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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에 대한 평가, 사람보다는 구조에 주목해야”
  • 정석원 _수원시 평생학습관 관장
  • 2015.08.21
14호 곁봄 칼럼
"변화에 대한 평가, 사람보다는 구조에 주목해야"
정석원 / 수원시 평생학습관 관장

 

 

 

 

 

사르트르와 배움

 

사르트르는 ‘B와 D 사이에는 수많은 C가 있다’는 재미있는 말을 남겼다. 사람은 태어나서(Birth) 죽기까지(Death) 많은 선택(Choices)을 하게 되는데, 그 누적된 선택의 총합이 현재의 자기 실존이라는 것이다. 선택과 관련한 사회적 맥락이 사상되어 있긴 하지만 한번쯤 음미해 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야기는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초중고 시절에는 자신의 선택보다는 부모의 결심이 훨씬 더 우월한 결정력을 갖는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주체적 선택권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을 구축하고 간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학점 경쟁을 해야 하는 압도적 생존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주체적 선택이 또다시 유예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삶의 중요한 국면마다 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타인 혹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식은 선택이되 실내용은 피동적 수용을 해 왔다면 과연 내 삶의 실존은 무엇인가? 내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배움도 이와 유사한 로직을 갖고 있는 듯하여 우울하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배우기보다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혹은 유명하다고 하는 것에 일차적 촉수를 뻗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해서 강의를 듣는 것 같지만 기실 강의장에서 발견하는 것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 자신인 것이다. 배움의 장면을 상상할 경우 우리는 일방적 강의와 수동적 청중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체적 삶이 없이는 주체적 배움도 없는 것이고, 그것 없는 배움은 결국 세상의 문법에 길들여지기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주체성이라는 것이 0과 1의 세계로 구성된 디지털처럼 ‘있다’와 ‘없다’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있는 듯 하지만 없기도 하고, 없는 듯 하지만 있는 것이 주체성이다. 상황에 따라 의존성이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고, 그것이 위축되어 있거나 의식의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기도 하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배움의 필요성이 더욱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체적 삶을 위해 힘들어도 우리는 그것에 대면하고 보듬고 격려하면서 더욱 확장시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장정일의 공부』 부제처럼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으로서의 배움을 해야 한다. 이때의 배움은 주류 문법에 길들여진 익숙한 편안함에 저항하는, 탈주(脫走)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신영복과 배움

 

집에 걸려 있는 액자는 딱 하나. 주례자 신영복 선생님이 써 주신 붓글씨를 표구해서 걸어놓은 것이 유일한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일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배움에 있어 자기를 낮추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해석한다. 낮은 곳에 있는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 안 듯 자기를 낮추어야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배움을 통해 자신을 드높여 우월한 위치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세로 ‘더불어숲’이 되자는 것이다. 전자가 학습의 기본 태도와 자세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배움의 지향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후자의 의미를 주제 넘게 공자왈 한다면 수기지학(修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보충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자(程子)가 『논어』를 해석하기를 “위기(爲己)는 도(道)를 자기 몸에 얻으려고 하는 것이고, 위인(爲人)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즉 배움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확장하고 성찰하는 수기지학과는 달리 위인지학은 출세,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배움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먹고사니즘’이 최고의 이데올로기로 등극한 시대에 입학을 위해, 취직을 위해, 더 높은 연봉을 위해 수인지학한다고 해서 그리 타박할 일은 아니다. 다만 명확히 하자면 이때는 배움이라기보다는 지식과 기능을 익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배움은 정답이 있는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하는 것이다. 니체는 여동생이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편지를 보내자 그에 대한 답장을 보냈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하지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고 싶다면 질문하라.” 모든 탈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불가능한 변화의 존재 증명, 그리고

 

배움의 핵심이 질문이라고 하면 배움의 기본적인 목표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질문은 안주를 허용치 않기에 질문에 정직하게 대면하다 보면 어제와는 다른 나를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기실 변화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평가하는 일 자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그것을 수치화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변화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하는 것은 애국심을 애국가 4절 완창으로 평가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현실계에선 이를 수행해야 할 곤혹스런 상황도 발생한다. 공공의 재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평생학습관 운영의 비용과 효과성을 분석한 2014년도 논문 한 편을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글 어디에도 사람의 변화를 포착하여 분석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직 수강생의 만족도와 강좌당 평균비용 정도를 파악하여 기관 운영의 효과성을 표현하는 숫자, 그 표정 없는 숫자가 주인공이었다. 평가는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지만, 변화는 결과가 아닌 지속적인 과정이기에 측량하기 어렵다. 이것은 연인의 애정을 온도계로 측정하려는 시도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변화를 평가한다고 할 때 ‘누가?’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불가지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의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성장을 12년간 촬영해서 만든 영화다. 이처럼 한 사람을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만나고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변화의 과정과 계기들을 자세히 분석해볼 수 있겠지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기관 입장에서는 한 사람의 연대기적 변화 추이의 확인은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이다. 따라서 기관에서는 한 개인이 아니라 변화를 촉진하는 구조에 착목하고 여기에 자원을 투입하게 되는데, 그 기관이 어떤 스트럭처(structure)를 구축했느냐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보다는 구조

 

사람의 변화는 쉽지 않다고들 하는데 게다가 성인임에야. 쉽지 않다는 것은 다행히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더 많은 공과 품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들지만 가능한 조건을 고민하고 만들어 내는 일을 기관이 포기해서는 안된다. 나는 최소한의 그 조건을 지속성/마주봄/조직화라고 생각하고, 이런 플랫폼을 만들어내는 일에 자원을 배분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한다. 물론 이 조건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준이 있다는 것은 논의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당연히 관점이 다른 사람과의 토론도 필요하고, 다양한 각도에서의 시뮬레이션 그리고 실제 일어난 결과를 놓고 변증법적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구조를 만든 것과 실제 사람의 변화와 어떤 관계가 있을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구조와 변화가 인과관계라면 최상이겠지만, 어느 정도 연관성만 있어도 기쁜 일일 것이다.

 

변화를 수치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뿐더러 자칫 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결과로서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에 힘을 쏟을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 그 시스템에 집중해서 문제점을 체크하고 최적화시키는 일에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 더 온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