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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실천공동체인가?”
  • 채효정 _경희대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
  • 2015.08.21
14호_넘봄_서평
"실천공동체(Community of Practice): 이론의 함정"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실천 공동체 인가?
채효정 / 경희대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

 

 

 

에티엥 웽거(Etienne Wenger),『실천공동체 - 지식창출의 사회생태학』(학지사, 2007)

리처드 세넷(Richard Senett), 『투게더』(현암사, 2013)

 

베네딕트 마니에(Bénédicte Manier), 『백만 개의 조용한 혁명』(책세상, 2014)

 

 

 

 

 

실천공동체. 실천은 얼마나 좋은 말이고, 공동체는 또 얼마나 좋은 말인가. 이 둘을 붙여 실천공동체라니 가슴이 설렐 정도다. ‘함으로서 함께가 되고 함께여서 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를 상상했다. 그러나 ‘CoP(Community of Practice)’의 개념은 내가 상상한 그런 의미의 실천공동체가 아니었다. 더구나 CoP를 ‘실천공동체’로 번역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식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는 과감한 개념의 해체와 재규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실천공동체 - 지식창출의 사회생태학』(학지사, 2007)은 그 놀라움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이 책은 일종의 현장학습이론과 실천교육론으로서의 CoP의 개념과 원리에 대한 ‘이론서’이다. 저자인 에티엥 웽거(Etienne Wenger)는 CoP 이론을 다룬 연구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저자이다. 그렇다면 이 CoP 이론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분야는 어디일까? 교육학일까? 아니었다! 현장학습이나 실천교육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교육학 분야일 것 같지만, 이 이론이 소개된 이후로 CoP 개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분투하는 학과는 ‘경영학’이다. CoP와 관련한 논문들을 검색해봤다. 인적자원개발(human resource management), 실무공동체, 업무공동체, 조직학습, 현장학습, 상황학습, 조직행위, 조직관리, 지식경영, 혁신경영 등등의 개념들이 관련주제어로 나란히 검색되었다. 몇 개의 논문을 읽고 난 후에 나는 CoP 개념이 부상한 배경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기업들은 왜 실천공동체를 조성하고 지원하고자 하는가? 왜 학습조직을 만들고 지식경영을 추구하는가?

 

웽거의 책에서 등장하는 실천공동체의 사례를 보자. 그가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구체적 실례로 사용하고 있는 ‘현장’은 회사의 한 부서, 그것도 보험회사의 청구담당부서이다. 직원들은 회사의 직무연수나 과거 대학에서 배웠던 지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기보다 동료나 상급직원의 판단이나 경험에 의존하면서 스스로 대응 매뉴얼과 지침을 만들어나간다. 상호 신뢰감이나 연대의식은 부서회의 같은 공식적 루트 보다는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의 대화, 생일이나 집안일 같은 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개입,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피드백을 통해서 형성된다. 이 과정에서 조직 전반적으로 업무역량이 향상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결속력이 생기며, 발견되고 습득된 지식은 개인의 것으로 머무르기보다 부서 전체의 것으로 공유되고 객체화된다. 웽거는 부서원들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업무와 관련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공유하며 보다 능숙하게 되는 과정을 관찰하고 이렇게 특정 업무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상호작용하는 공동체를 ‘실천공동체(Community of Practice)’로 개념화 한다.

 

웽거의 CoP 사례를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미생’에 나오는 장그래의 영업1팀이 딱 그런 것이다. 현장에서 배우고, 우발적으로 닥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협동하고 서로 배우고, 선참들이 일처리 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면서 신참들이 구체적인 실천지와 방법지를 익혀나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공동체의 실행(Practice of Community) 과정 전체가 다시 부서의 역량이 되고 회사의 지적자산으로 전환되는 과정, 그게 바로 CoP였다.

 

실천공동체가 정말 그런 거라고? 설마 하는 독자들은 『일터학습-함께 배우기』(럭스미디어, 2012)나 『학습하는 조직이 살아남는다』(이담,2013)란 책을 함께 보시면 좋겠다. 둘 다 실천공동체(CoP)를 소개하는 책인데 이론이 현장에 갈 때 어떻게 구체적으로 현실화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학습하는 조직이 살아남는다』에서 소개하는 현장학습의 사례를 보자. 우리가 잘 아는 이랜드의 경우다. 지식경영의 대표사례로 종종 소개되곤 하는 이랜드의 실천공동체는 ‘KMS(Knowledge Management System)’이라는 사내 지식공유사이트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이랜드 직원들은 이 사이트를 통해서 서로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며 시행착오를 줄여나가고, 자신의 노하우와 지식을 다른 직원들에게 전수해주고 모르는 것은 배웠다. 의류파트의 한 직원이 전국 매장을 가장 빠르게 순회하는 방법을 사이트에 올리면, 또 다른 한 직원은 수박 진열을 멋지게 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올린다. 또 직원들은 이 사이트를 통해 각자 강의를 개설할 수 있고, 수강할 수도 있다. 사내강의는 활발히 진행되어 KMS 사이트에는 하루에 5-6건의 새로운 강의개설공지가 뜰 정도다. 이렇게 배우고(Learn), 사용하고(Use), 가르치고(Teach), 점검하는(Inspect) 활동은 이랜드가 개발한 ‘LUTI 지수’로 수치화되어 직원들 PC에 나타나고, 이 지수는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한다.

 

그들은 진정 함께 배우고, 서로 배우고, 현장에서 배우고, 일터에서 배우고,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산지식으로 배우고, 맥락 속에서 배웠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방법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현실이고 사람이다. 장그래가 문제다. 장그래는 그렇게 배우고 공유하고 남기고도, 이 공동체 안에 자신의 정당한 몫을 갖지 못한다. 결국 이 실천공동체는 그들이 함께 공동의 업무를 실천하고 있는 동안에만 공동체성이 발휘되는 공동체였을 뿐이다. 『일터학습-함께 배우기』속의 비정규직 사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과연 자신들이 만들어낸 실천공동체 안에서 적법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물론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좋은 방법론이라면 우리 식으로 채택하고 적용하면 되지 않겠는가? CoP 모델이 기업에 가면 인적자원개발 모델이나 조직경영전략이 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마을’에서 할 때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얼마든지 방법론으로 채택해서 적용할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함께 읽기든, 함께 쓰기든, 함께 만들기든, 현장 속에서 함께 배우는 사례라면 얼마든지 이 실천공동체 이론이 적용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교육방법론이 아니다. 좋은 방법론을 적용한다고 좋은 교육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늘의 교육학은 지나치게 이론과 방법론에만 치중하고 있다. 그런 경향은 종종 교육이 놓여 있는 정치사회적 현실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 문화예술교육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론은 자신의 발생학적 기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며 언제나 어떤 의도와 맥락 안에서 탄생한 것이다. 예컨대 문화이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인종’이란 말이 금기되면서 생겨났다. 인종연구과 인종학은 지역문화와 문화이론으로 대체되었고 ‘문화’라는 새로운 개념은 자연스럽게 서구의 지식 계보학에서 ‘인종’이란 단어를 지웠다. 발전론은 어떤가.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 정부로부터 전략적 연구지원을 받은 이 이론은 식민지 시대의 ‘제국-식민지’를 ‘발전-저발전’이라는 새로운 구도로 전환시켰다. 이 개념을 통해 침략국은 발전국가가 되었고, 그 이외의 나머지 세계가 저발전국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선진국-후진국’의 개념은 그렇게 탄생했다. ‘민주주의 이론’은 또 어떤가. 현실의 민주주의는 서구 시민사회 엘리트들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냉전기 서방의 동맹국들에게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제공해주었다. 민주주의 이론이 제시하는 ‘의회주의ㆍ선거민주주의ㆍ다당제’ 등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나라들은 그 나라의 실질적인 인민의 힘(demokratia)이 어떻든 간에 반민주적인 전체주의 독재국가로 규정되었다. 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 이론이 효력을 다하자 다른 대체 개념이 등장했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 시기 태어난 ‘거버넌스’ 이론은 ‘관치에서 협치로’라는 아름다운 슬로건을 통해 공공부문에 대한 시장의 침투를 그럴듯하게 미화했다. 정치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통치 혹은 경영관리(governance)’의 문제가 되었다. 이론의 정교함이나 그럴듯함에 현혹되어서는 안되며, 말의 힘을 그 개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론의 뒷면은 이렇게 무섭다. 그렇다면 CoP이론에서는 어떤 정치사회적 맥락을 읽어야만 하는가?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CoP의 관점이 철저히 경영-관리의 관점이라는 점이다. ‘창조경영ㆍ예술경영ㆍ지식경영’ 등등 어떠한 미사어구를 붙이든, 방점은 창조와 예술이 아니라 ‘경영’에 찍혀 있다. 이러한 통치의 관점ㆍ경영의 관점은 사회와 개인,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탄생하는 정치적 긴장을 공동체 단위의 협치로 효과적으로 무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실천공동체’는 ‘자기개발과 자기통제라는 관리시스템’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시장은 총칼이 아니라 소비와 문화로 통치한다’는 신자유주의적 통치관리의 기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문화예술교육이 문화통치의 효과적 수단이 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기업적 경영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저항의 감수성’을 길러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일 것이다. 저항의 감수성이 없는 예술적 감수성은 죽은 것이다. 예술은 결코 질서의 수호자나 관리자의 역할을 자기의 사명으로 맡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의 사명은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고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다. 예술의 진정한 힘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낡은 것을 파괴할 수 있는 데서 시작되며, 길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데서 자라난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것이며 시적 상상력은 정치적 상상력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CoP가 우리가 추구해야할 실천교육에 적합한 방법론으로 삼기에는 위험한 문제가 또 있다. CoP를 실천공동체로 번역할 때, 그것이 ‘실천’의 개념과 ‘공동체’라는 기존 개념을 심하게 왜곡하고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이론(theoria)과 실천(praxis)의 문제는 항시 근본적인 교육학적 긴장을 이루는 테제였다.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고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인 것이다. 동양의 유교적 교육이 추구해온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론과 실천, 앎과 삶은 늘 긴장 속에서 통합되어야 했고 그것은 언제나 실천교육의 좌표를 세우도록 하는 나침반이었다. 그런데 CoP 이론에서 ‘프랙티스(practice)’는 어떤 지향적 가치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지향해야할 것이 아니라 지식이 생산될 때 항상 일어나고 있는 일, 즉 지식생산의 상황적 조건으로서,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으로 이해된다. 그렇게 되면 이제 이 ‘실천’이라는 행위에는 실용적, 실무적 업무 실천의 의미만이 남을 뿐이며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실천의 의미도 없다. 이제 실천, 실천교육의 의미는 방향성, 가치지향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방법론’으로서만 완성된다. 누구를 ‘위함’도, 무엇을 ‘향함’도 없는 그저 ‘행함’이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것을 규정하지 않을 때 탈정치화된 실천은 결국 기업을 위하고 이윤을 향한다. 실천공동체 이론이 그런 기업의 위함과 향함을 실현시키는 것에 반대한다면, 이제 반드시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의 실천공동체가 지향해야할 ‘위함’과 ‘향함’의 선명성이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함께 읽고 쓰고 만들고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세넷(R. Senett)의 『투게더』(현암사, 2013)는 경영-통치의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실천공동체’를 다시 상상해볼 수 있는 책이다. 세넷을 통해 우리는 CoP 경영론의 모순을 알게 된다. 왜 기업은 갑자기 협동과 협력의 전도사가 되었는가? 고립화와 경쟁이 생산성의 명백한 적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경영자들에게 (경쟁모델인) 사일로 효과는 생산성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고용주들은 자기들의 이익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정보는 남에게 감추며, 사일로 속에 있는 사람들은 타인들에게서 오는 피드백에 저항한다. 한 가지 치료법은 팀워크를 권장하는, 아니 사실은 강요하는 것이다.” 사일로 효과란 개인과 부서에서 축적한 경험과 지식이 회사 전체의 자산으로 공유되지 않고 곡물저장통인 사일로처럼 내적축적 외적단절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고립된 지적자원들을 사일로 밖으로 끌어내는 전략이 공동체를 통한 협동전략인 것이다. 그러나 노동분석가 기드온 쿤다는 이런 종류의 협동적 행동을 “심층 연기 deep acting”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발휘되는 팀워크 역시 “가장된 연대성”에 불과하다. 이런 업무연극이 수행되더라도 “사람들이 서로에게 진정으로 간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터에서 노동자들의 서로-배움, 상호연대성이란 것은 궁극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인가? 세넷은 보험회사의 청구부서나 장그래의 영업1팀과는 전혀 다른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것은 『투게더』보다 앞선 그의 책 『장인』에서도 풍부하게 펼쳐보여 주었던 또 다른 노동의 세계, 민중적 배움의 현장이다. 세넷에 따르면 고대로부터 작인과 공인들의 작업장은 언제나 협력적 배움이 일어나는 실천공동체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플라톤부터 토머스 제퍼슨까지 손기술(자급능력)을 가진 장인이야말로 제대로 시민적 조건(자치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은 작업장에서 기르는 것은 단순한 기능적 숙련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웽거를 비롯한 CoP 관련 연구들이 실천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를 방법론적으로 구축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세넷은 왜 일터에서 사회적 관계가 사라졌는지부터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떻게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협동적 자아를 잃게 되었는지를 분석한 이후에 다시 작업장으로부터의 희망을 찾아간다. 그래서 세넷이 그려주는 협동의 풍경은 가장된 연대의 연기가 아니라 노동하는 이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노동과 타인의 노동을 조화시키면서 함께 그리고 스스로의 역량을 강화해나가며 그들 자신의 노동의 조건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희망의 지도가 된다. 여기에서 읽는 이가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세넷 자신에게는 ‘누구를 위함이며, 무엇을 위함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일관되고 선명한 입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이론’ 대신, 시적-정치적 감동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장에 대한 실천적 영감이 필요하다면, 베네딕트 마니에(Bénédicte Manier)의 『백만 개의 조용한 혁명』(책세상, 2014)을 권하고 싶다. 자족하는 공동체,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을 공유하는 공동체도 좋지만, 나는 요즘 불화와 갈등의 분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내·외부를 향해 내·외부와 ‘함께 싸우는’ 공동체를 꿈꾼다. 실천공동체에서 저항적 실천의 의미를 지워버리고,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서 살고자 하는가, 살아야 하는가라는 정치적 지향성을 지워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CoP라는 공허한 방법론 밖에 없다. 문화예술교육이 효과적인 교육방법론을 제공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으려면 이 세계 속에서 예술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고 어떤 세계를 창조해야할 것인지를 방법론보다 먼저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오늘날 문화예술교육이 부여받고 있는 가장 실천적인 요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