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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곁봄
  • “초를 쳐야 인정(人情)의 ‘케미’가 생기지요”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4.09.25

 

 

십년 전쯤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지금껏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는 시인 이덕규와 함께 화성시 향남면 행정리 쇠면 마을(웃말)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이 마을은 2003년에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1941-2003) 선생이 1977년 5월부터 1980년 가을에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약 4년간 거주하며 1970년대 대표작 『관촌수필』과 『우리동네』 연작소설을 썼던 작품의 산실이다. 「우리동네 김씨」, 「우리동네 강씨」, 「우리동네 황씨」 같은 작품이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작품뿐만 아니라 연년생으로 남매까지 얻었다. 선생은 마을을 떠난 지 14년이 되는 해에 쓴 어느 산문에서 당시 스물 세 집의 농가가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인심(人心)이 후했다고 회고했다. 마을 사람들은 14년이 되도록 여전히 ‘우리 동넷사람’으로 쳐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십년 전쯤 이곳을 찾았을 때는 선생은 이미 세상을 하직하셨고, 마을은 동탄 신도시 개발을 위한 택지조성 사업에 편입되어 쑥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인적 없는 황량한 벌판에 버려진 옛 우물만이 한때나마 이곳이 사람 살던 마을이었음을 가까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1977년에 출간된 선생의 연작소설집 『관촌수필』의 첫 작품인 「일락서산(日落西山)」의 한 대목을 연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 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 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 도시화, 산업화,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사는 터의 무늬가 무자비하게 파괴되는 현장에 입회한 듯한 기분에 자못 비감에 찼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새롭다. 그날 우리는 술을 좋이 마셨으리라. 

 

십년 후 다시 찾은 동탄 신도시는 나의 그런 기억 때문인지 이물감이 강했다. 이른바 ‘장소의 혼’과 장소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어서 그랬으리라.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의 『장소와 장소상실』(1976)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무장소화’의 표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런 무장소화의 특징으로 거짓 지리적 다양성을 꼽은 바 있다. 동탄 신도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나 또한 모르지 않는다. 갈수록 우리 사는 공간이 국가-자본 동맹에 의해 삶의 직접성이 박탈되는 추상화된 공간으로 변질되는 현상을 보라. 누군가가 ‘우리는 장소(place)이다’라고 한 선언의 의미에 대해 숙고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 사는 공간/장소의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성찰과 대안을 향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답다는 것은 특정의 사이트에서 인기척이 살아 있고, 의미 있는 장소로서 작용하며 나와 우리 사이에 관계의 중력이 형성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들을 배척하는 척력(斥力)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끌어당기는 인력(引力)의 힘이 더 지배적인 장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추상화된 공간을 구체적인 장소로 바꾸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화성 동탄후마니타스아카데미의 [식초인문학, 식초가 익어가는 동네] 프로젝트는 낯선 신도시 주민들이 식초의 발효(醱酵) 과정에 관한 저마다의 노하우를 공유함으로써 서로 간에 인정(人情)을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우리에게’ 가르친다는 취지를 살려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점이 특징적이다. 전문강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식초 만들기 비법에 관한 저마다의 영업비밀을 나누고 함께 시음을 하는 등 일상의 깨알같은 교감 과정에서 서로 간에 화학적 관계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이 의미는 작은 것이 아니다. 식초를 만드는 데 효소(酵素)가 절대적으로 작용하듯이, 인정이 익어가는 것 또한 일종의 관계의 ‘케미’가 상호작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의 케미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미디어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식초인문학인 셈이다. 

 

식초의 형성 과정에는 발효라는 신비한 작용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발효라는 작용의 배후에 언제나 신의 존재를 느끼곤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발효는 효모라는 미생물 없이는 불가능한데, 효모에도 개성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정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보이지 않는 존재의 부드러운 손이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과정에서 장소 정체성이 백팔십도 형질변경된 신도시 주민들 간에 인정도 싹트고 새로운 동네문화가 형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음식에 초를 쳐서 숙성하듯이, 사람들 간에도 ‘초를 쳐야’ 화학적 케미가 형성되며 상호작용이 가능한 것이리라. 

 

 

동탄후마니타스아카데미의 [식초인문학, 식초가 익어가는 동네]는 동네를 다양한 방식으로 디자인하는 생활조형 문화예술교육으로서 적잖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의미는 식초 만들기라는 일종의 소재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최근 문화예술교육 현장에는 식초 만들기를 비롯해 온갖 형태의 다양한 생활조형 프로그램들이 교육과정에 탑재되어 실시되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다양성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핸드메이드 같은 프로그램들이 다양성을 표방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소재주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형태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향 각지에서 핸드메이드 마켓 같은 형태의 벼룩시장이 서지만, 품목도 그렇고 참여한 작가들과 주민들의 상상력도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정의 프로그램이 종료된 후에도 참여 주민들 간에 상호작용하는 프로그램으로서 유지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하는 손의 의미와 문명의 미래를 생각해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라면 더욱 그런 숙고와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되도록 지역에 거주하는 기획자와 강사의 참여는 물론이요, 지역 주민들과의 일상적인 스킨십을 어떻게 형성하고 강화할 것인지에 대한 일상적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주민들과 교류하고 소통할 줄 아는 생활인의 언어에 대한 고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라고 확언할 수 있다. 기획자 또는 전문강사 자신만이 아는 전문용어 내지는 외계어를 구사하며 주민들과 소통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틀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식초인문학, 식초가 익어가는 동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박희선(51) 기획자의 역량이 인상적이다. 특히 주민들의 마음을 무장해제하며 자발적으로 참여를 끌어내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교육이라는 말의 뜻이 누군가의 잠재된 역능과 재능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던가. “혹시 주민운동(CO)을 해보셨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런 적 없다”고 말하는데, 추후에 확인해볼까 하는 생각마저 갖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단독주택에 사는 어느 참여 주민의 집에 수강생들과 함께 방문해 주민들이 눈으로 보고, 느끼고, 직접 말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집주인인 이명선 주부는 남자 수강생 1명(오세욱)을 포함해 십여 명이 우르르 몰려가는 소동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갖은 간식을 내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며 손님들을 환대했다. 이기심(self-love)이라는 개인의 악덕이 사회의 이익이 된다는 식의 견해는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 수강생들 간에 일상적인 스킨십이 더 무르익는다면, 밑반찬과 공동김장을 함께 담그는 등의 공동부엌 형태의 작은 공동체의 형성도 머지않아 이루어지리라 짐작된다. “혁명은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신도시에 문화가 있는가. 온갖 식초가 발효하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사람들 간에 인정이 넘치는 신도시라면, 우리는 “문화가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런 마을이라면 신도시 주민 누구랄 것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선물이 되고, 동네 자체가 비빌 언덕이 될 수 있다. 발효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용해야 함은 물론이다. 일본에서 괴짜 빵집을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한 와타나베 이타루는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에서 자신은 “지역통화 같은 빵 만들기에 도전한다”고 말한다. 그의 이런 말은 발효와 부패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둘 다 ‘썩는다’는 의미에서는 같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다. 화성 동탄후마니타스아카데미의 [식초인문학, 식초가 익어가는 동네] 같은 프로그램이 ‘우리동네’ 신도시 동탄 사람들의 새로운 마을문화를 형성하는데 작으나마 제 역할을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사람들 간에 케미가 무르익어갈수록 인정 넘치는 우리동네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