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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과 예술을 ‘자연적 성장의 육성’으로 되돌리기
  • 심광현 _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교수, 미학/문화연구
  • 2015.12.29
16호 곁봄 | 칼럼
교육과 예술을 ‘자연적 성장의 육성’으로 되돌리기
 
심광현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교수, 미학/문화연구

 

  태어나 땅에 떨어져 휘청거리다가 몇 초 안 되어 엄마와 함께 달리기 시작하는 얼룩말 새끼처럼 동물은 부모의 돌봄 없이 환경과 대면하면서 스스로 살아나간다. 간혹 수 개 월에 걸쳐 부모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동물들도 있지만 그 시간이 인간처럼 긴 것은 아니다. 그에 반해, 인간은 몇 년 간에 걸친 부모의 돌봄만이 아니라 십 수 년에 걸친 교육 과정을 통과해야만 복잡한 사회 환경이 요구하는 일에 적응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람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그 기간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 삶과 교육의 관계가 전도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학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활기차게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목적”(화이트헤드)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제도화된 교육의 기준에 거꾸로 삶을 맞추어야 하는 전도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교육은 세대간의 돎봄을 통해 자란다.>

 

 개인의 삶과 제도화된 문화의 관계에서도 이런 전도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본래 문화란 <자연 선택>에 의한 동식물의 진화를 인간의 필요에 맞게 촉진하기 위한 <인위적 선택>의 방법(know-how)을 암묵적 혹은 명시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의 축적을 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 문화연구의 시조인 레이먼드 윌리엄즈는 농사(cultivation)에 어원을 둔 문화(culture)를 “자연적 성장의 육성”(tending of natural growth)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란 곧 인간 특유의 장기간에 걸친 자연적 성장 과정을 부모와 사회구성원들이 축적해 온 다양한 '노우-하우'로 보충하고 육성해 나가는 교육과도 본래 같은 뜻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경과에 의해 문화가 거대하게 축적됨에 따라 문화와 개인의 삶의 관계에서도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는 현상이 발생한다. 제도화된 문화가 요구하는 특정한 기준에 개인의 삶을 끼워 맞추어야 하는 전도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리는 과정에서 이런 전도 현상은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교실 붕괴’, ‘학교 붕괴’ 현상이 심화되고, ‘교육이민’과 ‘홈스쿨링’, 대안학교가 증가하게 된 것이나, 2010년대에 들어와 ‘진보교육감’이 늘어나고 ‘혁신학교운동’이 확산된 것도 이런 전도 현상의 부정적, 긍정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정책과 교육제도는 전체 사회 시스템의 구조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사회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이런 전도 현상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또한 사회시스템이 변화한다고 해도 교육제도를 수선하고 교육내용을 바꾸어 나가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데 반해, 개개인들은 하루하루 스스로의 삶을 꾸려 나가야 한다. 

 

  최근 들어서는 신자유주의 세계체계가 위기에 처하면서 낡은 사회시스템 자체도 한계에 이르고 있어, 교사와 학생은 물론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시스템 붕괴의 위기 속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교육과 문화의 의미와 목적을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자연적 성장”을 무시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제도화된 명시적 지식의 “육성”만을 강조해온 기존의 교육과 문화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에, 각자가 자신의 “자연적 성장”을 촉진해 줄 새로운 “육성”의 방법을 찾아나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각자가 어떻게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기존의 지식과 정보들을 잠시 괄호 쳐 놓고, 자연적 성장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각자의 몸을 온전하게 사용하는 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마음의 사용을 위해 종교에 입문해야 한다고 생각하듯이 몸의 사용을 위해 예술과 체육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전문적인 예술교육은 눈과 몸을, 손과 몸을, 머리와 몸을 별개의 기관으로 간주하여 미술교육과 음악교육과 무용교육과 연극교육과 영화교육과 문학교육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체육교육 역시 구기 종목, 육상, 수영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이런 분리는 모든 감각과 사고 기능을 세분하고 전문화해 온 근대적 분과학문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눈과 손과 머리의 역능은 분리된 방식이 아니라 오직 통합적 성격의 몸을 매개로 해서만 제대로 증진될 수 있다. 우리 몸과 감각과 사고는 나열식 분리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시각은 운동감, 촉감, 기후와 압력, 속도감과 같은 복합적 체성감각의 매개 없이는 제대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몸을 낮추거나, 드러눕거나 혹은 물속이나 높은 곳에서 보면 평소 우리가 익숙한 풍경이 실은 특정한 시점(‘눈높이’)를 전제로 한 것임을 알 게 된다. 이래서 몸은 ‘보기’의 전제이자 출발점이다. 

 

<자율학습모임은 대상자들이 스스로 학습하는 과정을 지원하고 그 과정에서의 실패와 결과물 없음을 응원한다.>

 

  화이트헤드는 로맨스 단계-정밀화 단계-일반화 단계라는 세 단계를 나선형으로 진전시켜나가는 것이 가장 적절한 교육방법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무릇 모든 로맨스가 “온 몸으로 느끼기”에서 출발하여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하듯 교육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예술교과는 미리 제시된 표준에 맞추어 ‘잘 그려야’, ‘잘 연주해야’, ‘잘 불러야’ 한다는 요구에 의해 자연스러운 ‘온 몸의 느낌’을 차단하거나 위축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럴 경우 자기 몸을 사용한 자연스러운 소통의 즐거움에 대한 로맨스는커녕 ‘예술’에 대한 거리감과 소외감만 커지기 쉽다. 대다수 성인들이 예술에 대해 낯선 방관자로 머물거나 수동적이 되는 이유도 이런 전문 교육의 산물이다. 문화 환경이 복잡해질수록 모두가 ‘몸치’로 전락해 가고 있는 셈이다. 이런 과정의 심화는 우리 자신의 몸과 시각은 물론 타인의 몸과 시각을, 나아가 자연 자체를 ‘대상화’하고 ‘착취하고’, ‘상품화’하여 자연적 실존 자체를 파괴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일조해 왔다. 

 

  환경오염과 같은 물리적 위험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에 사회 전체가 경각심을 갖고 적극 대처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감성적·신체적 황폐화와 같은 문화적 위험은 눈에 보이지 않아 더 위험하다. 경쟁력 제일주의로 치달아 온 한국사회는 세계 어느 곳보다 이런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이런 실존적 위험에 무감각해질 경우 타자와의 공생과 협력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적 가치, 자연과의 공생을 지향하는 생태주의적 가치, 양성의 차이와 평등을 추구하는 여성주의적 가치는 머리로는 동의해도 몸으로는 체화되지 않기 마련이다. 지식교육만이 아니라 예술교육 자체도 자기 자신과 타자의 실존적 존재감을 “온 몸으로 느끼는” 일에서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적된 사회적 피로를 풀어주고, 낡아빠진 지각을 새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흔드는 일부터, 지식과 정보의 창을 열어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일부터, 나를 감싸고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는 숲과 하늘과 우주를 온 몸으로 다시 느끼는 일부터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로맨스를 하듯 “온 몸으로 느끼기” 시작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과 타자와 자연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스스로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각자가 온 몸으로 느끼면서 자신의 몸을 온전하게 사용하기 시작할 때 교육과 문화와 예술은 “자연적 성장의 육성”이라는 본래의 궤도로 다시 올라서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궤도를 이탈해온 예술과 문화와 교육과 사회의 탈선을 바로 잡는 일은 바로 이렇게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_프롬로즈 윤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