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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달리 자기를 실현해 가는 존재의 실현운동으로서의 예술
  • 박남희 _철학 아카데미 이사
  • 2015.12.31

 16호 곁봄 | 칼럼

늘 달리 자기를 실현해 가는 존재의 실현운동으로서의 예술
박남희 / 철학 아카데미 이사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뭘까. 예술이 무엇이기에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예술에 대해 묻는 것일까. 도대체 이 시대는 예술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예술이 상품화되고 상품이 예술화 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예술이 이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나갈 힘이 있기는 한 것일까. 만약에 있다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예술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예술은 늘 인간의 삶과 같이해 왔지만 예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공장에서 물품이 대량생산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대량생산된 물품은 필요에 따라 손수 만들어 사용하던 물품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를 물으며 사람들은 이를 단순한 상품과 그것을 만든 사람의 모든 것이 매개된 작품으로 구별해 나가기 시작한다. 자연물이 신의 위대한 창조물이라면 이제 사람들은 기계에 의한 생산품을 상품으로 인간의 수고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을 예술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이 다 예술품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면에서 벤야민은 기계에 의해 생산된 기술품들도 충분히 예술작품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에 의하면 복제품, 영상물 등과 같은 기술품이 그동안 소수에 의해 점유되었던 예술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고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면에서 오히려 이것들이 예술의 대중화, 민주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도르노는 기술품이란 문화라는 옷을 입은 자본주의의 고도의 책략인 문화산업의 상품일 뿐이라며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켜 나온 인간이 다시 인간으로부터 소외는 물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성 상실을 가져온다고 이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들이 어떻게 이야기 하던 예술은 항상 무엇 이상의 어떤 것을 내포하는 것이라는 면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리요타르는 이를 자연 안에서 느끼는 감정과 같은 거대함, 거룩함, 성스러움 등과 같이 우리가 범주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서 숭고미를 이야기 하지만 칸트는 그것을 인간의 미적 감성, 즉 미의 특별한 감수성으로 논하며 인간의 구성능력과 연결시킨다. 즉 사람은 대상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달리 구성해 가는 주체로 모든 것들을 종합판단을 하면서 가장 적절하게, 가장 바람직하게 하려는 앞선 의식이 있는 바, 천재는 개인적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고 보편적 감수성을 자신 안에 같이 하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는 자라 한다. 칸트는 이를 천재미학으로 전개시켜 나간다.

 

 천재는 자연과학의 기술(Skill)과는 또 다른 테크네인 기예(Kunst)로 앎과 실천을 하나로 하면서 가장 올바르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는 자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예술은 일종의 삶의 기술(Lebenskunst)이라 할 수 있다. 칸트는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을 진리를 오도하는 자로 여겼던 스승인 플라톤과 달리 예술을 이 세상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길로 여기며 구체적 삶의 실천적 지(pronesis)로서 중용을 이야기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연 안에서 느끼는 감정과 같은 거대함, 거룩함, 성스러움은 인간의 미적감성과 연관된다.>

 

 

 그러한 면에서 칸트는 예술을 전적으로 작자의 구성능력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예술을 단지 작자의 주관적 감정이나 표현 기술 등과 같은 능력 내지는 목적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더더욱 자연의 단순한 재생이나 모방, 재현을 뜻하지도 않는다. 현대는 예술을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다시 말해 특정한 저자에 의한 것도 어떤 작품으로 정해진 것도 아닌,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관계성 안에서 늘 달리 현현하는 것으로 이야기 한다. 즉 예술은 어떤 것, 다시 말해 실재성의 차원이 아니라 둘 사이에 관계 안에서 그때그때 달리 일어나는 사건 그 자체로 이야기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람이 하이데거이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에 근거하여 과연 예술작품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사물과 사물성, 그리고 사물다움에 대해 논한다. 그는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사물과 그것의 유용성에 근거한 도구적 사물성을 넘어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는 존재성, 즉 사물다움의 세계를 예술작품의 근원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사물다움은 사물과 분리되어서는 성립할 수 없기에 하이데거는 사물다움의 근원 또한 사물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그동안 예술에 대한 추상적이고 관념이며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논의를 구체적 사물, 현실, 시간, 역사 안으로 끌어 드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비 본래적 삶과 본래적인 삶의 문제로 보면서 예술이란 비 본래적인 삶 속에서 본래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유의 운동임을 역설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예술에 대한 논의를 존재론적으로 더욱 심화시키며 구체적 자기실현의 이해의 운동으로 삼아가는 사람이 가다머이다. 가다머는 예술을 특정한 학문의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삶이라는 현실의 바다에서 자기 나름으로 세계를 이해하며 스스로를 새롭게 실현해 가고자 하는 이해의 운동으로 이야기 한다.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모든 것들을 함께 하며 늘 달리 새롭게 자기를 형성하며 나오는 그 일이 바로 예술이라 하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러한 일이 야 말로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진리라며 예술에서의 경험(Erleben)의 문제를 논구한다. 가다머는 경험을 오감에 의해 인지되는 영·미철학의 경험론과 달리 독일의 신비주의 전통 하에 있는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경험을 알 수 없는 것을 자기 안에 서 하나로 느끼는 일종의 진리 사건으로 말한다.

 

 그리고 가다머는 이를 적용의 문제로 재차 설명해 간다. 가다머는 적용을 무엇을 알고 이후에 이성적 판단에 의해 시간적 차이를 가지고 행하는 적용(Applikation)으로서가 아니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이미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융해로서의 적용(Anwendung)을 이야기 하며 이를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라 한다. 자기보다 앞서 있었던 전승(Überlieferung)까지도 하나로 적용하고 있는 지평융합은 앎과 삶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앎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앎과 존재의 일치를 말한다. 이는 대상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경험적 차원에서 앎과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가다머는 이를 예술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예술교육인가, 교육의 예술화인가.

 

 앎과 삶의 일치로서 예술을 이야기하는 가다머의 예술은 그가 빌둥(Bildung)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는가에서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칸트가 빌둥을 점점 더 자라고 성장하는 교육적 의미로 사용한다면, 헤겔은 빌둥의 의미를 목적 지향적인 성취의 의미가 강한 도야적 의미로 사용한다. 이에 반하여, 가다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달리 새롭게 자신을 실현해 가고자 하는 교양적 의미로서 빌둥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는 누구나 그 나름의 존재성을 가지는 바, 누가 누구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며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때론 아이도 아버지의 선생이 될 수 있듯이 선생과 학생, 부모와 자녀 등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자로 여긴다. 모든 존재하는 자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가진 차이를 가진 존재로 그 어떤 것으로 일방적으로 재단되고 교육되고 양육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자는 자기가 서 있는 자리, 시선, 환경, 전통 등에 따라 각기 달리 이해하고 적용하며 해석하며 늘 달리 존재를 실현해 가며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가 예술의 진리 경험을 논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지식학이 아니라 존재를 새롭게 생성해 가고자 하는 삶의 실천학이다. 마주하는 현실의 모든 것들을 하나로 같이 하면서 늘 달리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생성의 일이야말로 예술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 안에서 그에 갇혀서가 아니라 이를 넘어 늘 달리 새로움 앞에 서는 일 그것이 예술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로 융해하며 새롭게 자신을 만들며 나오는 힘을 갖는 일이야말로 예술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을 논하는 이유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하며 늘 달리 새롭게 만들며 나오는 예술이 삶이 되고 삶이 예술이 되기 위한 일은 바로 교육의 참된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교육의 예술과 예술교육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먼저 교육의 예술이라 함은 특정한 분과 학문으로서의 예술기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육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한다는 교육철학을 말한다면, 예술교육은 예술을 통해 늘 달리 자신을 실현해 가는 자기 삶을 능동적 주체를 만들어 가는 일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예술을 감정과 연결하며 이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기술과 그의 특별한 능숙함으로 여기면서 이이를 가르치고 습득하는 기능적 차원에서 예술교육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탓에 예술교육의 본질이어야 하는 인격과 연관하여 존재를 생성해 가는 일은 뒷전이고 오직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술을 습득하거나 누구에 의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기능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예술교육의 진정한 본질과 내용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자신을 생성해 가는 힘을 습득해 가는 것 그것이어야 함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누가 뭐라 해도 예술교육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은 기능을 습득하는 분과학문의 하나로 전략되어 예술의 참다운 힘을 상실하고 만다. 예술이 예술로서의 참다운 힘을 상실하게 되면 그것은 무의미한 하나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날 우리는 현장 학습이란 이름하에 체험학습을 강조하지만 새로운 존재실현으로 이어지는 예술적 경험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지식학에 머무르며 이를 공고히 하거나 아도르노의 지적처럼 문화산업의 확대에 기여하는 역할로 전략되어 버린 측면은 없는가.

 

 

< 예술적 경험의 참다운 힘은 현장/체험 학습을 토해 의도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예술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

 

 오늘 우리가 예술을 논하고, 예술을 통해서 이루고, 예술에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 예술이 가지는 힘을 통해 경제적 동물이 되어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우리에게 인간됨을 회복하고, 파편화 되어가는 삶을 온전히 회복하며, 기계화 되어 가는 사회에 다시 생명력을 다시 불어 넣어 모두가 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가고자 함이 아닌가. 더욱이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고 가치가 상충되고 이해가 달리하는 세상에서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융해하며 늘 달리 새로움을 창출하는 생명력 있는 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 예술에게 부여된 역할은 아닌가. 정치, 법, 도덕이 구현하지 못한 그것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세상을 구현코자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에게 과연 그런 힘이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경우 예술은 하나의 기능학으로 전략하고 만다. 그런데 하나의 분과 차원에서의 기능학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예술에 대한 오해와 곡해 그리고 전도된 상황에 대해 관심을 기울리지 못하고 있다. 예술조차도 다른 분과 학문처럼 경제적 논리로, 가치로, 효율성과 기능성만을 저울질하며 이 시대가 예술에게 부여한 귀한 역할을 방기하고 있다면 것인가. 헌데 우리는 이미 그러한 전조현상을 수없이 목격한다.

 

 예술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담을 수 없는 인간의 아픔, 상처, 분노, 고통 등까지도 승화해 가는 건강한 힘이 있음에도 예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이끌기도 한다. 참다운 예술은 이것들을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간다.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로댕의 칼레의 시민처럼,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예술은 흔적을 지우고 덮고 가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것으로 있는 모든 것을 용기 있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금 여기를 다시금 새롭게 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지나간 시간 안에 있었던 일을 과거의 일로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일로 다시 일으켜 세우며 우리로 하여금 말을 건네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시간을 찢고 맨 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지난 일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때만이 인류는 지난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이 살아 움직이지 않는 사회에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예술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모아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교육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방향 그리고 지원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관주도 하의 물량적 지원도 때론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 모두가 이에 대해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터로서의 이 공간을 투자의 대상이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관점에서부터 다 같이 살아가야할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에 따른 합의가 도출될 수 있어야 한다.

 

 거대한 상품시장으로 변한 도심, 이미지를 소비하며 환상에 갇힌 사람들, 자원의 고갈과 환경난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분쟁과 갈등과 테러, 때문에 미래를 상실해 버린 사람들, 여전히 성공신화를 쫓으며 자신을 상실해 가는 분열증 환자들. 이들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 갈 것인가. 가속화되는 온난화 앞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핵발전소의 건립과 경제성장을 부르짖을 것인가. 예술은 이와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나의 이기심에 따라 좀 더 높은 건폐율과 용적율을 요구할 것인가. 우리는 이 삶의 터를 어떻게 재편해 갈 것인가. 일생동안 집 한 채를 구하기 위해 애쓰다 결국에는 내가 기피한 장례식장, 화장터, 묘지에서 사그러져 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을 위해 그토록 힘을 빼는 사람들, 그들에게 구원은 무엇일까. 사리지는 것을 기억하고, 죽어가는 것을 살리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창조적 상상력으로 지금 여기를 유의미하게 우리는 바꾸어 갈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나의 문제이자, 우리가 함께 전개해 가야할 예술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러스트_프롬로즈 윤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