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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은 나의 힘, 의례는 나의 노래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3.12.31

 

 

 

 

미국 교육자 호머 레인(1876-1925)은 영국에서 리틀 커먼웰스(The Little Commonwealth)라는 소년원을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1912년 영국으로 간 호머 레인은 자유와 자치를 기초로 한 교화 프로그램으로 천하의 ‘골통’들을 변화시켰다. 1918년 내무부 명령으로 문을 닫기 전까지 리틀 커먼웰스를 그렇게 운영했다. 이 놀라운 교육적 성취는 서머힐 학교를 설립한 교육자 A.S.니일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니일은 훗날 자서전에서 1921년에 설립한 서머힐 학교의 모델이 바로 리틀 커먼웰스였노라고 고백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호머 레인은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벌은 아이들을 망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벌은 오히려 범죄와 비겁함을 키우고, 권위로 강제한 도덕성은 아이들을 위선자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들을 절대로 어린 범죄자로 취급하지 않았고, 아이의 억눌림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상습적인 무단 결석자로 리틀 커먼웰스에 온 아이를 6개월간 관찰한 후에 호머 레인이 내린 결론이 퍽 인상적이다. 아이는 왜 학교를 거부하는가. “자기가 아무것도 배울 수 없기 때문에 학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너무나 싫기 때문에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학교 자체가 아이의 무의식은 물론 신체 기능마저 압도했다는 것이다.

 

호머 레인이 쓴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하는가』에는 유독 수학을 싫어했던 그 아이가 교화원 규칙을 어겨서 시민법정에 소환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매주 아이들이 주관하는 모의법정에서 그 아이가 소환된 이유가 마침내 밝혀진다. 그런데, 세상에, 맙소사! 그 아이는 부진한 ‘수학 공부’를 하기 위해 밤 늦도록 잠을 자지 않았던 것이다. 호머 레인의 책을 보며 학교를 거부하는 우리나라 아이들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어쩌면 학교를 거부하려는 아이들은 어느 철학자가 그토록 비판해마지 않는 사회 전체의 ‘강제적 학교화’(이반 일리치) 현상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사회적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학교에 의존하지 않는 공부를 위한 예방적 사회정책이 필요하다. 지역특성화 사업으로 추진되는 부천시민연합의 <무한도전예술하기>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무한도전예술하기>는 부천시민연합이 학교 밖 청소년 대안학교로 개교한 부천무한도전학교(대표 김명숙)가 2013년에 추진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소위 무중력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탈(脫)학교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위기 청소년 네트워크를 가동하는 등 학교 밖 청소년 교육 문제에 각별한 관심이 있는 부천시민연합이 멍석을 깔았고, 부천의 대표적인 대안예술공간인 아트포럼리(대표 이훈희)의 예술가들이 교육 과정에 참여했다. 2008년 6월 개교한 무한도전학교 교과과정 중 문화예술 감수성 교육에 관한 한, 아트포럼리 예술가들이 협력하며 교과 과정에 참여해오고 있다. 2010년에는 보호관찰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개똥참외>를 공동으로 진행했다. 2013년 <무한도전예술하기>는 2011~2012년에 수행한 <무한도전예술여행>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이들이 아트포럼리를 무한도전학교의 제2캠퍼스라고 부를 만하다.

 

부천시민연합의 <무한도전예술하기>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아트포럼리라는 (예술)공간을 거점으로 하여 지역 예술가와 학교 밖 청소년들이 매주 1~2차례 일상적으로 만나고, 수다 떨고, 함께 예술 작업에 대해 논의하고, 실제 작업을 수행하는 일종의 ‘공동 작업장’을 견고히 형성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교육효과를 발휘한다. 아이들이 예술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예술가 옆에서 보고 따라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러시아 교육철학자 비고츠키는 그런 교육적 효과를 근접발달영역이라고 말한다.

 

근접발달영역은 엄밀히 말해 교육이론은 아니다. 하지만 근접발달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핵심 기제가 바로 협력(collaboration)이라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기서의 협력이란 협동(cooperation)과는 다르다. 그것은 서로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의미하며, 우리는 그런 상호작용 과정에서 추상의 세계로 가는 능력을 배우게 된다. 교수-학습에서 교사-학생의 관계는 물론이요, 혼자서 과제를 수행하는 학생이 혼잣말을 하는 행위 또한 협력의 과정으로 비고츠키는 파악한다. 아이들이 아트포럼리에서 진행되는 문화예술 감수성 훈련은 물론이고, 예술 프로젝트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 또한 그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또 하나 <무한도전예술하기> 프로젝트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아이들이 학습하고 작업한 결과를 동료들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와 지역 사회 어른들 앞에서 전시와 발표 형식으로 ‘의례화’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직접 발표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쩍 성장할 수 있다. 아이들이 지역 예술가들과 함께 커뮤니티 아트 작업을 수행한 결과를 동료들과 준비하는 과정은 상호의존의 가치를 배우는 과정이 된다. 실제 부천시 원미구 상2동에 소재한 아트포럼리를 방문했을 때, 무한도전학교 아이들이 2013년에 진행한 예술여행의 결과를 모은 <내가 원했던 ( )>전이 열리고 있었다. 1층 전시장에는 아이들이 프로그램 과정에서 직접 만든 갖은 형태의 플라모델(plamodel)들을 비롯해 아트북, 무인 머핀숍, 스케치, 작업노트, 그림들이 전시되었다. 주의 집중력과 관찰력을 요구하는 플라모델을 만드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신과의 진지한 1:1 대면의 과정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의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클로징 파티이다. 11월 22일 무한도전학교의 클로징 파티가 열렸다. 오후에는 아이들이 무한도전학교에서 배운 학습 발표회가 진행되었고, 저녁부터는 입학식을 겸한 파티가 열렸다. 수료식과 입학식이 동시에 열린 점이 퍽 인상적이었다. 자유로운 배움을 향한 아이들의 무한도전은 계속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의도였으리라. 아이들이 전시와 공연을 준비했고, 부모님과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를 낭독했다. 수료식을 한 아이들은 저마다 “포토폴리오를 만든 것 자체가 성찰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길이 곧 목적지이다’라는 점을 자주 잊고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학 휴학 중인 서상준(21) 졸업생이 “무한도전학교에서 5박6일간 동해안 7번국도를 따라 자전거여행을 한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한 말이 나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의 이런 반응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리학자 에릭 에릭손이 말한 것처럼,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에는 심리적 유예 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아이들은 심리적 유예 기간 동안에 세상과 분리하되 분리되지 않는 각자의 고유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유예 기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가정과 사회가 아이들을 “내파(자학/자해)냐, 외파(남 괴롭히기)냐?”의 외길로 내모는 것이다. 아이들의 몸의 복지와 마음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나홀로 여행 같은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그런 시간을 빈 구석의 시간이라고 부르련다. 아이들이 왕따놀이와 쇼핑놀이 그리고 게임과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2013년 <무한도전예술하기> 수업이 모두 끝났다. 한 해를 정리하는 시점에서 사유와 성찰이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지역 예술가들과 아이들이 일종의 랜덤(random)한 방식으로 진행해온 교육 과정에 대해 전반적인 ‘복기(復棋)’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아이들이 자기주도적으로 프로젝트 수업을 구상하고 설계하도록 한 ‘자유로운’ 교육 방식은 분명 무한자유를 허용하는 교육 경험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예술창작 프로젝트에서는 아이들에게 ‘믿고 맡기는’ 방법이 유효할 수 있지만, 예술교육에서는 자칫 우연성에 의존하는 교육과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여름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은 이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교육학개론’ 없는 예술교육을 표방하는 것이 언제나 항상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이들은 교육실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훈희 대표가 “좀 무모했다. 속이 탔다. 내년에는 그런 방식의 교육이 힘들 것 같다”고 토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민단체와 지역 예술가 간에 학교 밖 아이들과 함께하는 예술교육(철학)에 대해 더 많은 대화와 토론이 필요해 보인다.

 

아이들은 경계를 허무는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무한도전학교 아이들 또한 교육 과정을 마무리하는 의례들(전시,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런 배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낮부터 밤 늦게까지 진행된 수료식과 입학식에 참여한 아이들의 육성에서 그런 배움은 물론 새로운 배움에의 기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배움의 경험을 통해 마음의 사회화를 형성하게 된다. 입학생들이 ‘또 다른 시간성’을 진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대학 시절 구파발성당에서 야학선생 노릇을 하며 입학식과 졸업식 때면 부르곤 하던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옛 노래가 절로 떠오른다. 나는 ‘오오 참 마음으로 나는 믿네’, 이 대목을 특히 좋아한다. 옛 노래를 부르자 그때 그 시절에 만났던 얼굴들이 문득 그리워진다. 의례에 다같이 부르는 노래가 빠지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예술은 나의 힘이고, 의례는 나의 노래가 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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