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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주 _예술가
  • 2018.05.30

24호 넘봄 
예술, 아카이브, 단상
김진주 / 예술가

 

예술교육 웹진에 아카이브에 관한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예술과 아카이브가 결합되었을 때 나타나는 교육적 효과? 예술교육에 기록/아카이브의 활동을 접목해야 할 필요성? 화실 강사 아르바이트, 교직 이수도 했고, 한두 번에 그쳤지만 군인들과 미술 수업도 해봤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식으로 예술교육 현장과 아카이브를 엮어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의 미술교육과 포트폴리오 문화를 아카이브적 관점에서 쓸까도 싶었지만, 예술교육을 실천하는 활동가나 교육자들을 향하기보다는, 예술가 양성 제도를 겨냥한, 비판적 어조가 강한 글이 될 것이 뻔했다. 고민 끝에, 아카이브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의 조각들을 [지지봄봄]의 독자들에게 공유하는 쪽으로 글의 갈래를 잡았다. 이것이 그나마 ‘교육적 차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알고 경험한 것들의 나열로만 습득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교육은 속을 들여다보면 짜임이 있는 활동이다. 교육을 통해, 무엇을 누구에게/와 어떤 방법과 단계로 전달/전이/실천하고 그 결과 어떤 목적에 도달하는지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분명함이 ‘정상’이라는 사회적 가치나 규범을 구성한다. 수많은 자료들을 놓고 그것의 성격을 분류하고, 역사적 설명을 덧붙이고, 보관될 자리의 질서를 잡아가는 아카이브도 그와 닮았다. 정신성이든 사물이든, 오래가는 무엇을 지킨다는 다소 보수적인 점에서도 교육과 아카이브는 닮았다.
 

그런데 아카이브를 다시 들춰보면, 기존의 ‘정상적인 질서’ 수호와 반대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비밀 문건의 봉인이 해제되기도 하고, 단순히 너무 많아서 알아보지 못했던 기록을 재발견하기도 하고, 권력에 의해 숨죽였던 기록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교육도 그러할 것이다. 굳건한 것을 해체하고 새로움을 발견하는 교육에, 아카이브와 예술에 관한 이 잡다한 글이 힌트가 되었으면 한다.

 

***

 

아카이브(archive). 이 외국어가 한국의 미술/예술/문화계에서 자주 호명된 지 이제 10년 정도 되었나? 벌써 10년을 넘었나? 아무튼 꽤 되었다. 도대체 아카이브가 뭘까?

어떤 프랑스어권 철학자(Jacques Derrida)와 어떤 영어권 이론/비평가(Hal Foster)가 열병(fever)과 충동(impulse)이라 부른 이것은, 한국어권에서는 때로는 현재분사나 동명사의 형태(아카이빙/archiving)로, 또는 형용사의 형태(아카이벌/archival)와 혼용되기도 한다. 브, 빙, 벌. 그 무엇이든 간에 대부분은 이것을 수집, 연구, 조사의 방식을 꾀하거나 그러한 경향을 보이는 만들어진 예술 작품이나 문화적 활동을 가리킬 때 쓴다는 건 분명하다.
 

교육적으로 어원을 따져보면, 아카이브는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시초/시작/지배/통치를 뜻하는 아르케(arkhē)로부터 공공 기록물을 뜻하는 arkheia를 거쳐, 라틴어로 넘어와 archiva/archia로, 프랑스어에서는 복수형의 아쉬브(archive)로,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 영어에서의 현재 의미를 구성했다고 한다. 그렇게 종착한 아카이브. 명사로는 두 가지, 1. 장소, 기관 등 무리 지을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사적 문서나 기록물의 모음 또는 집합, 2. 이러한 역사적 문서와 기록물을 보관하는 장소를 뜻한다. 동사로는 2번의 장소에 1번의 사물을 모으고 저장하는 행위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한편, 아카이브는 행정기관에서 업무의 맥락에 따라 생산, 이관, 보존되는 행정기록 또는 보존기록을, 그리고 이와 다르게 특정한 기준, 의도, 목적에 따라 수집된 개인이나 조직의 기록물을 매뉴스크립트(manuscript)라고 구분할 때 쓰이기도 한다. 보존을 공인 받은, 영구적 운명을 타고난 기록만을 아카이브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애초에 물리적 형태를 가지지 않고, 태생적으로 디지털 형식으로(born-digital) 메모를 하고, 문장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이미지를 포착하는 일상과 업무 환경 속에서 아카이브는 데이터(data)와 비슷하게 쓰이기도 한다. 데이터를 정제하면 정보(information)가 되고, 지금의 정보화 사회는 빅데이터(Big data)의 홍수 속에 방랑 중이다. 이에 부응하는 아카이브는 데이터와 일치되기 위해 부단히, 형식의 표준과 내용의 전거를 정제하고 제어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 데이터의 뜻은 이론을 세우는 데 기초가 되는 사실이나 자료라고 하는데, 이러한 자료들은 저장될 가치를 담보한다. 무엇을 저장하는 인간의 가장 기초적 행위를 기억(memory), 문화화된 행위를 기록(records, documentation)이나 지식이라 한다면, 아주 먼 시간부터 아카이브는 그것들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된 기억하는 기술 중 하나가 머릿속에 서랍과 같은 공간을 상상해서 기억할 것들을 넣어 놓듯 암기하는 식이었다고 하는데, 그 은밀한 서랍장은 항온항습이 철저한 지하 수장고, 선반과 상자가 차곡차곡 쌓인, 오늘날 장소로서의 아카이브 생김새와 닮았다.

이 모든 것이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유사한 것들과 아카이브는 다르다.

 

***

 

참 복잡하고 많다. 그만큼 아카이브가 확장성이나 포용력이 있다는 뜻일까?

내가 처음 접한 아카이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였다. 2008년, 최종 결과물을 책으로 엮는, 그 책들의 지면을 각자 만드는 워크숍으로 이루어진 미술 전시에 참여하면서 그곳 아카이브를 가 볼 수 있었다. 아카이브 기록물 수장고는 탁한 황토색의 코팅된 목재에 은색 쇠 손고리가 달린 서랍이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얀 면장갑을 낀 아키비스트(아카이브 운영자, 기록물 관리자)가 그 자리에서 서랍 속을 열어보였다. 피 묻은 저고리가 보였다. 시위 현장에서 희생된 누군가의 것이었다. 이 아카이브를 찾은 예술가 중에 누가 이것을, 감히, 작업의 재료로 쓸 수 있을까? 보존을 위해 다시 굳게 닫힌 그 서랍처럼, 쉽게 입을 뗄 수 없는 질문이다. 1980년대의 어느 도시의 민주화 운동 시위 현장을 찍은 사진, 그것을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 공개한 웹사이트, 사진의 제목, 제작연도 등 기술된 내용이 공개되었고, 나와 친구들은 아카이브의 사물이 아닌, 이미지와 정보를 작업 재료로 삼았다.
 

그러다가 이제 막 코디네이터나 어시스턴트라고 하는 보조적 의미를 살짝 떼어놓고 일하던 그때, 나는 작업자이면서 동시에 기획자로서 어느 한 시대, 특정 경향의 미술 자료와 아카이브를 등가로 놓고 일을 했어야 했다. 그것들은 당시 보관하고 있는 미술 공간에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수집한 자료는 아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아카이브가 아닐 수도 있었다. 자료가 어디서 나왔는지, 아주 정확한 개인의 신원이나 연원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전해지는 말로 그 공간과 연관된 미술 이론 연구 모임의 것이 대부분이라고 했지만, 그곳에 어쩌다 남아있게 된 자료도 섞여 있었다. 자료의 연도, 유형, 형태도 각양각색이었다. 인쇄 규격을 넘나들거나 임의로 간행된 듯한 리플렛, 포스터, 도록, 잡지, 문집, 선언문 등, 그리고 VHS, 60mm mini DV 데이프, 또 손으로 쓴 운영일지, 인화된 사진, 35mm 필름 스트랩, 마운트된 슬라이드 필름 등등. 작가로서 나와 친구는 그 자료들 중에서 맥락과 이미지적으로 흥미로운 것들을 스캔하고, 그 이미지를 컴퓨터에서 오리고 붙이고 다시 따라 쓰거나 그려서 한 계간지에 실릴 작업을 만들었다. 기획자로서 이 자료들의 의미를 되살리고 싶었던 나는, 만화가에게 이 자료와 그것의 인적, 사회적, 예술적 맥락을 두고 공상을 부탁했고, 그는 추적할 수 있는 자료 관련자들과의 한 차례 대화 이후 SF 만화의 연재를 시작했다. 미술이 낯설었던 것인지, 미처 정리되지 않은 자료 더미가 소화 불량의 원인이었던 것인지, 만화가는 1편을 마치고 사라졌다.
 

흐릿한 꿈의 결말처럼, 한동안 아카이브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2013년 즈음 이삿짐 박스로 족히 20개는 넘는 서류와 인쇄물 더미로 나는 다시 아카이브를 만질 수 있었다. 한 도시에서 3,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큰 미술 행사의 업무 자료와 작품 관련 기록이었다. 시민들이나 정책입안자들은 그 미술 행사를 수년간 지켜봐오며 경험했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행사가 계속되어야 함을 전적으로 지지하기도 했지만, 큰 행사를 열기 위해 쓰이는 많은 돈이 도시 재정에 부담이며 복지에 더 많은 재원이 쓰여야 한다는 상반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 미술 행사의 새로운 차례를 준비하던 기획자들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 필요성을 잘 설득할 수 있을까? 지난 몇 년의 세월 동안 이어온 이 미술 활동의 작은 역사를 지금의 관객이 다시 돌아보게 할 수는 없을까? 수십 개의 종이 박스 속에 잠자고 있던 이 자료들이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먼저 모인 기획자들의 제안으로, 나는 그 고민의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료를 가만두지 않았다. 자료와 사람이 대화하길, 다시 볼 수 있길 바랐다. 과거의 어둠 속에서 현재로 작은 반딧불을 내는 이야기들이 담긴 자료를 골라내 서가를 활용해 작은 전시를 꾸렸다. 그리고 자료들에게, 비유하자면, 더 튼튼한 기둥과 바닥과 지붕이 절실하다고 인지했다. 그래서 이 자료들의 시작이 비록 보존을 담보하지는 않았으나 의미를 찾아 앞으로 계속 세상 속에 존재할 수 있도록 체계와 장소를 갖추고자 시도했다. 우리는 자료들의 질서와 형태에 관해 공부했고, 다른 기관의 자료들과도 소통 가능한 항목을 갖추어 이 자료들의 속성과 내용에 관한 메타데이터를 추출했고, 그렇게 해서 이 자료들이 모인 아카이브의 첫인상이자 중추가 되는 정보를 축약해서 담는 이용자 안내문서(Finding Aids)도 생산해 온라인으로, 오프라인으로 공개했다. 영구 보존이라는 아카이브의 대전제가 충족되지 않았을지라도, 일시적인 한계가 있었어도, 우리는 그 자료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기록과 책임을 호출하는 상황의 어려움 덕이었다. 다소 “예술적”이지는 못했지만.

 

***

 

나의 아카이브 경험은 이미 있는 기록을 정리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았다. 예술 작업한다고 하는 내게 기록은 사후 시점보다는, 실은 생성에 더 가까웠다. 작업을 하면서, 작업을 위해,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촬영하거나, 소리를 녹음하는 행위는 기록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어느 대담에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진 기자로 시작해 미술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는 자신을 예술가 이전에 기록자로서 정의하기도 했다.

예술 작업의 행위나 매체가 기록과 연결되는 지점은 시청각적인 것만이 아니다. 작업을 위해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다보면(인터뷰),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글로 정리하거나, 녹음한 것을 듣고 활자로 옮기기도 한다. 이 활동이 아카이브에서 발견하곤 하는 구술사, 생애사 작업과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화자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 연표를 만들기도 하고, 인생사에 겹친 사회적 맥락을 밝혀내기도 한다. 마치 아카이브에서 기록물 각각에 관계항을 메타데이터를 통해 드러내듯이, 아카이브적 분석 행위는 예술가와 어떤 사물, 어떤 인물, 어떤 장소 사이의 어렴풋함이나 삐걱댐을 구체적이고 수행적으로 잇는 관절(articulation)을 만들어주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2016년 즈음, 야외 설치 작업을 준비하면서 한 작가의 이름에서 작품 제목을 빌린 적이 있었다. 완성된 작품과 그의 작가적 생애나 작품이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그 예술가는 그 작업에 관한 기록을 만든다면 맨 아래 칸 서랍 하나를 채울 메타포였다. 작업 준비 초반,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연구센터에 보존된 그의 드로잉북을 아키비스트의 도움을 받아 운 좋게도 열람할 수 있었다. 드로잉북은 많지 않았다. 그는 시중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드로잉북을 활용했고, 1년에 딱 한 권 정도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각 연도에 해당하는 드로잉북이 1권을 넘지 않는 상태를 보고 있자니, 하루에 종이 1000장 드로잉 하는 것보다, 1년 12개월 52주 365일 8,740시간의 모든 것을 종이 50장이 전부인 드로잉북 한 권에 담아내는 것이 더 어렵지 않나 싶었다. 그 예술가의 태도는 아마 1년의 생각을 기록한다는 것에 가깝지 않았을까? 기록에는 모든 것을 담는 것이 아니라 남길 것을 걸러내는 일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이렇게 아카이브를 따라, 아카이브를 닮아가는 예술가와 작업을 목격하고, 읽어낸다.

 

***

 

그러나 여전히 아카이브에는 예술가가 머무르기에 답답한 부분이 있다. 메타데이터, 기술, 지침, 표준, ISO, 전거제어, 통제어, 색인 등. 아카이브는 굳건히 역사적인 틀을 지킨다. 여전히 아카이브의 정체성은 4단짜리 철재 서류함과 정갈한 문서 보관 폴더와 색인 카드가 보여주는 관료적인 모습, 행정적인 체계여야 할 현실과 이유가 있다. 그런 아카이브에 예술가는 왜 매력을 느끼고, 흥미롭고 주요한 질문거리와 재료로 가져다 쓰고 있는 것일까? 공공적 문화기획사업의 자료들을 목록화하고 영상 기록으로, 문화재생 사업의 하나로 한 장소가 폐허에서 삶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사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는 요즘, 나의 아카이브에 저장된 이미지 가운데 (실은 구글 검색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세 개의 표준 정지장치(Trois stoppages standards)>를 자주 열람한다. 아카이브라는 질서를 만드는 것은 있던 질서를 허무는 것이기도 하다. 아카이브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료는 반전을 숨겨 놓기 딱인 곳이기도 하다.

 

01

아카이브 선반에는 보존 박스들, 서류함들, 문서들, 도면함들이 즐비하다. 2018. 1. 16. 그림: 김진주.
 

 

02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미술연구센터에서 자료를 열람하는 모습. 2016. 1. 20. 사진: 김진주.
 

03

아카이브 연관어. 경기상상캠퍼스 포레포레, 2018. 4. 28. 사진: 김진주.



 

 

김진주

미술작가, 연구자, 큐레이터.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3~2014)의 공원도서관팀에서 <프로젝트 아카이브>와 <리빙 애즈 폼(더 노마딕 버전)>을 동료들과 함께 만들었고, 5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6)에서는 작가로 참여해 작품 <이소(異素)>를 발표했다. 지금은 경기상상캠퍼스에 입주해 <아카이브 프로젝트: 기억하는 용기>를 시작해, 옛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원 캠퍼스와 경기천년사업에 관한 수집과 기록을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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