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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불어 잘 사는 게 불가능해지는 시대의 평화교육 평택시립도서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평화로운 나를 만나다’
  • 강원재 _땡땡은대학연구소 1소장
  • 2014.06.23

지지봄봄 10호 _ 현장에서 논하다

 

더불어 잘 사는 게 불가능해지는 시대의 평화교육

평택시립도서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평화로운 나를 만나다’

 

 

 

강원재(땡땡은대학연구소 1소장)

 

 

 

  평택시립도서관의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프로그램인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평화로운 나를 만나다>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평화에 대한 감각이란 자기중심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함을 참여 청소년들이 알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독서지도자이자 치료사로서 이 프로그램의 주강사로 참여하는 조은정 선생은 “평화는 어렵다.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할 것인가? 나 역시 스스로의 평화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데 말이다. 외부 현상에 반응하는 것 또한 나의 선택. 내가 (나의 중심을 세우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것! 평화롭지 않은 나를 바라보는 생활, 즉 알아차림이 생기는 것. 나를 관리하는 방법을 알게 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이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그리고 부모들이 이 프로그램의 설명회에 참여해야 수강신청이 가능했기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기본적으로 정보력 있는 부모의 관심과 관리를 받는 학생들이라는 것이 이번 프로그램을 기획한 평택시립도서관의 사서 교사인 송은희, 유현미 선생의 전언이다.

 그래서인지 지역 내 몇 개의 중학교에서 모인 18명의 1학년들로 이뤄진 수업임에도 ‘허세’와 ‘반항’, 그리고 ‘우울’로 요약되는 사춘기의 증상, 속칭 중2병의 조기증상을 보이며 남녀로 나눠 끼리끼리 뭉쳐 앉은 두 그룹의 ‘어둠 속의 학생들’을 빼놓고는, 다섯 개의 그룹 모두 진지하게 교사의 진행에 따르고 있었다. 또한 전체 20강으로 이뤄진 프로그램의 두 번 째 시간이어서인지 참여 학생들끼리도 데면데면하고 교사와 학생들 간의 관계도 서먹서먹한 면이 있었지만, 또래의 다른 현장 수업에서는 보기 힘들 만큼 다들 수업 내에서의 과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수행해내고 있었다.

 이 날의 수업은 감정카드와 씨앗카드를 나눠서 같은 색깔별로 3~5인으로 그룹을 짓고, 감정상태를 포함한 자기를 그룹 내에서 돌아가며 소개하고, 지난 시간 진행한 각자의 마인드맵을 이어서 완성하고 다시 그룹 안에서 공유한 후, 자기소개서를 한 페이지의 글로 정리하고 제출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어둠 속의 학생들’을 갈라놓으려는 교사의 의도가 분명한 ‘감정카드 색깔로 그룹 나누기’는 이를 먼저 눈치 챈 ‘어둠의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색깔을 맞춰 고름으로써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니 이렇게 이뤄진 두 개의 그룹 내에서는 이후 자신의 현재 감정상태를 나누는 과정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배우기 위해서는 서로 친하지 않아도 같은 그룹이 될 수 있고 그래서 배움의 동료가 되기도 하지만, 이 시간 친구랑 같이 있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게 이 공간밖에 없어서 이곳에 앉아있는 청소년들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교실’이라는 배움의 현장에 있는 아동·청소년들의 많은 수가 후자에 해당될 것이다. 그들은 틈만 나면 자신들의 친밀감이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고, 그러한 행동들은 인류의 오랜 시행착오와 성공의 경험에 비춰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한정된 시간 안에 전수 혹은 깨닫도록 하는 게 역할인 교사에게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경쟁적 교육정책이나 제도 하에 있는 교사의 미덕이 ‘배움’이라는 동기로 후자의 학생들의 동기를 전환하는데 성공하는 것이 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미 ‘배움’을 즐거워하거나 최소한 친구랑 일없이 지내는 것으로 교실에 앉아 있지는 않은 학생들과 ‘어둠 속의 학생들’을 ‘협동’이나 ‘상생’, 또는 ‘돌봄’을 강조하며 함께 배우는 게 잘 지내는 게 되는, 함께 잘 지내는 게 배우는 게 되는 관계를 형성하는 교실의 문화를 만들면서 가기에는 ‘빼야할 진도’가 너무 많고 ‘이뤄야 할 목표’가 너무 분명하다.

 그러한 이유로 실력있는 교사라 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이해심이 많은 부모라 하더라도 ‘낙오’, ‘도태’, ‘실패’, ‘손해’라는 말을 써가며 ‘어둠 속의 아이들’에게 무리의 연대감이나 배신의 비겁함보다 더 큰 ‘실패의 공포감’을 조장하며 어둠 속에서 나오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께 있던 또래들의 마음을 저버리고 돌아설 만큼의 공포가 내면화된 아이들이 성공적 진학과 출세를 놓아두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돌보는데 시간을 많이 쓸 리 없다. 협력이든 나눔이든 희생이든 진학과 부모들의 칭찬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이뤄질 뿐이라는 말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무리를 부정하며 떠나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어둠 속에 남아있는 아이들의 마음은 또 어떠하겠는가? 그 마음들이 빤히 보이면서도 우리 교육은 왜 거기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답이 교사도, 학생들도, 부모들도 모두 여유없음, 자유없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유현미 선생이 지적한 바처럼 여유없음, 자유없음은 이번 세월호 참사를 지켜본 많은 청소년들이 애써 그 사건을 깊숙이 알고 싶어 하지 않거나 많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세월호 선장처럼 무능한 어른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쉽게 해소해 버리고는 만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이지만 언젠가부터 그 시스템을 벗어나 살아가는 게 불가능해진, 자연보다 더 큰 공포가 되어버린, 자본만이 자유로운, 사회학을 하는 엄기호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고 종용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맞춰진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교육정책과 제도 아래에서는 예술교육, 창의교육, 인문학교육 등 다른 이름을 붙여봐야 교사에 의해 통제되어 질서정연하거나 통제권을 벗어난 아이들로 소란스럽거나 둘 중 하나인 교육현장의 비자율적 문화와 학생들의 비자발적 학습 동기화로 ‘교육’과 관련한 어느 곳이든 누구든 걱정하고 고민하게 된다. 

 

 

  평화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사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중학교 1학년이라는 시기가 되면 경쟁적 교육문화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고, 실패에 대한 공포를 주입받게 되고, 성공을 자기의(부모의) 노력과 능력에 대한 마땅한 보상으로 여기기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중학교 1학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평화교육이라니! 그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평화란 표면적으로는 분쟁과 전쟁이 없는 상태일 것이고, 깊은 의미로는 세계를 구성하는 낱낱으로서의 만물 간의 드러난 폭력이든 내재된 폭력이 의식적으로나 구조적으로 제거된 상태이다. 한자풀이의 의미로 볼 때, 평화平和는 ‘두루두루 고루고루 나눠먹는 상태’가 된다.

 표면적이든 깊은 의미든, 한자풀이의 의미든 평화에는 약속이 필요하다. 개인 간의 약속, 개인과 개인이 속한 집단 혹은 환경 간의 약속, 크게는 국가 단위의 약속, 깊게는 자기와의 약속 등등. 약속이란 평등한 주체들이 자발적 의지로써 같이 지키기로 정한 가치나 행동이다. 물론 일방적이거나 위계적인 관계에선 약속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관계에선 ‘명령’이나 ‘지시’, ‘복종’ 혹은 ‘전달’이라는 말을 쓴다. 어쨌든 서로 평등한 주체들이 자발적 의지로 정한, 약속이 지켜지는 한, 약속을 지켜가는 한 평화로울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평화교육이란 약속의 주체가 된다는 것, 약속하는 것과 약속 지키는 것에 대한 감각과 기술, 그리고 의지를 갖도록 하는 교육일 수 있다.

 그런데 학생들과 교사 사이에는 서로 약속한 바도 없이 수업의 ‘입법자이자 사법자로서의 가르치는 이’와 ‘신민으로서의 배우는 이’로 역할이 처음부터 제도적으로나 위계적으로 나눠져 있어서, ‘평등한 주체’와 ‘자발적 의지’라는 약속의 전제부터 성립되지 않는 역설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역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제도가 강제한 서로의 역할을 내려놓고 평등한 주체로서 새로운 관계맺음을 해야 하지만, 이런 상황은 학부모도 교육의 관리자도 바라지 않고, 수업성과의 책임을 져야하는 교사로서도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지금과 같이 아이들의 상태나 의사와는 관계없이 사서 선생님들의 의지로 수립되고 계획된 커리큘럼에 따라 20번의 강의가 진행되고 그 결과물까지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의 평화교육과 수업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과제였다는 역설 또한 변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일찍이 [미적교육에 관한 편지]를 통해 사람은 미적 입장에 서서 감각세계를 자기 밖에 두고, 강제된 세계의 질서로부터 그의 인격을 분리할 때 비로소 세계와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만 환경의 노예가 아니라 입법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구성원 각자가 공동체에 자신의 모든 권리를 자발적으로 양도할 때 계약은 개인과 개인이 아니라 개인과 전체 사이에 이뤄지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공동체에 내놓고, 공동체로부터 모든 것을 다시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계약은 비로소 평등해질 수 있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 교육현장에서 스스로가 스스로의 행위의 이유가 되는 자유自由롭고 평등한 평화의 학습 주체, 교사든 학생이든, 관리받는 학생이든 어둠 속의 학생이든, 미적 학습 주체로서 서로 다른 동기와 역할로 함께 지낼 수 있는 학습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더 크고 깊은 논의를 이어갈 여유 없이는 그럴 수 있는 자유없이는 더 이상 평화든 인문학이든 생태든 더불어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어떤 교육도 불가능해지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