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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길 _16호 편집장 .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
  • 2015.12.29
16호 곁봄 | 칼럼
다시, 문화예술교육을 위하여
김종길 / 16호 편집장 .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

 

 문화예술교육 10년이라네요. 2005년 문화예술교육법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탄생을 두고 하는 얘기겠죠. 하지만 저는 2003년에 이미 경기문화재단의 기전문화대학에서 문화예술교육을 처음 경험했어요. ‘첫 경험’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은 대학에서조차 느낀 바 없는 ‘황홀감’ 그 자체였죠. 가슴으로 알고 머리로 이해하면서 가는 길이었으나, 그것이 문화교육인지 예술교육인지 아니면 교육예술인지 다툼이 끊이지 않은 날들이기도 했지요. 다툼은 언술의 술수이고 논쟁이어서 서로 밀리지 않으려고 서로들 애썼으나, 저는 그런 담론의 긴장 사이에서 빛나는 문화예술교육의 파릇한 ‘알몸’을 어렴풋 보았죠. 

 

 

스스로 낳는 지혜

 

 함석헌 선생은 「얼․혼의 참을 증명하는 살․몸」이라는 글에서 “살․몸은 얼․혼의 참을 증명하는 도장이다. 내 살 내 몸이 닿지 않은 것, 내 피 내 맘이 배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저는 제가 얼핏 보았던 그 ‘알몸’의 ‘얼․혼’을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찾고 싶었죠. 2005년 9월 임영인 신부가 서울역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성프란시스 대학을 만들 때 참여한 것은 그런 이유예요. 서른여덟의 젊은 예술비평가에게는 너무나 가슴 벅찬 순간이었고 또 그만큼 무겁고 험난한 길이기도 했죠. 왜냐고요? 그 인연 때문에 결국 10년을 인문학 교육자로 살아야 했거든요.   

 

 성프란시스 대학은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회비평가인 얼 쇼리스(Earl Shorris, 1936~2012) 선생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 과정인 ‘클레멘트 코스’를 모델로 한 것이었죠. 선생은 1995년 뉴욕주립교도소에서 살인죄로 8년째 복역 중인 20대 여성 재소자와의 면담에서 큰 충격을 받아요.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여성은 “정신적 삶이 없었기 때문이죠.”라고 했거든요. 다시 “정신적 삶이라뇨?” 묻자, “왜 있잖아요. 독서나 강의 박물관 같은 거 말이에요!”라고 대답하죠. 그 후 선생은 노숙인, 마약중독자, 재소자, 전과자 등을 대상으로 한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을 만들게 돼요.

 

<얼 쇼리스>

 

 우리는 성프란시스 대학 1기생들의 수업이 끝나갈 즈음 얼 쇼리스 선생을 초대해 비공개 워크숍을 진행했어요. 선생은 탁월한 강연이 아닌 산파술(産婆術, 정확히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로 노숙인 분들과의 대화를 이끌더군요. 흥미진진했어요. 그렇게 재밌는 수업은 처음 봤거든요. 워크숍이 끝나고 여쭈었어요. 왜 산파술이어야 하냐고. 선생은 대화를 통해 서로가 무지를 자각할 수 있고 또 그 자각으로부터 스스로 새로운 지혜를 낳는 것이 인문학 수업의 참 방법론이라고 강조하더군요. 그 때서야 깨달았죠. 문화예술교육의 교육론은 누군가에 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문화교육이니, 예술교육이니 하는 것들의 ‘기능교육’과는 아무 상관없이 문화예술교육은 ‘교육의 문화화/예술화’에 있다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문화화/예술화의 고갱이는 문화민주주의가 그렇듯이 ‘스스로 새로운 지혜 낳기’를 위한 서로주체들 간의 참된 대화에 있다는 것을.       

 

 

<얼 쇼리스 '자기 삶에서 스스로가 실천적 주체가 되어라'> 

 

 

표류하는 꼴

 

 그런데 과연 서로주체들 간의 참된 대화가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제가 16호에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결심했던 이유예요. 예술론도 없고 교육론도 없이 문화부의 일자리 정책으로 전락한 ‘예술강사 제도’와 몇 가지 기획사업들이 문화예술교육의 본질은 아니잖아요. 교육론으로서의 철학이 부재하니 정책이든 사업이든 적절한 방향타 없이 표류하는 꼴이 현재의 문화예술교육이 아닐는지요. 저는 다시 ‘현장에서’ 시작해야 할 문화예술교육의 철학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삶의 실천적 테제로서 ‘현장’은 문화예술교육이 뒹굴어야 할 마당이고, 지켜야 할 첫 번째 율법이어야 하니까요. 현장어로 쓰지 못하는 교육론은 껍데기에 불과하죠. 

 

 알몸이 없는 껍데기는 ‘몸살’도 아녜요. 그건 단지 어리석은 거짓과 환멸과 배반과 탐욕의 찌꺼기일 뿐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지식이나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당당히 사전에 정의하고 있어요. 저는 사람으로서의 품격인 ‘인격(人格)’을 수양하기 위해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람됨의 바탕을 이루는 ‘됨됨이’를 고양시켜야 한다고 봐요.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들지 말고, 샘(교사)과 물(학생)이 서로 됨됨이를 드러내도록 배움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거죠. 우리는 배움을 통해서 ‘앎’에 이르고 결국 ‘사람다움’의 품격을 갖게 될 거예요.   

 

 

얼빛으로 밝은 참나 

 

 저는 사람이라는 말이 ‘살[生]’과 ‘앎[覺]’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요. ‘살앎’을 부르기 쉽게 ‘사람’으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살앎의 한자어는 ‘생각(生覺)’이에요. 싱싱한 깨달음이라고 풀 수 있죠. 혹은 늘 깨닫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제가 굳이 앎을 ‘지(知)’로 표기하지 않은 이유는 앎이라는 건 단순히 지식으로서 ‘아는 것’에 있지 않고 ‘깨닫는 것’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에요. 깨달아서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이니까요. 

 

 ‘생각’의 본래 한자어는 ‘生角’이죠. 직역하면 싱싱한 사슴뿔이에요. 우리가 가끔 ‘생각났다!’고 외칠 때는 머리 위에 ‘싱싱한 사슴뿔이 자랐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왜 사슴뿔일까요? 아주 오래전부터 북방계 샤먼들은 사슴뿔을 썼어요.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자이자 신의 대리자로서 샤먼은 큰 사슴뿔로서 그의 권능을 드러냈죠. 그것은 또한 제사장만이 갖는 권위이기도 했어요. 상징으로서의 사슴뿔은 무서운 공포가 아니라 성스러운 ‘빛/번개’예요. 신은 번개처럼 오시는 빛(얼)이니까요. 석가모니는 ‘얼빛’으로 환하게 깨달아 부처가 되었고 사슴벌[綠野園]에서 첫 설법을 전했죠. 얼빛의 존재로서 사슴뿔 샤먼이 된 거죠. 

 

 동학에서는 ‘시천주(侍天主)’해야 조화를 이룬다고 했는데, 그 뜻은 ‘한 얼을 내 안에 모셔라’예요. 신명(神明)은 몸에 얼빛이 크게 밝은 상태를 말해요. 다석 유영모 선생은 얼빛으로 밝은 참나가 ‘얼나’라고 했지요. 아름다울 ‘미(美)’는 큰(大) 뿔(羊:양)을 뜻하고, 아름다움의 어원은 ‘앎’에서 비롯하며, ‘아름답다’의 ‘아름’은 ‘알다’, ‘안다’와 같은 말이죠. 아름답다는 본래 ‘나답다’로 해석하기도 하구요. ‘알음(知)’을 깨우치는 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이고 그 본질에 ‘나다움’ 즉 ‘사람다움’이 있다는 얘기예요. 

 

 최근 삶창에서 펴낸 『시가 뭐고?』를 보면서 ‘사람다움’이란 정말 지식교육을 통해서 길러지거나 터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또 깨달았죠. 자,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글조차 쓸 줄 몰랐던 할머니들이 시를 쓰게 되었을까요? ‘시인 인간’의 탄생이 과연 지식교육과 기술교육 따위로 가능키나 한 일일까요? 할머니들의 삶은 ‘교육’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논과 밭에서, 자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아버린 아름다움에 있었을 거예요. 그것이 할머니들을 ‘나답게’ 만들었던 거죠. 할머니들의 삶에 결국 시가 진득하게 배어 있어서 어느 순간 진물이 나오듯 자연스레 흘러나온 거란 얘기예요. 그러니 얼빛으로 깨달아서 신명이 난 삶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육철학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시가 뭐고? / 강금연 / 삶창>

 

 

 

새로 시작하기 위해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1845년 3월이 다갈 무렵 월든이라는 작은 호숫가에 단돈 28달러로 오두막을 짓기 시작하죠.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어요. 그곳에서 그는 2년 2개월 2일 동안 살았죠. 그는 『월든』에서 숲으로 들어간 이유를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우리 모두에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고 외치면서 자연인으로 살게 돼요. 그의 다른 글 「산책」에서는 그가 자연인으로 살면서 어떤 체험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와요. “나는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가장 어두운 숲, 그리고 가장 탁하고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도시인들에게는 가장 음산하게 느껴지는 늪을 찾는다. 나는 성스로운 장소, 즉 지성소로서의 늪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힘이, 자연의 정수가 존재한다.”

 

<월든 / 헨리 데이비스 소로 / 오두막>

 

 새로 시작하기 위해, 소로의 삶을 반추하는 것은 그의 삶이 우리의 통념을 뒤흔드는 혁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혁명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는 경쟁에 뛰어들어서 이기고 성공하는 사회적 삶에 반기를 들었으니까요. 그때보다 훨씬 더 막강해진 경쟁사회, 소비사회, 중독사회, 위험사회에서 우리는 멈춰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해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숲에서 나온 뒤에 『시민 불복종』(1849)을 발표했어요. 간디의 비폭력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죠.

 

 그런데 우리는 과연 현실이든 비현실이든(마음속이든) 소로의 오두막 같은 공간을 가지고 있나요? 숲 속 지성소는 또 어떤가요? 꼭 숲이어야만 하는 거냐고요? 아녜요. 지성소는 오두막이 아니어도 되고 숲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마음이니까요. 말로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는 사막일지라도 충분하다는 걸 증명해 주죠. 말로 모건은 문명인을 무탄트(돌연변이)라고 부르는 호주 원주민 참사람 부족(오스틀로이드라고 불림)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요. 이때 돌연변이라는 뜻은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존재’예요. “신이 최초로 창조한 사람들이라 불리는 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모든 생명체가 형제이며 누이”라고 믿는다고 해요. 그래서 “문명의 돌개바람과 함께 몰려와 어머니 대지를 파헤치고, 강을 더럽히고, 나무를 쓰러뜨리는 문명인들을 보면서 원주민들은 그들을 ‘돌연변이’” 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문화예술교육은 본래적 인간에 대한 사유이며 실천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돌연변이의 삶을 내려놓고 삶의 정수를 찾으려는 일말의 노력이 저는 문화예술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자, 그러니 우리 모두 프로그램을 잠시 멈추고 해달(明)을 마음에 띄워 보세요. 얼빛으로 밝은 참나가 보이나요?  

 

 

<얼 쇼리스 '지혜로움은 뛰어난 스승이 아닌 우리 자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