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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와 노동 없는 생태교육이 가능한가?
  • 하승우 _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 2014.12.13

 

 

  무서운 이야기들이 떠돈다. 방사능에 오염된 수산물, 발암 물질로 범벅된 시멘트, 잦은 고장을 일으키는 핵발전소, 침몰하는 배, 잠실 롯데월드의 씽크홀, 기관사 없이 운행되는 지하철 등 살아 남으면 운 좋은 사회,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들의 천국이 바로 한국이다. 어떻게 하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이런 사회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교육이 가능할까?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콘크리트로 조합된 도시에서의 삶은 역사와 의미를 담은 장소와의 연관성을 지워버린다. 장소가 사라지는 만큼 그것을 존중하는 마음도 사라진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지만 일상적으로 접하고 만날 수 있는 장이 더욱더 중요하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껴야 소중함을 알 수 있으니까. 문화예술교육이 지향하는 바도 그런 듯하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할까?

 

사회 없는 자연이 가능한가?

 

  머레이 북친(M. Bookchin)은 자신의 사상을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이라 정의한다. 자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인간의 노력이 정치, 사회, 문화적인 자연을 만들었고, 이것이 오늘날 자연 자체를 거의 흡수해버렸기 때문에 생태를 복원한다는 것은 사회를 복원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사회와 자연을 분리시키지 말고, 위계와 지배를 강요하는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생태하천을 복원한다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떠올려 보라). 사회의 재구성이 생태의 복원에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친은 “생태 공동체는 ‘환경적으로’ 깨끗한 마을이 아니다. 생태 공동체는 단순히 공적인 합의라는 잣대를 제공하는 국가주의적 문화가 아니라 자유를 산출하는 사회정치적 실천”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연도 자유로운 자연(free nature)이 된다.

  대통령이 시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22조원을 들여 4대강 공사를 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생태주의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생태교육은 좋은 대통령, 좋은 국회의원을 감별하는 눈과 더불어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를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 아름다움만을 학습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사회의 어두운 구석과 부조리를 회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교육, 추함과 더러움 속에서 삶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는 교육, 불복종과 조직화를 가르치는 교육이어야 한다. 생태교육은 비판교육이자 참여교육, 정치교육이어야 한다. 지금의 생태교육은 그러한가?

  정치만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존재의 가능성을 완전히 말살시킬 수 있는 핵발전소는 방사능 덩어리일 뿐 아니라 돈 덩어리이다. 발전소 1기당 약 3조원의 건설 비용이 들어가고, 30년 뒤에 해체하려면 1기당 약 6천억원이 필요하다. 문제는 해체하더라도 엄청난 폐기물이 남는다는 점이다. 고작 30년 동안 전기를 풍족하게 쓰고자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이는 이유는 명확하다. 엄청난 액수의 돈이 걸려 있지 않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렇다면 생태교육은 핵마피아를 추적하는 탈핵교육이자 대기업을 감시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지금의 생태교육은 그러한가?

  외려 지금의 생태교육은 근본적인 문제를 우회하는 방법처럼 느껴진다. 녹색을 이야기하는 교육은 주로 자연과 공동체, 봉사처럼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자연을 대상화시켜 그 아름다움만을 향유하려 들거나 자연을 보라며 사회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듯하다. 파멸로 치닫는 폭주사회를 멈추지 않고 생태가 보존될 수 있을까?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으면서도 개발을 지지하는 사회에서,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회에서, 녹색성장의 사회에서 생태교육은 어떤 힘을 일깨우고 있을까?

  북친이 말했듯이 생태공동체는 환경이 좋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아니다. 서로의 자유를 실현하고 지지하는 정치사회적인 실천이 생태공동체를 만드는 힘이다.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필요하다면 때때로 관아에도 반대하고 싸울 수 있는 불온한 ‘양산박’ 같은 공동체야말로 생태공동체를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교육은 그런 공동체를 만들 방법을 전수하고 있나?

 

노동 없는 생태는 가능한가?

 

  사회와 공동체를 재구성함에 있어 가장 기본은 노동이다.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는 구성원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지와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생태적인 사회는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유익한 물품과 서비스를 협동해서 생산할 때 만들어진다. 직접 생산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손을 빌려서만 생활할 수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을 빌려야 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손을 빌려주는 사람의 노동조건에 관심을 가지고 그 삶을 지지해야 건강한 생산과 안전한 소비가 가능하다. 노동을 쥐어짜는 최저가로 경쟁하는 사회에서, 시급을 분급으로 쪼개는 사회에서 생태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더구나 부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사회에서 가난은 고개를 숙이기 싫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고, 실업은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자괴감에 시달리게 만든다. 가혹한 노동은 삶의 향유를 방해한다. 굴욕적인 노동과 실업의 자괴감을 경험한 이가 다른 생명을 존중하거나 좋은 삶의 가치에 공감할 수 있을까? 경제적인 이득보다 장소의 역사성과 의미를 존중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언제나 노동을 배제한다. 많은 사람들이 농수산물이나 상품에 든 방사능이나 화학물질에 관해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농민이나 어민,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유해물질이나 그들의 노동조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대기업을 욕하지만 그 기업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삶을, 소비자보다 더 위험한 환경에서 일해야만 하는 생산자들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생명을 노래하면서 일상의 소비가 어떤 노동의 희생을 딛고 이루어지는지를 망각한다. 하지만 친환경 농산물이나 물건을 골라서 소비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생산자 없는 소비자, 노동 없는 소비란 발 없는 경주마처럼 모순된 표현이다.

  우리 사회에서 생태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는 그냥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보다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훨씬 더 강력한 가치인 이윤이 힘을 잃어야 생명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이윤을 거부할 수 있는 건강한 노동 없이 생태주의는 불가능하다. FTA를 반대하지 않고 농업의 미래를 논하는 것이 가식이거나 위선이듯이, 노동운동을 지지하지 않고 안전하고 건강한 생활을 얘기하는 건 이기적인 바람이듯이.

생태를 파괴하는 산업사회를 거부하고 온전한 삶을 지향하는 건 좋은 일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농사도 짓고 물건도 만들고 밥도 먹고.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진공 상태가 아니기에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사회가 바뀌려면 내 손으로 직접 하는 자유도 필요하지만 타자의 자유를 위해 그들의 손을 거드는 연대도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라는 서클에 갇히지 않으려면 내가 누구의 손을 빌리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사실 그렇게 다양하게 섞여 살 수 있어야 유지되는 것이 자연계 아닌가. 같은 종만 사는 자연은 멸망한다.

  마당에 텃밭을 만든 뒤부터 길러 먹는 것과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 사이에 조금씩 충돌이 생긴다. 하지만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 경중을 가릴 수 없다. 아무리 길러 먹어도 내가 농부가 아닌 이상 농부의 손을 빌리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농부가 사라지고 고령화된 농촌이 곧 붕괴되면 내가 기를 수 없는 것도 사라진다. 일상에 필요한 소소한 물건들을 스스로 만들 수 있지만 완전한 자급의 삶은 아직도,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자기 만족감은 이런 상식을 자꾸 망각하게 한다.

  요즘 SNS에 직접 만드는 물건, 음식에 관한 글과 동영상이 자주 올라온다. 나와 관계 있는 사람들의 성향 탓이다. 하지만 ‘스스로’ 하는 게 즐거운 만큼 그렇게 하지 못하는 타자의 삶에 관심을 두는 것이 사회이고 생태이다. 자연에서 홀로 아름다운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너무 일찍 독거노인이 되고 싶지 않다면 경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