 그 도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 웅변한 메시지가 눈물겹다. 예술혼과 형제애가 살아 넘치는 자치 공동체를 꿈꾸었던 이 비타협적 거장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코뮌에 걸어둔 채 담백하고 진솔하게 투쟁했다.  
 
 "파리 민중들 덕분에 나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파리의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직책인 예술가 연맹 의장, 코뮌 구성원, 시장 직을 맡는 대표, 공교육부 대표를 맡고 있다. ...... 파리는 진정한 천국이다! 파리의 모든 일은 시계 장치처럼 굴러간다. 
영원히 이렇게 머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요컨대 그것은 아름다운 꿈이다. 
모든 정부 기관은 연방제로 조직되며 자치적으로 운영된다." (아나키와 예술, 2015, 44쪽)
 
 표현의 완전한 자유, 예술에 대한 정부 개입의 중지를 꿈 꾸었던 쿠르베는 완전한 지역자치를 실현하고픈 이상을 가졌고, 1871년 파리코뮌이 성립했을 당시 그것에 헌신했다. 시민이 직접 자치정부를 구성 운영했던 파리코뮌은 3개월간 유지되다가 프랑스 정부군의 무력으로 참혹하게 무너진다. 시민 3만 명이 죽고, 3만8천 명이 체포된다. 쿠르베 역시 체포되어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스위스로 망명했으며, 1877년에 타국에서 삶을 마감한다.  
 
 우리는 '민주공화국'에 속한 226개의 '자치정부' 가운데 어느 한 곳에 주거지를 정해놓고 살아간다. 쿠르베보다 한참 후배인 우리들에게 남은 과업은 민주공화국이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문화적 삶과 예술적 자유를 지역에서 최대한 누리는 일이다. 아직 내용적 숙성을 이루지 못한 지방자치를 더 완전하게 만들어가는 일도 남았다. 지역사회 안에서 예술과 문화, 교육이 살아 숨쉬게 한다면 예술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쿠르베가 그토록 꿈꿨던 코뮌을 우리 손으로 만드는 일이 될 것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