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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직 _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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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넘봄 | 서평
교육철학 없는 문화예술교육을 넘어
고영직 / 문학비평가

 

 
함석헌, “비전 없는 백성은 망한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교육은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도약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그동안 문화예술교육은 2005년 문화예술교육지원법 제정과 함께 출범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개원 이후 정부 주도 정책사업으로 추진되면서 급속도로 양적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제는 질적 도약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병목 현상에 처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진단들이 제출될 수 있겠으나, 문화예술교육의 철학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으며 오직 양적 성장을 꾀하는 데 전력한 데에도 그 이유가 없지 않다. 정책사업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을 ‘추진’하는 것은 응당 필요하지만, 이제는 문화예술교육이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문화적 이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요청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은 ‘비전(vision)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한다. 함석헌 선생의 이러한 묵시록적 예언은 지금 여기 학교 안팎의 교육 현장에서 ‘배운 괴물’이 된 ‘착한 아이들의 역습’ 현상을 자주 목격할 수 있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간신히 생존한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가 “괴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에는 그들의 수가 너무 적다. 가장 위험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다”라고 말한 것도 나치라는 권위(權威)의 명령에 끝까지 따르려는 보통 사람들의 극단적인 자발성을 비판하고자 한 발언이었다. 교육과 사회의 분리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문화이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현직 교사인 정은균 선생(군산 영광중)이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에서 ‘아이들은 배움이 아니라 가르침에 저항한다’고 역설하며, “수업 고민을 함께 나누는 교사들이 늘고 있다. 교사의 교수법보다 학생의 배움에 초점을 맞추는 수업 연구 동아리가 많아졌다”고 진단하는 발언에 작은 희망을 갖게 된다. 학교 안팎에서 진행되는 문화예술교육의 질적 내실화를 위해 수업연구 역량의 강화와 더불어 수업비평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웹진 《아르떼365》에 쓴 「관행을 깨는 수업혁명을 위하여」(http://www.arte365.kr/?p=49111)라는 칼럼에서 그런 주장을 한 것도 나의 이러한 문제의식과 통한다. 
협력적․창의적 문화예술교육의 미래를 위한 교육철학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점에서 성장이란 경험의 연속적인 갱신을 의미한다고 역설한 미국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와 함께, 아동의 발달과 협력이라는 관점에서 근접발달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이라는 이론을 제안하며 협력과 관계의 교육학을 숙고한 러시아 심리학자 비고츠키(1896-1934)의 교육사상을 깊이 연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의 교육사상은 철저한 민주주의, 역량 중심의 교육, 학교 교육과정의 재구성이라는 목표 아래 추진되는 최근의 혁신학교운동의 이론적 뿌리를 이루고 있는 교육철학자들이다. 서용선의 『혁신교육 존 듀이에게 묻다』(살림터 2012), 진보교육연구소 내 비고츠키교육학실천연구모임이 출간한 『관계의 교육학, 비고츠키』(살림터 2015), 『비고츠키 생각과 말 쉽게 읽기』(살림터 2013) 같은 연구서들은 두 거장의 교육학이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 어떤 유의미성을 갖는지 잘 요약한다. 특히 비고츠키의 경우 2003년 유로(EURO)교육위원회가 핵심역량 중심의 교육을 표방하며 그의 이론을 교육정책에 적극 도입했고, 이미 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 등 북유럽에서 교육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협력적·창의적 문화예술교육의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우리나라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두 거장의 교육철학에 대한 이해와 적용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존 듀이, ‘어떤 하나의 경험’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는 ‘행함으로써 배운다’(Learning by Doing)는 모토로 실험학교를 운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1894년부터 1904년까지 시카고대학에서 십년 간 진행된 교육실험은 『경험과 자연』(1925), 『경험으로서의 예술』(1934), 『경험과 교육』(1938) 같은 저술들에서 구체화된다. 존 듀이 교육학의 핵심 원리는 책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성장이란 경험의 연속적인 갱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배움은 경험의 재구성에서 시작된다’는 명제가 그것이다. 
존 듀이가 말하는 경험은 우리가 생각하는 체험과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존 듀이가 말하는 경험을 체험과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어에는 경험과 체험 두 가지 현상을 모두 경험(experience)이라는 하나의 개념에 뒤섞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사회학의 쓸모』(2015)에서 강조하듯이, 경험은 우리가 세계와 교류하면서 ‘나에게 생기는 일(happens to me)’을 의미한다면, 체험은 우리가 세계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살면서 내가 겪는 일(I live through)’을 의미한다. 경험은 객관성의 상태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체험은 분명하고도 명시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존 듀이는 『경험으로서의 예술』(원제 : Art as Experience)에서 경험 속에서 작용하는 예술의 성격, 즉 예술적 경험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경험의 구조와 성격을 고찰한다. 존 듀이는 “일상적 삶이 곧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사유를 시작하는데, 결론은 예술은 아름다운 경험이 된다고 규정하는 데에 있다. 일상생활과 미적 경험을 분리하지 않고, 연속성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경험은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는 결과이고, 상징이고, 보상이라는 것이다.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경험과 환경과의 교섭을 강조(제1장)하며,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행함(doing)’과 ‘당함(suffering)’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 때문이다. “경험은 자연 안에(in)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지니고(of) 있다. 경험되는 것은 경험이 아니라 자연이다”(제1장)라는 진술에서 자연주의적 경험론에 기초한 존 듀이의 교육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경험으로서의 예술』은 모두 14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기존 번역본은 1장에서 3장까지만 번역되었고, 최근(나남 2016.4.30)에야 완역본이 출간된 탓에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또 하나 기존 번역본의 경우 경험을 ‘하나의 경험(an experience)’이라고 번역했는데, 존 듀이가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질지 모르는 특정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어떤 하나의 경험’이라고 번역해야 마땅하다(서용선)고 한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경험에는 하나의 통일성이 있어, 경험에 ‘그 식사’ ‘그 폭풍’ ‘우정의 결렬’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러한 통일성의 존재는 경험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경험 전체에 충만한 하나의 단일 성질로 구성되게 된다. 이러한 통일성은 정서적이지도 않고 실천적이지도 않고 또한 지적이지도 않다.” _ 제2장
 
그렇다면 경험과 교육은 즉각적으로 동일한 것인가. 존 듀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결국 경험을 어떻게 조합하고 통합하느냐가 교육을 결정짓는다고 덧붙인다. 존 듀이가 한번에 끝나지 않고 여러 번 이루어지기 때문에 ‘재’구성(reconstruction), ‘재’조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성장이란 경험의 연속적인 갱신을 의미한다고 한 존 듀이 교육학의 맥락이 이 점에 있을 것이다. 그가 “미적인 것의 적(敵)은 … 인습에만 의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런 관행적인 교육에서는 이른바 ‘섬광’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보라. “섬광이 암흑의 세계를 비출 때 대상의 순간적인 인지(recognition)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인지는 시간 속의 단순한 하나의 점이 아니다. 인지는 길고 느린 성숙의 과정 중에서 최정점이다.”(제2장) 
존 듀이 교육학에서는 고통 당함이라는 의미가 퍽 의미심장하다. 그는 모든 경험에는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행함(doing)뿐만 아니라 고통 당함(suffering)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투쟁과 갈등 같은 ‘고통’의 경험이 배움이 되는 인식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그의 생각을 대변한다. 통증이 없는 문명을 의미하는 소위 무통문명(無痛文明)의 상태에서는 진정한 경험은 말할 것도 없고, 배움이 이루어지는 경험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모든 국민이 부자 되기를 꿈꾸는 이상한 나라의 현실에서 ‘고통 당함’을 긍정한 그의 철학은 재음미되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존 듀이 (예술)교육학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관점은 학교는 이미 ‘작은 사회(micro society)’를 이룬다는 전제라고 할 수 있다. ‘학생 다음에 시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 듀이가 창조적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성(citizenship) 교육을 강조한 측면이 여기에 있다. 서용선은 존 듀이의 경험 이론, 탐구 이론, 민주주의 이론을 ‘시민성 교육’의 관점에서 유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존 듀이의 민주주의 이론은 윤리적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 생활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창조적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의 차원을 갖는다. “단순한 정부 형태가 아닌 보다 근본적으로 공동생활의 양식이고, 경험을 전달하고 공유하는 방식”이라고 존 듀이는 민주주의를 정의한다. 이 관점을 수용하면, 학생들이 생활 속에서 갖게 된 경험으로부터 탐구하면서 창조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교육과정 설계와 운용이 중요하다. “경험을 전달하고 공유하는 방식”이야말로 (예술)교육이 아니던가. 존 듀이 교육학을 자신의 정공에 따라 제 편의대로 따로따로 분절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존 듀이 교육학이 유의미한 것은 학교는 ‘작은 사회’라는 탐구 공동체의 관점을 어떻게 실제로 구현하며, 성장 그 자체를 추구하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교육은 발달이다”라는 존 듀이의 언명이 결국 “생활이 발달이요, 발달 끄는 성장이 생활이다”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리라고 말해도 좋을 법하다. 
 
비고츠키, “우리는 존재한다, 고로 우리는 안다”
러시아 심리학자인 동시에 문화역사적 교육이론가인 레프 비고츠키(1896-1934, Lev Semenovich Vygotsky)는 ‘핫’하지만 너무나 ‘어려운’ 교육철학자라고 확언할 수 있다. 사후 유작으로 출간된 『생각과 말』은 1934년 죽음을 앞둔 그가 병상에서 구술한 내용을 정리한 책으로 너무나 난해한 저작이다. 국내에는 비고츠키가 1990년대부터 소개되었는데, 도서출판 살림터에서 ‘비고츠키전집’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비고츠키학의 대가인 마이클 콜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인간 의식을 다룬 자본론”이라고 추천사를 썼고, 브라질 교육자 파울로 프레이리는 “비고츠키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가르칠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높이 평가했다. 
비고츠키 교육학은 아직 국내에서는 낯설다. 그러나 인간을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파악하며 유물론적 변증법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교육학은 인간의 지식․인식이란 객관적 실재에서 유래한다는 문화역사주의 또는 문화-역사적 이론의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비고츠키의 교육이론은 기존의 피아제의 구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서 전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구성주의는 인간의 지식과 인식이 각 개인에 의해 주관적으로 구성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견해에 맞서서 비고츠키는 문화역사적 교육이론의 입장에서 발달과 협력의 교육학을 설파한다. 이 지면에서 비고츠키 교육학의 전모를 고찰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비고츠키교육학실천연구모임에서 출간한 『비고츠크 생각과 말 쉽게 읽기』와 『관계의 교육학, 비고츠키』라는 책을 나침반 삼아 말 그대로 ‘장님 코끼리 더듬듯’ 몇자 끄적이는 것으로 나의 역할을 대신하고자 한다. 
여러 논자들이 강조하듯이, 그의 주저인 『생각과 말』은 기본적으로는 생각과 말의 관계라는 심리학의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발달과 협력이라는 교육의 핵심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는 책이다. 『생각과 말』의 핵심 주장은 “낱말 의미는 발달한다”라는 명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고츠키는 저 유명한 ‘근접발달영역’이라는 개념을 제출한다. 이 개념은 그동안 오해가 없지 않았는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정의는 다음과 같다. 
 
근접발달영역은 실제적 발달 수준과 잠재적 발달 수준 사이의 거리이다. 실제적 발달 수준은 독립적 문제 해결에 의해 결정되고, 잠재적 발달 수준은 성인의 안내 혹은 더 능력 있는 또래들과의 협동을 통한 문제 해결에 의해 결정된다. _ 『마인드 인 소사이어티』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비고츠키는 ‘발달’을 교육의 핵심 문제라고 파악한다. 기본적으로 경쟁 교육에 반대하며 협력의 가치를 적극 옹호한다. 비고츠키 교육학을 ‘발달과 협력’의 교육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고츠키가 문화역사적 교육이론가로 이해되고 수용되는 데에는 그가 생각하는 발달이란 사회 속의 문화적 도구들, 다양한 고등정신 기능들, 꿈과 희망과 정신이 학습자 개개의 심리 과정에 녹아드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활동을 하고 나서야 의미를 알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의미를 좇아 새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아이들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주목한 것이다. 바로 그런 발달의 과정을 통해 근접발달영역이 실현된다고 파악한 것이다. 그가 기존의 피아제 식 교육철학을 신랄히 비판하며 “교육은 협력이다”라고 한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을 법하다. 교육학자 심성보가 피아제의 개인적 구성주의와 비고츠키의 문화역사적 이론의 차이를 “나는 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피아제)와 “우리는 존재한다, 고로 우리는 안다”(비고츠키)라고 간명히 정리한 대목은 비고츠키 교육학의 특성을 잘 요약한다. “동료 인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적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비고츠키의 인간관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쉽게 말해 비고츠키는 동료효과의 의미를 선구적으로 선취한 셈이다. 
이에 따라 비고츠키 교육학에서 중요한 것은 협력적인 인간관계의 형성이다. 협력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협력적인 교육 활동을 통해 협력적인 태도를 내재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발달의 기본 법칙은 “첫번째는 사회적 국면으로, 다음에는 개인적 국면으로 나타난다”(『역사와 발달』)고 보고 있다. 모든 발달은 사회적인 것의 내면화(내재화)를 통해서만 주체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움의 교육 과정에서 ‘도구와 기호’가 차지하는 역할은 막중하다. 인간은 단순한 ‘자극-반응’이 아니라 ‘기호’를 통한 ‘매개적 심리과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기호 중에서 특히 인간의 언어, 즉 ‘말’이 지대하다. 결국, 상상의 발달 또한 말 발달과 매우 밀접하다고 판단한다. 다시 말해 생각과 말의 만남이 중요한 셈이다. 
예를 들어 피아제가 아이들의 혼잣말을 아직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는 데 반해, 비고츠키의 경우 말과 생각 발달의 위대한 경로라고 파악한다. 그리고 말 발달은 형태적으로 ‘외적 말→혼잣말→내적 말’의 발달 경로를 거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비고츠키의 유명한 “낱말 의미는 발달한다”라는 테제를 만나게 된다. 말 발달 단계와 생각 발달 단계가 서로 연관되면서 함께 발달해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비고츠키 교육학에서는 ‘교수-학습’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러시아어 ‘오브체니’라는 말 자체가 교수-학습의 역동적 결합을 의미하는 것과도 통한다. 우리말의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맥락과 통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가 지식의 누적이 목표가 아니라 고등정신기능(핵심역량)을 내재화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지식에서 역량으로: 학력(學歷)에서 학력(學力)으로
존 듀이와 비고츠키의 교육사상은 (문화예술)교육의 새로운 전환을 위한 나침반 역할을 충분히 할 것으로 판단된다. 『관계의 교육학, 비고츠키』저자들에 따르면, 2003년 간행된 OECD 《생애핵심역량 보고서》에서 교육의 패러다임을 ‘지식에서 역량으로’ 대전환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역량 개념이 비고츠키의 고등정신기능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쉽게 풀어보자면 이 의미는 학력(學歷)에서 학력(學力)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알파고의 등장 이후 학력(學歷)이 더 이상 무의미해지는 시대라는 점을 우리는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존 듀이 교육학을 공부하며 학교는 ‘작은 사회’라는 민주주의의 관점을 수용하여 어떻게 질적 경험이 일어나는 문화예술교육이 가능한지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발달과 협력이라는 관점에서 교육 문제를 다시 보고자 한 비고츠키 연구를 통해 ‘적대’에서 ‘협력’으로의 교육관계 재편을 통해 성장 과정에서 협력의 태도와 실천 그리고 교사(예술강사)와 학생(수강생)이 함께 발달하는 기쁨을 경험해야 한다. 
사람은 변하는가. (성인의 경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어떤 사건을 통해 변하기도 한다. 존 듀이의 ‘경험’이든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이든 사람의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교육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학교 문화예술교육이든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이든 간에, 두 사상가의 교육철학을 녹여낼 수 있는 예술강사들의 공부모임과 다양한 실험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학자의 관점이 아니라 학교 현장 교사들의 관점에서 비고츠키 교육학의 핵심 개념인 ‘근접발달영역’이 이루어지는 교실 속 진단 도구를 성찰한 『수업과 수업 사이』(살림터 2016)의 경우 문화예술교육 측면에서 참조할 점이 적지 않다. 문화예술교육 수업 모니터링 및 컨설팅의 질적 고양 차원에서 자발적인 수업 연구 모임들이 더 많아져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고민의 과정 자체가 나와 당신의 경험(존 듀이)이 되고, 발달(비고츠키)을 이루는 ‘고통의 축제’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