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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곁봄
  •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초청강연회
  •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_작가
  • 2014.09.19

 

 

 

 

[평촌아트홀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초청강연]

 

안녕하세요. 이렇게 오늘 강연에 초대되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 방문이 두 번째인데요, 첫 방문으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직접 보면서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습니다. 10년 전 제가 왔을 때 공간 민들레가 사회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분탕질을 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민들레의 트러블메이커로서의 역할 덕분인지, 교육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이런 휴가철에 강연을 한다고 하면 교사가 한 5명 왔을까요. 여러분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계신지를 증명해주는 게 여기에 계신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습니다. 우선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시면서 이것은 꼭 질문해야지라고 생각해거나 이것은 꼭 이야기해야지라고 생각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Floor 질문]

 

청중1 : 저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이자, 선생님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야생성을 길러줄 수 있는지. 말 잘 듣고 통제 잘 되는 아이들만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 아이들의 오감을 기를 수 있을까. 굉장히 궁금해 하면서 왔습니다. 그런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청중2 : 저는 아동발달센터에서 일반 아이들이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치료하는 치료사인데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통 ADHD 아이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아이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교사들이 기피하고 어려워하는 대상인데, 거기에 대해 선생님의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청중3 : 저는 거꾸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아동기에는 가만히 있지 못하던 아이들이 청소년기가 되면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럽니다. 그냥 게임이나 수다만 하면 된다고 해서, 저는 그게 답답하거든요. 그래서 혹시 그 아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야기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연 시작]

 

 

 

 

[아이들의 ‘내면의 야생성’에 대해 강조하는 크리스]

 

 

1. 잠들어버린 아이들의 감각을 어떻게 깨울까

 

지금 던져주신 세 가지 주제만 이야기 하더라도 오늘밤을 샐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는데 그 중의 명강연을 꼽는다면 질문으로 시작하는 강연입니다. 하지만 꼭 이 이야기는 해야겠다고 준비해온 게 있어서, 그 부분만 공유를 하고 강연을 이어가겠습니다.

 

제가 입국한 날이 ‘세월호 참사’ 100일이었습니다. 추모제가 열렸었죠. 김경옥 선생님께서 저를 시청 앞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때 새긴 문신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잊지 말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이야기 생각만 하면 저도 슬픔에 잠기게 되는데요. 저도 다짐을 했습니다. 잊으면 안 된다고. 여러분과 함께 기억을 하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가 참사로부터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다시금 못을 박고 시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세 질문이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10대 청소년들의 너무나 수동적인 모습, 게임 외에는 아무런 의욕도 없는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고민인데요. 사실 선생님께서 해주신 질문 안에 해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가진 오감을 깨워야 하는 거죠. 

 

이제 시작해보겠습니다. 다 연결을 해보겠습니다. 아이들의 감각을 어떻게 깨우느냐가 질문이 될 텐데요.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감각은 우리가 굳이 깨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감각은 폭발적으로 살아있습니다.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전부 다 처음이기 때문에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이것을 익힙니다. 그렇기 때문엔 왜 이렇게 ‘깨어있는 채로 태어난 아이들의 감각이 잠들어버리는가’가 더 핵심적인 질문일 수 있습니다. 어떤 질병에 걸리는 것보다 그것을 예방하는 것. 그래서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쉽죠. 물이 엎질러지기 전에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길들여진 아이들>이라는 책을 쓴 겁니다. 답변을 드리자면, 그것이 계속 살아 있도록 하는 ‘경험’을 아이들이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대 사회의 문제이고요. 현대에 들어서 생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크리스의 유년기

 

제가 유년기를 보내던 그 시절에는 제 감각은 깨어있었습니다. 살아있었습니다. 서울만큼 복잡하진 않지만 저도 워싱턴이라는 도시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시에서 자라면서 매일같이 항상 집 밖에서 뛰어놀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만 3세 정도 되었을 때 나만의 텃밭도 키웠고요. 테이블만큼 손바닥만 한 텃밭에 불과하지만 콩도 기르고, 딸기도 기르면서 제 텃밭을 운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만 5세 정도가 되었을 때 손수레를 끌고 돌아다니면서 빈 소다병을 주워가면 병 당 2센트씩 주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엄청 벌었죠. 5세만이 가질 수 있는 미인계를 사용하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빈 병을 많이 주죠. 그래서 돈을 많이 끌어 모았습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에는 노상에다가 갑판 대를 차려놓고 차가운 음료수와 캔디를 팔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0살이 되었을 때는 잔디 깎기 기계를 구입해서 동네 이웃들의 잔디를 깎아주는 알바도 했습니다.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키우는 텃밭을 제가 돌봐주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때는 진짜 큰돈을 만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현찰이 항상 주머니에 가득했고요. 그래서 아버지가 저한테 돈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학교생활이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굉장히 지겹고 따분했지만 다행히도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6시간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생활이라는 것이 제 삶에서 그렇게 큰 방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집 밖에 있었습니다. 엄마는 제가 뭐하고 다니는지 몰랐습니다. 저녁 먹을 때만 들어오면 됐습니다. 물론 시간 맞춰 들어와야했지요. 그렇게 어머니는 내가 책임있게 나 자신을 돌볼 수 있을 거라 믿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제가 안 가본 곳이 없이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어느날은 강변으로 가서 낚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낚시터에 있는 나이 드신 강태공 할아버지들께서 어떻게 하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는지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지렁이를 끼워서 낚시대를 던지기 전에 거기에 침을 뱉으면 고기가 많이 온다는 것도 할아버지들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3. ‘내면의 야생성’이 잠들어버린 ‘길들여진 아이들’ 

 

어른이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제 유년기와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됐는가를 고민하다가 쓰게 된 책인 <길들여진 아이들>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질문, ‘왜 우리 아이들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에 대한 답을 하며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내면의 혼, 불씨를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 불씨를 이 책에서 ‘내면의 야생성’이라고 지칭을 했는데요. 이건 일종의 ‘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 혼령, 영’이라고 단어가 너무나 많이 쓰이다보니,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새롭게 ‘아이들의 혼’을 특별히 지칭할 수 있는 말을 제가 만들어낸 게 ‘야생성’이라는 단어입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영혼을 모든 아이들이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야생성’은 굉장히 생명력이 강하고 끈질깁니다. 하지만 굉장히 취약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야생성이 굶게 되면, 우리가 그것을 굶기게 되면 죽지는 않지만 잠들어버립니다. 야생성이 먹는 것은 풍부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는 이 아이들이 분만 과정에서부터 외부의 무언가로부터 통제가 받으며 태어난다는 겁니다. 아동기 자체가 위기에 처한 겁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이나 미국만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이나 미국은 위기임이 분명합니다.) 세계 어디에 가도 이런 유년기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축화하고 있다는 거죠. 아이들을 길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나열을 여기서 다 이야기할 시간은 없지만 제가 책에서 명시를 하고 있습니다. 유년기의 어떤 단계마다 어떤 통제가 가해지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건지 제가 책에서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 있는 몇 가지 사례만 여러분과 나눠보겠습니다. 

 

 

4. 부모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예를 들면 오늘날은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훨씬 더 많은 통제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부모를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부모들이 훨씬 더 아이의 삶을 통제하게 된 데에는 ‘두려움’이 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녀가 있는 사람이면 다 이해를 하실 겁니다. 이 아이가 위험에 처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면 아이를 보호하겠다는 보호본능이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의 근간이 되는 두려움이 무엇인가, ‘부모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부터 파헤쳐봐야겠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면요. 제 어머니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지금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메시지들이 거의 융단폭격처럼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안전과 관련된 메시지를 너무나도 많이 끊임없이 받게 되는데요. 물론 이 문제는 굉장히 까다롭고 민감한 이슈가 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부모인들 아이가 안전하지 않길 바라진 않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런데 너무 이 안전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는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 어떤 아주 작은 사고도 일어나지 않게 미리미리 예방을 하는 데에 모든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직시해야 할 것은 우리가 받는 유아와 아동에 관련된 메시지들이 그런 유아안전용품을 제조하는 기업으로부터 온다는 겁니다. 또 거기다가 보험회사도 한 몫을 하고 있죠. 미국에서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다치면 놀이터 운영 업체에 소송을 하게 됩니다. 거액의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해서 소송이 제기가 되죠. 그리고 여기다 언론도 그 두려움을 증폭시키는데 한 몫을 합니다. 24시간을 언론에 노출되다 보니까 계속해서 아이들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메시지와 항상 접속하게 됩니다. 누군가 보호자없이 아이가 혼자서 놀고 있으면 납치범에 노출이 되는 거라는 식에 메시지에 항상 노출이 되는 겁니다. 한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국은 사실 따지고 보면 제가 30년 전 유년기를 보냈을 때와 그렇게 크게 위험해졌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위험 수준은 비슷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납치범은 있었습니다. 가끔씩 유괴 사건이 언론을 타고 보도가 되기도 했었죠. 그런데 요즘도 유괴사건은 가끔 일어납니다. 요즈음 유괴사건이 일어나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를 합니다. 결국은 이런 많은 이유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아이들에게 위험천만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요.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인식이 달라진 겁니다. 현실적으로 따져봤을 때 지금의 아이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안전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안전한 세상이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인식은 세상이 위험하다는 데 닿아 있기 때문에, 부모의 행동은 그것으로부터 비롯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들로서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우리가 가진 인식을 제고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받은 메시지를 어떻게 받았고 가지고 있게 됐는지 검토를 해봐야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토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두려움을 양산해내는 메시지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5. 내면의 야생성을 먹여 살리는 ‘놀이’

 

부모로서 당연히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우는 것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놀다가 넘어져서 찰과상을 입거나 다치는 것까지 다 예방을 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의무는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내면의 야생성이 매일같이 먹고 자라야 하는 것,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진짜 경험’입니다. 어른이 통제해서 만들어주는 경험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체험을 계속해서 아이가 해야 한다는 거죠. 심지어 넘어지는 것도 아이에게는 필요한 경험입니다. 위험을 어떻게 감지해야 하는지 아이가 스스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죠. 아이들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도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나무가 있으면 아이는 올라야 합니다. 그것이 아이에게 필요한 경험입니다. 심지어 올라서 떨어지더라도 아이는 그것을 오르는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그런 도전정신, 계속해서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정신을 발휘하지 못한 다면 감각, 그 야생성은 잠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내면의 야생성을 먹여 살리는 굉장히 중요한 핵심 재료는 ‘놀이’입니다. 아이들은 놀면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놀이에는 정말 각양각색에 있습니다. 비디오게임을 하는 것도 놀이에 속하죠. 그런데 내면의 야생성에게 가장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특유의 놀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내면의 야생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있는 놀이가 그야말로 학습과 배움에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모와 교사들이 충분이 언급을 하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이것은 배움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배움의 일부가 되는 놀이에 대해서는 제가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시간상 근거를 말하지 못하지만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놀이가 배움이라는 근거에 대해서는 책에서 한 장을 할애를 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놀이는 아이가 스스로 주도하는 놀이입니다. 그리고 이 놀이는 자발적이고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놀이입니다. 그냥 재밌고, 신나니까 하는 놀이입니다. 왜 하는지 모르는 놀이입니다. 학습목표도 없습니다. 그리고 신체를 이용하는 놀이인거죠. 그리고 또 대자연도 동원이 되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놀이가 오늘날의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놀이를 아이들이 매일같이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6. 아이의 유년기를 훔친 ‘학교’

 

학교로 넘어가야겠죠. 그래서 지금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이유가 요즘 아이들이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유년기를 학교가 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시아 국가에서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여기 오면서도 봤는데, 학교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학교가 아이들에게 가하는 그 압력은 가히 치명적입니다. 비유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아이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이런 식의 압력에 계속 노출되다 보면 아이는 수동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비디오게임도 하고 스마트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들의 시간을 대부분 차지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것보다는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서로 어울리고 Facebook이 아닌 Face to Face로 노는 것이 아이들의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문제제기 하신 청소년들의 수동성은 그것 자체가 병이라기보다는, 그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앓기 시작한 질병의 하나의 증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비단 한국이나 아시아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나타납니다. 미국에서도 우울증이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이 20-30대이고, 항우울제 복용률이 가장 높은 것도 20-30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울증이라는 게 전염병처럼 미국 전체에 퍼지고 있는데요. 저는 이 원인이 바로 길들여진 유년기라고 책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5분 남았다고 하네요. 5분 안에 세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7. 학교가 만든 꼬리표 ‘ADHD’

 

ADHD에 대해서도 제가 몇 마디를 꼭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물론 몇 마디 말로는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아동기의 변화된 환경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죠. 저는 ADHD를 그렇게 규정합니다. ADHD가 어떻게 증상으로 나타나는지 설명하는 두 가지만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유아기를 보내는 걸 보면 아이들이 놀이가 들어있는 풍부한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TV를 너무 많이 본다거나 자연을 접하지 못하거나 한 상태에서 교실 안에 갇히게 되면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거죠. 불안에 떨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정서적인 문제도 한 몫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선천적인 부분도 있다는 것에 저는 동의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그렇게 태어난 거죠. 어떤 아이들은 우리가 꿈에 그리는 ‘가만히 있는 말 잘 듣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도 있습니다. 50년 전만 해도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 때문에 몸을 떤다고 해서 그 아이가 비정상으로 취급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동기를 너무 성공적으로 길들여 놓다보니까. 길들여진 아이들을 다 수동적인 아이들로 대량생산을 해놨죠. 그리고 거기서 새나간 아이들은 비정상이거나 질병이라는 꼬리표를 달아버리는 거죠. 사실은 ADHD라는 꼬리표도 부모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만든 겁니다. 교사가 보기에는 길들여진 아이들 사이에서 문제가 되는 아이들이 있다는 거죠. 유독 가만히 있지도 않고, 지시도 듣지 않고, 그런 아이들 때문에 교사가 ‘돌아버리겠다’ 그러면서 그 아이를 규명하기 위해 이런 병명이 만들어진 거죠. 그래서 학교에서 만든 겁니다. 굉장히 복잡한 사안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파다보면 날이 샐 수도 있겠지만. 간단히 말해서 저는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학교가 문제다. 학교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 초반에 던져주신 세 질문으로 강연을 한 시간 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크리스메르코글리아노 초청강연의 질의응답 내용은 지지봄봄 방담회 코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