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곁봄
- 요청된 과거 혹은 예언된 미래를 위한 자리
- 강원재 _OO은대학연구소 1소장
- 201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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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식의 대학 l'Université de tous les savoirs의 창시자인 이브미쇼Yves Michaud교수는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현실이라는 절박함’이 미래와 과거의 시공간들을 휩쓸어버리는, “아우라AURA가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로인해 ‘요청된 과거’ 또는 ‘예언된 미래’에만 뿌리 내릴 수 있는 “현재의 실존 또한 해방을 약속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 ‘요청된 과거’는 벤야민이 ‘기억’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환경을 형성하고 도시환경은 다시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게 된다”고 할 때의 ‘추억’이며, 그것은 질베르 뒤랑에게는 ‘신화세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언된 미래’는 한 사회가 공유하는 미래를 선취하는 네그리의 ‘예술’이거나 현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들뢰즈의 ‘영화’일 수 있다.
경기도 파주와 서울 혜화동을 오고가며 활동하는 극단 [프레이플레이어PrayPlayer]는 올해 경기문화재단으로부터 두 개의 사업을 지원받았다. 하나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으로서 다문화가정을 포함한 파주지역의 가족들이 구성원 간에 평소 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나누는 작업과 더불어 함께 관찰하고 촬영한 별사진을 지역의 아파트 벽면에 저녁시간 상영하면서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살아가는 아파트가 새로운 기억의 장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동네예술프로젝트>로서 참여하는 지역 청소년들이 별 관찰과 촬영을 계기로 형성된 영화적 주제를 극영화로 제작하는 프로젝트이다.
두 개의 사업 총괄기획연출자인 박연두 대표는 거창한 성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 세 차례의 아파트 별사진 상영회에서는 주민들이 많이들 나와서 자신들의 일상주거공간인 아파트 벽면이 별로 가득 채워지는 시각적 경험을 하였고, 차를 마시면서 이웃끼리 눈인사라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청소년기를 콩만 보다가 보낼 수 없다”며 자신을 찾아왔던 지역의 청소년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극영화 제작을 위해 주제와 연관된 지역의 장소를 찾아다니면서 파주라는 지역 곳곳에 얽힌 다양한 옛 이야기를 문화적으로 다시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활동을 자신들의 힘으로 이어가기위해 Culture&Art Player(C.A.Player)이라는 프레이플레이어의 오마쥬 동아리 결성을 앞두게 되었다고 한다.
11월30일 저녁, 파주 시민회관 소극장에서는 두 개의 프로젝트를 총괄 정리하는 발표회가 열렸다. 현장 입구에는 프로젝트 참가자로 보이는 청소년 2명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내를 따라 행사장으로 올라가니 먼저 로비에서 열리고 있는 별사진전이 눈을 사로잡는다. ‘라이트 패널’에 설치된 별사진들은 인화지에 출력된 사진의 전시보다 좀 더 환상적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별’이라는 소재와 주제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형식인 듯 싶었다. 극장으로 들어서니 먼저 도착한 10여 팀의 가족들과 20여명의 청소년들이 앉아서 들뜬 표정으로 영상이 상영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안내와 더불어 먼저 가족들이 찍은 십여 편의 영상편지가 쭉 상영된다. 엄마에게 못 다한 이야기, 딸에게 고맙다는 이야기, 아빠에게 바라는 이야기, 아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잔소리가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해지고 나눠진다. 이어서 청소년들이 제작한 네 편의 극영화가 연속해 상영되었다.
별로부터 첫사랑을 생각하고,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떠나간 친구를 추억하고, 현재 자신들이 일상에서 겪는 학교와 학원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극적 형식을 통해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과 계획된 신도시의 풍경이 있는 파주라는 장소 곳곳을 비춰낸다. 상영회가 끝나자 참가 가족 대표와 청소년 대표 몇 명이 무대에 올라와 인사를 하고 소감을 밝히고, 또 프로젝트 강사 몇 명의 소감과 감사 인사가 이어지면서 행사는 끝을 맺었다.
상영회를 보면서 별과 영상이라는 매체는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이나 영상이나 둘 다 실재하지만, 현실에서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꿈이고, 들춰내고 싶은 비밀이며, 잡아두고 싶은 기억이다. 둘 다 이브미쇼 교수의 ‘예언된 미래’와 ‘요청된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장소이다. 다가가지만 결국 닿을 수 없는 이상에 대한 실존적 기도가 생겨나는 장소이다. 자연과 오래된 농촌의 모습을 간직함과 동시에 고층빌딩과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급속하게 들어서기 시작한 파주라는 도시의 주민들이 갖음직한 이야기다. 점점 별 볼 일 없어지는 현실에서 별을 함께 바라본 가족들과 청소년들이 그 공동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서로에 대한 이야기와 각자가 살아가는 지역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는 사라진 신화가 복원되는 자리이며,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장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 프레이플레이어의 발표회에 대해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발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 프로젝트 참가자들이 함께 모이고 지난 과정을 매듭지으면서 반성할 것 반성하고, 반영할 것 반영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발표회를 통해서 대내외적으로 공표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을 함께 해 낸 가족, 친구, 동아리, 주민들 사이에 작고 큰 공동체들이 생겨나거나 한층 더 무르익는 경험이 생기도록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박연두 대표는 이번 발표회가 “우리 잘 했어요”식의 성과 발표가 아니라 “참가한 사람들의 축제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렇다 축제! 그 자체로 공동체의 새로운 경험이 생겨나는 시공간! 이러한 시공간의 추억이 있어 살아가는 일상의 장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게 되는 자리! 그런데 박대표는 이런 상관관계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거나 애써 연결시키려 하지는 않았는데, 총괄기획자 이전에 대체로 자기 작품을 스스로 해석해 말하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는 예술가, 연출가여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도시는 그곳의 오랜 자연이나 건축적 흔적을 콘크리트로 봉인한 후 세워지는 망각의 공간이지만, ‘그때 그시절 그곳’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도시 곳곳에 다시 반영되고 각인된다. 아파트 벽면이라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장소에 기억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존재했지만 실존하지 않는 별과 지역 곳곳을 바라보고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보는 공동의 경험을 함으로써 그러한 활동이 생겨난 그곳을 추억할 수 있도록 하는 극단 프레이플레이어의 ‘별을 찾는 사람들’은 잊혀져가는 현재를 위한 돌발적이고 즉흥적인 상기의 과정이자 의례이다. 아니! 그러한 과정이자 의례가 되어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순간을 함께 한 사람들의 꿈과 기억이 있어 쉽게 잊혀지지 않는, 사라지지 않을 소중한 장소와 관계들을 파주라는 지역 곳곳에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