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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찬국 _Dongdaemun Rooftop Paradise 옥상농부
  • 2013.06.23

지지봄봄 10호 _ 칼럼

빈 곳으로 흐르는 예술을 위한 다양한 마주침도 기대하면서

 

 

 

 

박찬국 (미술, Dongdaemun Rooftop Paradise 옥상농부)

 

 

빈 곳으로 흐르기

한 때는 국민건강 증진을 위해 개방이 대세였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이제 정말 관계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금지된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담장은 온통 철조망으로 둘러쳐 있고 감시 카메라와 순찰차까지 세팅되어 있었다. 관리를 효율화하기 위해서인지 후문으로 쓰던 쪽문은 아예 폐쇄되어 있었다. 세월호 사건 1년도 전에 본 풍경이니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안전이 최대의 화두이지만 꽁꽁 싸매는 미봉책만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내부의 압력을 지탱할 수가 없다. 어디가 터져도 터진다.

 

  그런데 이렇게  철조망과 cc-tv, 순찰차 등 타인을 모두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수많은 경고들과 몸사림, 불안을 부추기는 '사회적 허둥댐'이  아이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놀이터 디자인으로 유명한 귄터 벨찌히씨는 '위험한 놀이터'가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위험을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부모가 (위험해 보이는) 놀이터에 함께 가더라도 서로 직접 볼 수 없이 소리만 들을 수 있게 디자인하여야 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위험을 몸으로 판단하고 즐길 수 있어야 오히려 반사적으로 위험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해를 가하는 상대가 없는 물리적 환경으로서의 놀이터와 예측이 어려운 사회적 환경으로서 위험공간 문제는 다르다. 약자가 약자를 공격하는 사회적 문제는 훨씬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과 얽혀 있어서 단순하게 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듣고 있는 것과 같은, 더 예민하게 감지하려는 상호 관심과 사회적 연결망이 있다면 위험을 예방하거나 방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타자에 대한 불신이 아닌 관심이 사회적 문제 해결의 초점이기 때문이다. 

 한 발 나아가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위험이냐 안전이냐의 양자 구분이 아니다. 위험을 타고 넘으며 '생존의 흥미로움'을 즐기고 유지할 수 있는 놀이터와 같은 의미의 사회적 환경, 교육적 환경이 필요한 것이다. 

 

마주침

작년부터 한강 노들섬과 우연히 만나게 되어 이렇게 저렇게 놀고 있다. 최근에는 함께 공부하고 있는 청년학교 친구들이 노들섬 숲에서 며칠간 노숙을 했다. 철조망으로 금지된 섬 동쪽 숲에 들어가 도시 야생의 재미를 보기도 하고 서쪽 농사짓는 곳에서는 약간의 채소와 허브를 키우기도 하면서 상상하지 못했던 도시의 빈 곳과 만나고 있다.   한강에 이런 곳이 있다니... 처음에는 농사도 낯설고,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뜬금없는 인공 구조물도 낯설어 했다. 둘러보다보니 야생에 가까운 잡목 숲, 잡초가 삐죽삐죽 삐져나온 커다란 헬기장, 조용한 낚시꾼들, 호젓한 산책길, 다리 보수 공사장, 물가 버드나무 등 등,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환경과 만나며 호기심이 발동한다. 좀 더 가까이 가면 세월에 빛바랜 출입금지 경고 간판, 간이 주거를 만들고 노숙하고 있는 사람, 어두운 방공호들, 맹꽁이 서식지, 아카시 나무와 계수나무도 만난다. 몰래몰래 드나들며 농사와 가축을 키우는 괴짜 아저씨와 만나 어마 무시한 노들생활 얘기까지 들으면 흥미진진해진다. 그러면서 비어 있다고 정치적 쟁점이 되기도 하는 이곳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청년 몇 명은 급기야 노들의 야생 상황을 즐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노들유령' 놀이를 시작하였다. 철조망 일부에 구멍을 내고 숲 가운데 아지트를 구축하여 섬의 온전한 하루와 만나기도 하였다.  한강 노들섬이라는 지도상의 덩어리, 도시계획 안의 한 지점이 아니라 아름다운 노을과 구석구석 계절의 속살이 만져지는 감각되는 장소로서 노들섬과 만난 것이다. 감각된다는 것. 감각은 예비된 것으로서 지각과 달리 즉각적인 마주침을 의미한다. 학습된 세계가 아니라 새롭게 마주하는 세계이다. 감각의 마주침은 체계화된 지식이나 익숙한 경험이 아니라 두뇌의 여러 부위를 활성화하고 상상을 자극한다. 각인되어 있다가 창조적으로 되살아날 확률이 높다. 

 

 이런 행동들은 무슨 일이 터지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문제를 회피하는데 골몰하는 시스템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일의 명백한 성과만을 요구하는 체제에서도 시도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을 포함하여 한국 사회의 학교에서 시도할 수 없는 게 당연한 현실이 되었다.

 청년들은 노들섬에서 그들 자신의 주거문제와 도시 삶의 문제, 정치적 문제, 관리 사회의 문제 그리고 단순해 보이는 콘크리트 더미 곳곳에 숨어 있는 수많은 공간의 차원과 켜를 동시에 만나고 새롭게 인식하였다.  행동과 대화가 생기고 SNS로 공유되고 있다. 채소를 기르고 맛 본 감각으로 사람들과 만나서 요리하고 교류한다. 그 경험으로 도시농업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기도 한다. 문제는 체험이 아니라 마주침이다. 

 

빈 땅, 빈 기획, 빈 생산

 책임지지 않으면서 성과를 내야하는 딜레마에 빠진 경직된 사회에서는 기획들이 지나치게 난무한다. 일 하고 싶지 않으면서 일 해야 되는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무표정하거나 과장된 엉뚱한 기획들은 공간을 점유하고 시간을 소비한다. 삶을 소모시킨다. 사회 스스로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 위험을 과장하거나 실제로 증폭시킨다. 철조망치기, 감시카메라 달기, 담 쌓기와 같은 일차원적 대응으로 이어져  상상력을 말살하고 공포를 퍼뜨린다.  

사회와 학교가 다를 바 없는 현실에서 예술은 빈 땅, 빈 기획, 빈 생산을 통해 자연과 마주하고 사람과 마주하고 도시와 마주치는 다른 대응을 해야 한다. 틈으로 흘러들어 균열을 내야 한다. 움직이면서 생각해야 한다. 

그나마 유연하게 좌충우돌 할 수 있는 예술의 역할이 아닐까?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