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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곁봄
  • 시인과 시민으로 살기 위하여
  • 채효정 _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 2014.09.25

 

 

 

 

‘문화예술교육과 민주주의’라는 글의 주제를 받고 나니, 대학에서 하고 있는 강의 중에 <예술과 정치>라는 과목이 생각났다. 이 수업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는 어떻게 우리에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가 등과 같은 물음을 가지고 미적 감수성 및 미적 가치 판단과 정치적, 윤리적 판단과 행위의 관계를 탐구한다. 한 학기 동안 우리의 탐구는 다양한 감각들을 실험적으로 사용하면서 ‘감각, 미적 감각, 공통감각, 상상력, 창조적 행위, 예술과 기술,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예술의 공공성’ 등의 주제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예술과 정치의 공통적 기반에 놓여 있는 어떤 ‘감각하는 힘’의 의미를 서서히 알게 된다.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 활동에도 옳은 행위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활동에도 모두 이 ‘미적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보통 우리는 감각 능력은 본능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성 능력과 달리 연습하거나 몸에 새기지 않아도 자연히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성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용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거칠고 무뎌진다. 그러면 우리는 제대로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된다.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난 학기 수업 시간, 모든 과목에서 항상 잘 해왔던 한 학생이 있었다. 그는 ‘배는 왜 침몰하였는가’라는 물음 앞에 과학적, 논리적 사변적 분석을 피하고 예술적이며 정치적인 감각으로 진실에 다가가 보라는 기말시험 문제를 받고 A+을 받기 위해 필요한 그 감각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그제사 깨달았다. “슬프지가 않아요. ‘세월호’를 보면서도 저는 슬픈 일이라고 ‘생각’만 했지, 제 마음은 슬픔을 느낄 수 없었어요.” 슬픔을 느낄 수 없다고 한 학생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슬퍼할 시간이 없는 걸요. 지금 이 순간도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 오늘날 우리는 불감(不感)의 인간들이 되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의 불감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통감각의 와해’라고 하는 심각한 사회, 정치적 문제를 낳는다는 것이다. 공통감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나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고, 또한 감정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함께 표출할 수 있는 감각이다. 그래서 이러한 감각 능력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역량이기도 하다. 감각할 수 없다는 것은 예술적․도덕적․정치적 감각, 즉 모든 종류의 현실감의 총체적 상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이 ‘기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괴물은 근대인들이 두려워 한 ‘야수와 같은 인간’이 아니다. 정말로 반사회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인간은 오직 형식적 논리로만 사유(계산)하는 ‘기계와 같은 인간’이다. 

 

<예술과 정치> 수업 시간에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먹어도 되는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막상 토론을 시작하면 먹을 수 있다는 의견과 먹을 수 없다는 의견이 반반이다. 더 놀라운 것은 ‘먹을 수 없다’고 하는 학생들이 딱히 휴머니스트인 것도 아니고, ‘먹을 수 있다’고 하는 쪽이 냉혈한들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각자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대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고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토론의 말미에 이르면 우리는 사람을 먹으면 안되는 백 가지의 이유만큼 사람을 먹어도 되는 백 가지의 경우의 수와 합당한 이유를 말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이 토론은 이 경악할 만한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에 이르러 모두가 놀라며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벌인 열띤 토론과 그 속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사실은 자신이 정해 놓은 어떤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들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나는 인간을 먹겠어’ 혹은 ‘나는 인간을 먹지 않겠어’라고 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일 뿐, 과학적 근거나 논리적 이유가 그것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오직 한 학생이 이 토론의 함정을 벗어 나왔는데, 그는 몹시 불쾌한 얼굴로 나에게 거칠게 항의를 하였다. “정말 역겹네요. 지금 우리가 왜 그런 토론을 해야 합니까? 인간을 먹어도 되냐니, 그게 무슨 헛소리란 말입니까. 인간을 먹다니요? 제가 교수님을요? 아니면 교수님이 저를 먹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면 조금 전에 저랑 같이 밥 먹고 온 이 친구를요? 다 사람이란 말입니다. 사람이라고요!” 

 

그의 말에는 논리나 과학 따위란 없었다. 그는 몹시 흥분해서 거의 짐승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옆 사람을 쳐다보게 되었고, 사람을 먹는다는 것이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비로소 사람을 먹는다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역겨운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된 순간, 인간의 이성적 논리는 사람을 먹어야만 하는 백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먹어도 된다는 쪽이 논쟁에서 이긴다면 어떻게 할 텐가? 과학적 근거와 정당한 절차에 따라 ‘인육처리법’ 같은 법안이 통과되기라도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할 텐가? 강을 파헤치고 물길을 막아야 하는 백만 가지의 합당한 이유도, 고압 송전로와 원전건설 계획의 타당성도, 그런 식으로 ‘합리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더 이상 별도의 부연 설명은 필요 없었다. ‘번쩍’ 하고 어떤 섬광이 지나갔을 뿐이다. 지금까지 해온 복잡한 설전의 과정들은 그 섬광에 의해 단칼에 정리되었다. 우리는 할 말을 잃었지만, 어쩐지 마음은 답을 얻은 듯 평화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나만은 사람을 먹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결심에 이르도록, 그는 우리를 이끌었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득된 것이 아니라 감동받았고 미적으로 압도되었다. 그는 기계처럼 계산적 사유에 몰두한 우리에게 자신의 심장을 꺼내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그만두도록 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있다니, 얼마나 놀랍고 반갑던지. 그는 ‘시인다운 시민’의 모습으로 내 머릿속에 깊이 남았다. 하지만 그 후로 그런 사람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런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서 태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이야기는 미적 감각 능력이 어떻게 정치적 역량과 연결되고 민주시민의 미덕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보통 민주주의는 이성과 토론으로 상징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위의 행동은 비(非)시민적인 행동이다. 토론의 질서와 규칙을 어기고 ‘깽판’을 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말의 규칙 대신 자신의 미적 감각을 믿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마치 중립적이고 공정한 사회자인 척하며, 그토록 부조리한 질문을 마치 합당한 것인 양 합리적인 형식 속에 집어넣고 토론을 이끌어가고 있는 한 사람의 독재적 권위자임을 모두에게 폭로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성 사용의 규칙 또는 토론의 질서나 법치주의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독단적 권위와 엘리트적 지배를 ‘온몸으로’ 거부할 수 있는 ‘힘’에서 시작된다.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시민(市民)은 무엇보다도 시인(詩人)이어야 한다. 시인은 규칙을 파괴함으로써 신선한 감동을 주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시인의 감각이 없이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시민이 될 수 없다. 규칙을 지키는 데만 익숙한 시민은 신민(臣民)화되어갈 뿐이다.

 

시인이 시민이 되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에서 출현한 민주주의라는 대사건의 핵심이었다. 물론 그때의 시인이란 지금과 같은 좁은 의미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다. 호메로스가 장인(匠人)의 기예를 찬미한 헤파이스토스 찬가에서 시인과 장인은 구분이 없고,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사람은 모두 시인들(poietes)이라 불렸다. 그리스에서는 그런 장인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민중(demos)을 위한 일(ergon)’이란 의미에서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 했다. 그들은 예술적 기예(techne)를 가진 노동자였다. 이들 예술-노동자들인 고대의 장인들, 농부, 어부, 석공, 목수, 제화공, 대장장이들이 고대 민주정치의 주역인 데모스의 실체이다. 그들은 시간을 내어 폴리스의 일에 참여했고, 거기서는 마치 방목지를 함께 관리할 때처럼 서로 공평하게 돌아가면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폴리스에서 공공업무를 볼 때 그 일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데미우르고스’라 불렀다. 이처럼 근원적으로 민주주의는 민중의 정치적 소질이며 그 자체가 곧 노동하는 민중의 문화이고 기예(techne)이다. 

 

그렇다면 다시금 우리는 어떻게 시인이자 시민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 해답의 단초를 저 민주정체를 만들어낸 데모스들에게서 본다. 답은 ‘노동하는 인간’이다. 노동할 때야말로 인간은 모든 감각을 다 살려내어 쓰기 때문이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각종 사상을 통해 노동을 천하고 열등한 일로 규정해왔고, 자본주의 경제가 노동을 소외시키고 기계적인 것으로 만들었지만, 원래 노동은 인간의 가장 전인적 활동이자 기초적인 교양교육이었다. 고대의 민주주의 역시 근대의 귀족적 공화주의자들이 해석하여 왜곡한 것과 달리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여가의 정치 활동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함께 하는 노동’이었고 거기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예술교육과 민주주의란 주제를 고민할 때도 너무 방법론적인 것에 치우치지 않았으면 한다. 학습자와 교수자 간의 소통, 평등하고 상호적인 관계와 쌍방의 배움은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그 자체가 민주주의는 아니다. 문화예술의 저변 확대나 예술의 문턱을 낮춘다고 해서 그것이 민주주의인 것도 아니다. 합리적인 토론이 민주주의인 것도 아니다. 그런 방식은 학교 거버넌스에서도 가능하고, 자유주의적 교육론 속에서도 지지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시장에서도 환영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적인 것의 회복, 정치적인 것의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장경제가 파괴한 ‘인간다운 노동’과 그것에 대한 미적 감각을 다시 창조하는 것이다. 노동을 예술적이고 정치적으로 만들고, ‘민중의 문화와 예술로서의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새로운 차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원래 시인(장인)이었던 사람들과 그들의 노동의 세계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예술-정치적 힘은 오랫동안 머리만을 써온 사람들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아직은 남아 있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