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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 생태학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4.12.13

 

 

  ‘자연은 인간의 영혼에 상징의 언어로 말을 건다.’ 지금의 국립공원 시스템의 기원이 되는 시에라클럽을 1892년 5월에 설립한 자연주의자 존 뮤어가 한 말이다. 자신을 황야대학의 얼음대장으로 자처한 산악인 존 뮤어의 위 말은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와 관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은 자연(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려는 관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자연(산)이 인간에게 등정을 허락하는 것이라는 겸허한 의미를 함축한 표현이라고 보아야 옳다. 그리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와도 통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자연이란 무엇인가. 많이 배웠든 아니든 간에 도심지의 농경지를 보며 황무지 취급을 하는 언사를 함부로 하는가 하면, 시골 논밭에 아파트단지 따위를 지어야만 이른바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선거에 출마하려는 정치인들은 환경 혹은 생태 관련 공약을 내세우지 않는 게 표(票)를 얻는데 실제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한 줌의 자연이나마 남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면 기적이랄 수 있다.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自然] 존재로 온전히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소위 경제발전을 위해 착취되어야 할 한낱 ‘자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 아래 산과 강이 철저히 파괴되었고, 바다와 습지 또한 제 모습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라. 그리고 우리는 늘어가는 국내총생산(GDP)의 숫자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한 성장(成長)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란다는 것이다. 「들길」(1949)의 사색가 하이데거는 말한다. “넓으나 넓은 하늘을 향해 가지를 편다는 것, 그러면서도 또 한쪽으로는 대지의 ‘어둠 속’을 뚫고 뿌리를 내린다는 뜻이다”라고. 이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발전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develop’라는 말은 본래 자동사였으며, 주로 식물 같은 생명 있는 것들의 성장을 의미했다. 그런데 성장 혹은 발전이라는 말은 이러한 의미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1949년 1월 20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미개발 국가(under-development country)들을 ‘발전시키겠다’고 선언한 이후의 일이다. 이로써 발전은 처음으로 국가정책의 목표가 되었고, 자동사로서가 아니라 타동사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언어의 이러한 나쁜 의미로의 전환은 우리의 사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태도에 미친 악영향은 아직도 여전하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우리는 자연의 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단순함에서 오는 그 은은한 힘은 우리 삶에서 메말라버렸고, 자연 속에서 순례자처럼 머무를 줄 아는 삶의 기술은 잃어버렸다. 누구나 ‘관광객’이 되어 자연 또한 하나의 풍경으로 소비하고 있다. 그런 관광객의 눈과 귀에 자연 자체의 위대한 모습이 보일 리 없으며, 존재의 소리 또한 들려오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이 있다.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이 ‘풀꽃나라 공화국’(최성각)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가 4천년 간 이어져온 식인(食人) 풍습을 비판하며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루쉰)고 외치던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렇다,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금의 체제를 용인하는 ‘식인’ 교육의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다. 식인 교육의 작동 원리란 결국 ‘대세(大勢)를 따르라’라는 정언명령에 굴복하여 철저히 내면화할 것을 종용하는 행동의 매뉴얼에 따르는 것이 아니던가. 자연을 착취 대상으로만 보려는 태도가 이런 매뉴얼에서 비롯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환경보전교육센터(대표 이용성)가 시흥의 옥구정원에서 진행하는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에코 인 아트, 문화예술로 태어난 자연생태] 프로그램은 일종의 어린 생태학자를 길러내는 생태 감수성 증진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봄, 여름, 가을별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은 계절에 따라 변모하는 시흥 옥구공원의 자연생태를 자세히 관찰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여 어린 생태학자로서의 변신을 꾀하게 된다. 봄에는 꽃과 새싹의 변화를 관찰하며 꽃 도감을 직접 제작하는가 하면, 여름에는 꽃과 곤충의 공생(共生) 관계를 직접 배우는 시간을 갖게 되며, 가을에는 낙엽의 변화를 관찰하고 씨앗 채집을 하여 씨앗 도감을 만들게 된다. 수업은 계절별로 8회씩 모두 24회 진행되는데, 아이들의 참여가 퍽 높은 편이다. 참여 연령은 미취학 연령대의 꼬맹이들부터 초등학생 고학년까지 다양하다.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의 눈과 귀는 나무를 비롯한 자연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자신만의 ‘씨앗 도감’을 완성하기 위해 온 신경과 감각을 흙과 나무에 집중했다. 1년 단위로 진행되는 지원사업 구조상 겨울철에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없는 것이 오히려 아쉬울 따름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풀들이 땅 위에서 장미처럼 퍼져 자라는 로제트(rosette) 식물을 관찰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다소간 달래야 했다. 나는 아이들의 그런 진지한 모습을 보며 어린 생태학자의 탄생을 상상하고 예감하게 된다. 

  아이들이 자연에서 멀어진 것은 아이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아이들은 그런 상황을 결코 원한 것이 아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흙과 자연에 친숙해질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왜 아이들이 자연과 친숙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것은 자연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nature’라는 말에 ‘본성’이라는 뜻이 같이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자연이 바로 우리 본성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일종의 자연결핍 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동화 『해적』에서 쓴 표현이 기억난다. “흙과 풀, 주룩주룩 내리는 비와 별, 총총한 하늘을 더없는 축복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을 평생토록 간직할 수 없는 까닭은 무얼까?” 이 정당한 의문이야말로 자연을 통제하는 과학기술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건강한 야생성을 회복해주는 강력한 마음의 연금술로 작용한다는 것은 수많은 생태학자들과 랜드아트(landart)주의자들이 주장해온 바이다. 자연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감각이 더 예민해지고, 창의력 또한 여느 아이들보다 증진되는 교육효과를 얻었다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놀이, 재미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런 교육효과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흥 환경보전교육센터의 [에코 인 아트] 프로젝트는 일종의 랜드아트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을 진행하는 강사들 또한 아이들의 전면에 나서지 않되 뒷전에서 자리를 지키며 스스로 관찰하고 체험하며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교육을 무리없이 잘 진행하고 있었다. 강사의 이러한 태도는 교육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답정문(답이 정해진 질문)에 익숙한 아이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작은 성취를 얻어내는 즐거움은 오래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과정에서 단순한 자연체험이 아니라 경험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길이 곧 목적지’라는 점을 이해한 어린 생태학자들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에코 인 아트] 프로젝트가 도시 아이들과 함께하는 환경교육 프로그램으로서 유의미한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해도 좋을 법하다. 

  숙제가 없지 않다. 이 프로그램이 더 나은 프로젝트가 되기 위해서는 ‘예술교육’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지금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그림, 책, 미술 활동을 적극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나 또한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교육이 환경교육의 도구로서 기능하게 될 때 수단화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더 치열한 고민이 필요할 수 있다. 기획자-예술가-교육자 간에 학습공동체(cop)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문화예술교육의 동반자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역량강화 교육에 대해 신경을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하나는 ‘환경교육이냐, 생태교육이냐’라는 교육 방향과 목표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는 점이다. 현재 환경단체에서 진행하는 환경교육에서는 지속가능성을 중심 개념으로 놓고 교육을 진행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서는 환경을 관리하는 수준의 환경교육 너머를 상상하며, 더 재미있고 예술적인 방식의 ‘생태교육’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민을 하다보면, 지금의 자연생태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나와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 전반에 대한 고민 또한 하게 되리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를 들어 옥구공원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아파트단지 조성공사와 교육 현장을 이어주는 매개 과정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그럴 때 아이들이 공원 안과 바깥의 생태를 동시에 느끼고 성찰할 수 있다. 철학자 가타리가 역설한 ‘세 가지 생태학’은 안과 밖의 그런 마주침들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 가지 생태학이란 마음생태학(개인), 자연생태학(자연), 사회생태학(사회)이다. 세 가지 생태학 간에는 만남과 교류의 접점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