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문화 재단
  •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이미지입니다.
  • 곁봄
  • 카우보이 영혼에서 ‘동물-되기’의 감수성으로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4.06.23

지지봄봄 10호 _ 현장에서 논하다

카우보이 영혼에서 ‘동물-되기’의 감수성으로

_ 빙고믹스 [행복한 동물원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고영직 | 문학평론가

 

 

소설가 최성각의 엽편소설 「절각수(折脚獸)가 아니라면 산다」에는 로드킬 당한 고라니를 야생의 산으로 다시 돌려보내려는 사람들에 관한 훈훈한 이야기가 나온다. ‘절각수’라는 말은 ‘다리 부러진 짐승’이라는 뜻이다. 등장인물들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지상에 나타난 것처럼 다리 다친 짐승을 걱정하며 고라니의 야생 적응력을 생각하는 녹색 감수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누군가가 한 말이 퍽 인상적이다. “아무도 그날 밤, 고라니의 근수를 재지 않았다. 누구도 그날 밤 고라니의 값을 매기지 않았고, 고라니 고기 맛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최성각은 야생동물을 대하는 우리들의 무딘 감수성에 맞서 녹색 감수성의 의미를 강력히 환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야생)동물에 관한 한, 우리는 ‘근수’를 재고 ‘값’을 따지고 ‘고기 맛’에 대해 말하는 수준에 머문 것 아니냐고 힐난하는 듯하다. 어쩌면 동물에 대해 그런 도구화된 시각을 내면화하는 것 자체가 ‘사람’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생태소설가 최성각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짙은’ 녹색문학 작가라는 반열에 오른 것도 그런 녹색가슴의 소유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우리는 동물을 비롯해 자연에 대해 공경(恭敬)하는 마음의 생태학을 자주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동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남아공 출신의 백인 작가 존 쿳시는 소설 『동물로 산다는 것』에서 소설 속 화자의 어머니를 통해 “동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 질문은 동물에 관한 우리의 오도된 인식론 자체를 전복하려는 큰 물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동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동물을 그저 살아 있기는 하지만 기계가 살아 있는 것과 같다”고 정의한 근대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생물학적 자동기계론의 입장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간주해도 좋을 법하다. 철저히 인간중심주의에 바탕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은 현대에 와서 동물실험실과 공장식 축산업 시스템이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사유의 알리바이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물에 관한 한, 조작과 통제 혹은 분리와 격리의 신화를 철저히 신봉하는 심성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동물원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동물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이른바 ‘노아의 방주’ 식 사고에서 비롯하였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동물을 도구화하는 근대 제도들이 인간의 삶과 죽음 또한 강력히 규정했다는 점이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최초의 자동차 생산라인을 구상할 때 도살장에서 착상을 얻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리고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죽음의 강제수용소를 구상한 히틀러 또한 공장식 축산업의 도살장 시스템에서 절멸의 강제수용소에 관한 힌트를 얻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동물을 수단으로 대하려는 우리의 사유와 인식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과 자연에 관한 우리의 ‘규범적’ 생각과 감수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려는 되구부리기의 과정이 요구된다. 일종의 사유의 ‘변침(變針)’이 필요하다. 시애틀 추장이 1854년에 행한 저 유명한 연설에서 “사슴, 말,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라고 말한 위대한 선언을 실제 우리 삶에 복원하려는 행복의 제도화 과정이 요청된다고 감히 말해도 좋으리라. 

 

최근 서울시가 서울대공원 운영을 비롯해 유기동물, 반려동물, 길고양이, 반려 목적 이외의 모든 사육․실험동물의 복지 향상을 위한 종합적인 플랜 <서울 동물복지계획 2020>을 마련해 발표한 것은 매우 적절한 정책적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하다. 이른바 동물복지를 강화하려는 이러한 플랜이 동물에 대한 연민의 차원을 벗어나 동물 자체에 대한 생명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공론장을 형성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동물권에 관한 논의는 우리 자신의 야생적 욕망을 인정하고 회복하려는 과정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복지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지난 2009년 9월 서울대공원에서 쇼를 하던 돌고래 ‘제돌이’가 제주 앞바다에 방생된 ‘사건’을 겪으며 적잖이 변하고 있는 중임을 우리 자신도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제돌이 방생 사건은 동물의 재자연화와 야생화의 중요성에 대해 강력히 환기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혹자가 동물원 같은 노아의 방주 식 사고와 시스템에 대해 “사랑을 가장한 오만”(폴 셰퍼드)이라고 강력히 탄핵한 점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원)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물론이요, 시스템의 변화를 위한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다. 이런 사유와 행동이 없는 사회에서는 동물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복지 또한 언제나 항상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2011년 구제역 파동 당시 380만 마리의 소․돼지가 몰살당했지만, 우리는 아무런 죄의식조차 없이 ‘살처분(殺處分)’이라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를 남용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런 무례한 태도야말로 우리 자신이 ‘카우보이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법하다. 

 

어린이들과 함께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진행하는 빙고믹스의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 [행복한 동물원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할 수 없다. ‘동물원’이라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이 프로젝트는 문화예술교육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우리의 주목을 더 끄는 것은 아이들이 동물과 동물원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의 혁명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아이들은 자연은 말할 것도 없고, 동물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며 살고 있다. 놀 시간이 없고, 놀 공간이 없으며, 놀 친구가 없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일수록 가정과 학교에서 키우는 반려동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 하지만, 실상 그 관계는 ‘애완’의 대상인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이 동물들과의 교감과 소통을 통해 서로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감수성을 형성할 수 있다면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으리라. 만일 아이들이 동물을 이용과 조작의 대상으로만 보려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만 있어도 그것은 작은 성과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동물복지 프로그램과 문화예술교육이 더 자주 접속하고 교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 또한 동물복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며 감수성 또한 더 풍부해지는 듯했다. 아프리카 동물관을 답사하는 탐험가 되기 체험에 나선 5학년 신지연 양은 “동물들을 더 알게 되니까 더 사랑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동물행동 풍부화를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함께하며 동물원의 동물들을 보는 관점에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자신의 ‘촉각’을 최대한 활용해 동물원 동물들을 생각하며 노래를 만들고, 유인원 집을 만드는 등의 체험을 하며 진행된다. 프로그램을 마칠 무렵에는 동물원 직원들과 함께하는 작은 파티를 열 계획이다. 

빙고믹스의 [행복한 동물원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프로젝트는 동물복지 증진을 테마로 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최근 서울대공원에서도 동물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고 한다. 동물원에서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는 의미에 대해 지금보다 ‘더 확장된’ 사유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나는 ‘동물-되기’의 관점을 적극 수용하여 프로그램으로 구현하려는 예술교육적 접근법을 더 집중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십대 아이들은 예술적 상상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감응할 수 있는 마음의 생태학을 여전히 간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동물-되기의 관점을 적극 채택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동물로 변용(變容)할 수 있는 능력을 끌어내는 일과 같다. 환경관리주의의 연장선에 놓인 동물복지의 관점을 넘어 예술적 방식으로 생태중심주의의 관점을 더 적극적으로 접목해야 하는 것이다. 

 

 

동물원 안과 밖의 전문가들이 서로의 지혜를 모아 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외화할 수 있는 다양한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 동물-되기의 감수성 교육은 동물원이라는 장소 특정의 기반에서만 이루어지는 교육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동물원 담장 밖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문화예술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빙고믹스 측에서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이러한 확장된 시선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교육 과정에서 “동물복지냐 동물권이냐?” 하는 의미 있는 사회적 논의의 장 또한 형성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동물원은 동물을 학대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동물을 학대하는 사회는 사람 또한 함부로 취급하는 사회라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우리 안의 생태적 이성이 눈을 떠야 한다.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