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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관 _시인
  • 2015.12.29
16호 곁봄 | 칼럼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시 쓰기!
황규관 / 시인

 

 우연찮게 내가 몸담고 있는 출판사에서 경북 칠곡의 할머니들이 문해교육(文解 敎育)을 받으면서 쓴 시들을 모아 내게 되었다. 『시가 뭐고?』라는 시집이다. 지인의 소개로 시작된 것이었는데 출간 작업이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매우 핵심적인 문제를 먼저 논의했다. 처음에는 할머니들이 직접 쓴 자료의 원본을 묶어 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독자들을 위해 활자화시키되 틀린 철자법을 그대로 살려두자고 한 것이다. 할머니들의 현재 모습과 표현을 날것으로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시가 뭐고? / 강금연 외 80명 / 삶창>

 

 물론 그 뒤에 확인된 바로는 현장교사들이 칠곡 지방만의 완고한 언어는 조금 수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듣고 보니 칠곡 지방 특유의 언어를 고집할 때, 최소한 나에게는, 시가 가져야 할 음악성이 사뭇 달라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표현한 칠곡 지방의 언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지만, 시가 토속어 사전인 것은 아니다. 

  

 적잖은 작품 중에서 선정위원들이 추려 보내온 작품들을 편집 전에 읽으면서, 새삼 예전에 내가 잠깐 활동했던 노동자문학회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은 시든 소설이든 거의 대부분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와 각종 문화센터를 통해 배우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얼마나 문학작품을 획일화시키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지난여름 신경숙의 표절 사태 때, 황석영이 이런 폐단을 거론한 것은 전혀 뜬금없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문창과 출신들과 대학교수들이 벌떼처럼 그를 비난하고 나섰지만 말이다.

 

 심보선은 ‘시와 정치’를 논하던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학적 평면 위에서 천상의 천사들을 올려다보았고 그들이 언젠가 거대한 진실의 날개로 지상의 비참을 덮어 주리라는 난망한 꿈을 꿔 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작 다른 평면 위에서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다른 존재들을 외면해 왔다. 수많은 익명의 힘들이 ‘지게꾼-되기’, ‘무식한 시인-되기’, 그 외의 다양한 ‘딴사람-되기’를 감행해 온 길고 오랜 모험들에 대하여 입을 다물어왔다.”(「‘천사’에서 ‘무식한 시인으로」)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에 기댄 이 말의 전제에 대해 조금 상세한 설명이 있어야겠지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문학장 안에서 “문학과 현실, 문학과 비문학의 분리”를 확고히 한 상태에서 논의되는 ‘문학의 정치’의 한계는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심보선은 “수많은 익명의 힘”의 예로 충북 음성의 할머니들의 시 쓰기를 든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짚어봐야 할 ‘예술교육으로서의 시’ 혹은 ‘시적-인간’의 탄생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암시해 준다. 

 

 ‘시 쓰는 모든 이는 시인’이라는 명제가 기성 시인들에게는 미학적 나태로 보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명제를 내걸지 않는 한 모든 시 쓰기 교육은 문학제도권 안에 들기(등단을) 위한 수련 과정으로 전락할 위험을 갖게 된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시 쓰기 교육은 이런 수련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등단을 위한 개인 과외가 등장한 것도 오래 전 일이며, 그로 인해 등단작이 표절 시비에 휩싸이는 일도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 쓰는 모든 이는 시인’이라는 명제는 그럼 섣부른 대중추수주의일까? 아니면 등단 장사를 위한 광고 카피일 뿐인가? 사실 이 명제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준다. 시에 대한 충분한 철학적인 질문이기도 하지만 얄팍한 상업 문구가 될 개연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이 질문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고 질문 자체를 버려버리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차라리 타락한 질문의 내포를 재충전하여 활성화하는 일이 도리어 정치적이며 윤리적이다.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은 시인, '시가 뭐고?'는 80명의 칠곡군에 사는 할매들이 직접 엮은 시이다.>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시 자체(poetry, 이하 ‘시’)와 작품화된 시(poem,이하 ‘작품’)를 일단 따로 떼어놓고 사고하는 일이다. 작품은 시가 몸을 입어(언어화 되어) 우리 앞에 현전한 사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작품은 언제나 시에게 그 자리를 위협받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시 는, 심보선의 말을 빌리자면, “천상의 천사”가 아니라 언제나 움직이고 변화하는 현실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작품을 선별하는 초월적 기준, 즉 이데아를 따로 갖는 게 아니라 지구의 맨틀처럼 언제나 그 근거를 무너뜨리면서 우리의 삶 안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들뢰즈는 “내재성의 평면”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시의 근거가 와해되고 재생성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구조 속에서는 현실화된 작품의 자리는 언제나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시간의 풍화를 견딘’이라는 작품에 대한 수식어가 탄생하는데, 시간이 풍화를 견딘 작품은 그만큼 삶에 내재된 시의 발생학적 원리를 적확하게 혹은 풍부하게 품고 있다는 뜻으로 번역해도 된다. 다시 말해서 작품은, 우리 삶에 내재된 진실을 가급적 많이 그리고 깊이 표현하고 있을수록 위대해진다. 김수영이 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리얼리티’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 철학적 함의를 이렇게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교육으로서의 시’는 시 쓰기 과정을 통해 시 쓰기 주체의 삶을 얼마만큼 풍부하게 표현하게 하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된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은 시가 갖는 특징인데 그것은 바로 음악성이다. 그리고 그 음악성은 언어를 외피로 삼는다는 점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난감해 하는 점이 바로 이 음악과 언어의 결합관계일 것이다. 콧노래는 누구나 부를 수 있고, 산문적인 언어는 언제든 뱉어낼 수 있다. 그러나 시에 값하는 언어는 쉬운 일이 아니며 바로 이 지점에서 ‘작품의 위계’라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모두에서 언급한 『시가 뭐고?』에 실린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이 ‘시에 값하는 언어’가 아주 간결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 쓰기 교육’의 요체는 사실 표현 교육이다. 무엇을 표현하는가? 바로 쓰는 주체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들여다보면 우리 안에는 어떤 시간의 지층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그것은 기억이 비선형적인 뭉텅이를 이룬 채 쌓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시간은, 그 과거 중 일부와 공존하는 미래를 의미한다. 역으로 현재는 미래를 향한 꿈에 의해 불려나온 과거의 일부이기도 하다. 즉 시를 쓰는 행위는 과거의 지층이 뿜어내는 삶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서 시 쓰는 주체는 미래로 자신을 투신한다. 

 

 『시가 뭐고?』에 실린 「농가 먹어야지」의 전문은, “마늘을 캐 가지고/아들 딸 다 농가먹었다/논에는 깨를 심었는데/검은깨 농사지어서/또 다 농가먹어야지/깨가 아주 잘났다”이다. 이 시를 쓴 박차남 할머니는 올해 85세이다. 이 시에서 할머니는 평생을 걸쳐 자신이 반복적으로 행해 온 ‘농가 먹는 일’을 간결하게 표현하면서 다시 또 “농가먹어야지”라고 읊조리는데 그 “깨가 아주 잘났다”. 

 

<'어른세대'는 테크니컬한 지식 축적이 아닌 자연스런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박차남 할머니의 과거 삶과 내일의 삶을 느낄 수 없는 이는 드물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할머니의 세부적인 삶의 목록들이다. 시는 그러나 세부적인 삶의 목록에서 직접적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목록들이 이루는 지층과 지층 사이의 힘에서 시는 시작되며 어떤 직접적인 계기를 통해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시를 쓰는 행위는 미래에 관계된 일이기도 하다. 시적-인간은 이렇게 현재에서 과거를 경유해 미래를 느낄 때 탄생한다. 물론 이는 직관적으로 이루어지지 지성적 구축에 대한 은유가 아니다.  

 

 오늘날 시가 삶의 국면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생략한 채로 씌어진 ‘잘 쓴’ 시가 과연 ‘좋은’ 시인지 그리고 얼마나 시간의 풍화를 견딜지는 두고 볼 일이다. 무엇보다도 시 쓰기는 ‘과거 중 일부와 공존하는 미래’로서의 현재에 충실한 순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작품을 쓰는 순간에는 다른 계산과 간지가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그 순간은 자기존재에 점등이 되는 기쁨의 시간이다. 설령 문학제도 안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쓴다 하더라도 최소한 작품을 쓰는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이게 니체가 말한 “예술을 삶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일러스트_프롬로즈 윤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