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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보라 _백남준아트센터 교육 연구원
  • 2018.05.30

24호 가봄 

관계의 지도를 그리고

접힌 곳을 펼쳐보기

김보라 / 백남준아트센터 교육 연구원
 

무슨 주제를 다룰까? 목적과 방향은?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해 주로 다뤄지는 질문일 듯하다. 이미 많은 사람이 고민하고 있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잠시, 늘 해오던 질문을 뒤로 해보면 어떨까. 앞선 질문과 씨름하고 있는 ‘나’에 대해 질문해보기로 하자. 생각해본 적이 없어도 좋다. ‘나’와 연결된 사람과 일을, 그러니까 관계를 떠올려보자. 그리고 빈 공간에 일종의 ‘관계의 지도’를 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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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도는 대략 이렇다. 지역문화재단 산하 뮤지엄의 교육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한 기관 안에서도 고용 형태는 여러 가지인데 계약직이다 보니 실무자라고 해도 사업 담당자라 볼 수는 없다. 주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준비-진행하고 그에 따르는 간단한 행정업무를 처리한다/1/. 교육 프로그램 진행시에는 보조 역할을 하는데, 필요에 따라서는 직접 강의를 하거나 예술 강사/2/와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미술을 다루는 기관이다 보니 전시나 작품을 중심으로 대상, 시기에 따라 교육을 기획하는데, 작가/2/가 수업을 기획할 때도 있다. 교육 대상은 어린이부터 청소년/3/, 교사/4/, 가족/5/, 성인, 장애 단체, 그리고 불특정 다수인 관람객이다. 전반적인 과정을 혼자 하는 것은 아니고 교육 사업 담당자와 연구원들이 협업하여 운영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나의 역할이나 상태는 ‘매개’ 그 자체에 가까운 듯하다. 다양한 사람과 관계 맺기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교육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보지 못하는 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이 사람은 평소 어떤 모습일까?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생각해보는 거다. 팝업책의 접힌 면을 펼쳐 볼 때처럼 상대가, 상황이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갈등이 생겼을 때 접힌 면을 펼쳐보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무력감을 느끼게 될 때도 많다. 구조의 문제라고 여겨지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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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원금 사업의 심사자가 문화예술교육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며 타박 섞인 한탄을 했다. 심사의 기준이나 지원 방식에 ‘이미’ 그 안에 담기게 될 사업의 형태나 내용이 결정돼 있다는 건 어째서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심사나 평가의 기준이 매번 ‘(참여자)숫자’나 ‘결과(물)’에 맞춰져 있는데 다른 시도나 실험을 할 수 있을까? 다양한 교육이 이뤄지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걸 담아내고 선정하는 방식도 그만큼 다양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하향’까지는 몰라도 ‘평준화'를 만들어 내는 건 지원 사업이 주도하고 있는 것 같다. ‘메이커, 제작 문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여기저기 설치된 3D 프린터를 활용한 교육이 채 활성화되기도 전에, ‘4차 산업혁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자.

물론 지원처를 일일이 찾아다니거나, 모든 기획을 시뮬레이션해보고 선정하기는 어렵다.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준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기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매끄럽고 안정적인 기획을 걸러내느라 시도와 실험을 통해 성장할 기회는 빠져나가 버리는 건 아닐까? 결국, 시간과 노력과 예산의 문제가 되고 마는데, 이는 심사 과정뿐만 아니라 모니터링 과정에도 해당한다. 심화 프로그램의 경우 몇 주차에 걸쳐 진행되는데 모니터링은 대부분 한 회차의 참관으로 이뤄진다. 같은 공간, 같은 구성원이라 해서 2주 차와 8주 차의 시간이 같을 수 있을까? 강사와 참여자가 나누는 대화나 쌓여가는 관계 같은 것들이 전부 결과(물)를 통해 수치화되거나 가시화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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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와 B는 예술 강사다. A는 자신이 현재 일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배우고 있는, 경험을 쌓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시뮬레이션까지 했지만 모객이 되지 않아 수업이 무산된 적이 있다. 고정된 일정이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었기 때문에 3개월가량의 시간을 기약 없이 비워둬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일을 병행하기도 쉽지 않다.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경험을 쌓기 위한 과정으로 여겨질 뿐 예술 강사로서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 B는 작업하는 사람이다. 사진 촬영, 영상 편집, 작품 설치, 예술 강사 등 예술과 관련한 다양한 일을 하며 생활비와 작업비를 충당한다. 어느 순간부터 작업이 생계를 위한 일들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일이 일정하지 않다 보니 작업은 물론이고 생활마저 불안정한 상태가 당연해졌다.

공공의 기관은 다수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 작가나 강사에게 혜택을 주는 일은 지양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들에게 시간당 3~5만 원이라는 강사료를 책정하는 것을 두고 혜택이라 볼 수 있을까? 지금의 강사료 책정 방식이 타당하기는 할까? 3시간 수업을 진행하는데 정말 3시간만 필요할까? 같은 교육 프로그램도 어떻게 강의하고 관계 맺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할 때 고려되는 건 주로 교육 대상자다. 예술 강사도 교육이라는 환경 안에서 고려돼야 하는 대상 아닐까? 우리는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는 걸까?

합당한 수준의 인건비를 지급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 없다면 지급할 수 있는 인건비 수준의 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예술 강사가 그나마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종종 어떤 게 예술 강사를 위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해야 할 대상자의 범위를 문화예술교육 종사자로 넓혀본다. 나의 열정이 이 자리에서 일하게 될 다음 사람에게 강요가 되지 않을까? 나의 의욕이 누군가의 생계를 위협하는 건 아닐까? 어느새 선례를 만드는 일에 가담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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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들과 사회 문제를 게임으로 만들어보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모둠을 나누어 특정 주제를 정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게임으로 만들어보는 수업이었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는 게임을 만드는 모둠이 눈에 띄었다. SNS를 잘 이용하지 않느냐 물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메신저 없이 못 산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어째서 SNS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느냐 이유를 물었더니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른들에게 솔직하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 귀찮아지기 때문에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거란다. 그동안 만나온 청소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친구들이 만나왔을 어른들을 떠올렸다. 3시간 남짓한 일회성의 수업을 통해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우리는 제대로 대화하고 있는 걸까? 청소년들에게 ‘정답’이라 여기는 것을 가르치기 이전에, 청소년들의 생각은 어떤지 들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때야 대화가 가능해지고 배움이 일어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서로에게 있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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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회차로 진행되는 청소년 심화 프로그램의 경우 주로 모둠 활동으로 이뤄지다 보니 첫 수업 날 강조하는 것이 있다. 좋은 친구를 사귀고 인연을 만들어 갈 것, 즐거울 것, 그리고 문의나 출결 관련 연락은 본인이 직접 할 것. 이렇게 강조해도 대부분 보호자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다. 아이가 자신이 듣는 수업의 출결 여부나 궁금한 것에 대해 직접 말할 수 없다고 여기는 걸까? 관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편함이나 부대끼는 상황을 대신해주는 것이 어떤 능력을 발달시킬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아닐까? 지필고사 기간이 되면 모둠 활동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결석자가 많아진다. 입시는 물론 중요하지만, 함께하는 친구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걸까 싶어 씁쓸해진다. 입시를 제외한 나머지 환경들, 그리고 이를테면 실패라든지, 불편함, 갈등이나 방황 같은 경험은 모두 잘려나가고 삭제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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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학교 임에도 담임 교사에 따라 학급의 분위기가 상반되는 걸 볼 때면 놀랍고 두렵다. 열정적이고 좋은 선생님을 많이 만났지만, 실망스러운 선생님도 그만큼 많이 만났다. 모든 걸 일일이 지시하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학생들을 방치하는 교사도 많다. 학생들이 서로를 평가하게 하는 교사도 있었다. 안타까웠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다그치듯 말해야 하는 걸까? 왜 저 선생님은 학생들이 무얼 하든 관심이 없을까? 물론 학생 각각의 성향을 파악하고 돌봐주기에는 교사에 비해 학생의 비율이 높다. 가르치는 일이나 학생들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기 어렵게 만드는 외적인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학교는 학생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다. 그 안에서 맺는 관계를 통해 배우고 또 생활한다. 배움의 대상을 넓혀보기로 했다. 학생만이 배움의 대상일까? 오히려 학생들과 장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교사의 배움이 더 많은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그렇다면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위해 예술이, 예술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들의 관계를 낯설게,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보는 건 어떨까? 그것이 2~3시간 남짓한 수업을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을까? 아니면 역시 구조의 문제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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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가족은 ‘미술관이 위치한 지역의 주민’이다. 몇 년째 미술관에 꾸준히 방문하며, 교육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런 가족을 다른 가족과 뭉뚱그려 ‘가족’이라는 대상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연령이 같다고, 지역이 같다고 무조건 같은 대상으로 분류할 수 있는 걸까? 조금만 들여다봐도 차이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러한 차이를 고려한 연속성 있는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 기획이 이뤄지기는 어렵다. 실무자가 계속해서 바뀌는 구조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도, 형성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장기적인 관점의 교육을 기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곡차곡 관계가 쌓여있는 상태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예 배제되고 있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하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잘 모르는 언어로 말한 기분이다. 정작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말하지 못한 것 같다. 나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했지만 결국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됐다. 나의 일이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다루고 싶지만, ‘누구와’ 함께하고 싶지만, ‘어떤 방식으로’ 하고 싶지만, 매번 어려움에 가로막힌다. 이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건 쉽다. 이 학생은 의지가 없다거나, 그 선생님은 권위적이라거나, 저 담당자는 꽉 막혔다고. 그렇게 여기고 넘기기는 쉽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늘 누군가 탓하기만 하면서 자신도 그 어려움에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마주치는 문제와 고민, 어려움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라기보다 서로 관계 맺고 있는 구조와 상황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당장 해결되거나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달라진 생각이 태도를 변화하게 만들고, 변화한 태도는 구조를 바꾸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김보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교육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가르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배우고 있는 사람이다. 모두가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무엇보다 각자 배울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