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곁봄
- 저는 방과후강사입니다.
- 공미선 _예술가
- 2018.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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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곁봄
저는 방과후강사입니다.
공미선 / 예술가
저는 방과후 강사입니다.
돈이고 뭐고 예술만 하고 살겠다며 내 모든 걸 쏟아 붓던 20대가 가고, 나는 점점 가난해졌다. 그렇다고 내 청춘을 잡아먹은 예술이 그만큼 보상을 해주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든 지난 시간이 빚처럼 남긴 가난을 탈출해야했고 그 방법으로 꺼내든 카드는 바로 초등학교 방과후 강사 일이었다. 사실 그때 처음 이 일을 고려해본 것은 아니었다. 이미 몇 년 전 수없이 떨어졌었고, 그때 지우지 못한 이력서 폴더를 다시 열었을 뿐. 그동안 나름 학원이나 문화센터, 유치원에서 일을 해봤으니 그래도 이번엔 승산이 있지 않을까? 이 일을 시작하면 생계도, 작업도 뭐든 내게 희망적인 미래를 보장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꼭 방과후 강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방과후강사가 되고 첫 수업에서 만난 아이가 있었다. 미래에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명함디자인을 했는데 그 아이는 이발사가 되고 싶다고 자기 이름 옆에 빗과 가위를 그렸었다. 그 아이는 수업 첫 날을 빼고는 거의 교실에서 공을 차고, 달리기를 하고 5초 이상을 자리에 앉아있지 못했다. 나는 그런 애를 붙잡고 혼내고, 소리 지르고, 달래다 나중에는 포기하고 그냥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관심 있어 하는 활동을 짧게 나누어 여러 가지를 하고 갈 수 있게 했다. 그렇게 뜨거운 3개월을 보내고 수업 마지막 날 그 아이는 미술을 또 신청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펄쩍 놀라 뭐라 대꾸를 못했는데 그런 내게 그 아이는 재차 미술을 또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자기를 반겨 줄 수 있는지 내 마음을 알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아이 앞에서 나는 끝까지 밝은 얼굴로 답해 주지 못했고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수업의 강의료는 1년을 4분기로 쪼개 분기마다 새로 신청을 받고 (수강인원)곱하기(얼마)로 계산된다. 그래서 아이들이 많이 신청하면 신청할수록 강의료가 많아지니 강사들은 수강생을 늘리기 위해 간식세례도 퍼붓고, 선물도 주고, 사비로 광고지를 몇 천 장씩 제작해 분기마다 배포한다. 그런 치열한 홍보전쟁 속에서 어수룩한 신입이었던 나의 수업은 있던 애들마저 점점 빠졌기 때문에 분기가 바뀌는 시점은 늘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또 기존의 하던 아이들이 빠지면 정든 아이들과 헤어져 섭섭한 건 물론이고 아이들마다 어떤 소재에 관심이 있고, 무슨 재료를 좋아하며 얼마만큼 해낼 수 있는지 이제 겨우 파악했다 싶으면 끝나는 것도 아쉬웠다. 미술수업이란 게 강사 혼자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그리던 계획을 현장에서 실제로 해보고 아이들의 반응을 확인 한 뒤 그에 맞게 수업을 수정하고 보완해야하는데 이렇게 짧은 호흡의 수업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에 어려움이 많다. 결국 작년 겨울에는 애들이 빠지고 빠지다 결국 딱 일곱만 데리고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학교에서도 폐강하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단촐 했던 수업이 나에게는 가장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숫자가 적으니 아이들이 평소에 해보고 싶어 한 것들을 다 해볼 수 있었고, 아이들하고 미주알고주알 얘기도 많이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통장 잔고만 생각하면 아이들이 많을수록 좋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숫자가 적어야 좋고, 어쨌든 새 분기는 늘 긴장되고 어려운 시기다.
방과후 강사들 사이에선 방과후 모집 공고가 나는 12월~1월까지 거의 전쟁이 난다. 이 때 내년에 수업할 학교를 잡지 못하면 백수가 되기 때문에 다들 피가 마를 수밖에 없다. 나도 재계약 된 기존학교 말고 다른 학교 몇 군데를 더 구해 보자 했지만 언제나 걸림돌은 경력이었다. 그래도 무경력 보다는 1년이라도 경력이 있으니 낫겠지 했는데 나는 단숨에 10전 10패 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이고 교육청과 방과후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고정보를 찾아 학교마다 양식에 맞춰 자기소개서와 수업안을 써서 접수 후 기다렸다 또 떨어지고, 다시 정신을 추슬러 공고를 찾는 일은 정말 지치고 힘겹다. 더 걱정인 것은 매년 이렇게 취준생이 될 생각을 하니 앞으로 내가 몇 년을 더 버틸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운 좋게도 11번의 지원 만에 딱 한군데 학교에서 합격소식이 와서 올해는 작년에 하던 학교와 새 학교, 이렇게 두 군데에서 미술수업을 하게 됐다. 게다가 새로 가는 학교는 수강하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다. 처음엔 수강료만 계산해보고 좋아라 했지만 언제나 세상 모든 일들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중간이 좋은 법. 저학년과 고학년의 수업이 겹치는 시간대엔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이 한 교실에 모이다보니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겼고, 수업이 있는 날은 하루 종일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1학년부터 하기 싫으면 절대로 안하는 6학년까지 각자의 생각을 다 들어주고 즐겁기 만한 수업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수업 외에 안전과 하교지도까지 챙기려면 난 아이들에게 자유로움보다 질서와 규칙을 먼저 얘기하게 된다. 아이들과 1분씩만 얘기 나눈다 해도 고작 두 번씩만 돌아가면 수업이 끝나서 아이들은 자기를 표현할 기회가 너무 적다. 또 만들기를 하는 날이면 더 정신이 없어서 나는 미리 기본 틀을 만들어 가고 그 위에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재료를 덧붙이는 식의 다소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활동이 된다. 수업계획안에는 분명 목공 수업이라고 써 놓고는 톱 한번, 망치 한번 쥐어보지 못하고 나무 조각만 이렇게 저렇게 고심해서 붙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미안하고 고민스럽다. 한명의 강사와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는 교실. 분명 한계는 있지만 별거 아닌 재료에 눈을 반짝이고, 새로운 경험에 몰입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이 카오스 같은 공간속에서 최대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올해 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내 바람이다.
나는 국민 학교 5학년 때 친구를 따라 미술학원이란 곳을 처음 가봤다. 처음에는 친구와 노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만 점점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져 학원에 제일 일찍 왔다 제일 늦게 가는 아이가 됐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의아한 것이 우리엄마는 처음 몇 개월만 학원비 봉투를 쥐어 보내줬을 뿐 그 후로 나는 학원비를 내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런 내게 선생님은 간식도 챙겨주시고, 칭찬으로 응원해주시고, 중학교에 들어갈 땐 교복도 선물해 주셨다. 그래서 내 맘속엔 감사한 마음과 함께 하고는 싶은데 상황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막연한 마음이 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서 창의 미술을 슬로건으로 하며 수강료가 비싼 학원에서 일하게 됐고, 일을 할수록 고민은 점점 커졌다. 왜냐하면 그 학원은 어릴 적 나같이 배우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나 올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수업료는 저렴하지만 수업의 질은 높은 방과후 학교는 평등하고 좋은 교육의 기회이고, 나는 막연하게 간직하고 있던 바람에 대한 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이제는 미술학원을 일등으로 들어서던 학생이 아닌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선생님만큼 따듯하고 멋진 모습은 아닐 수 있지만 나는 수업을 계획할 때면 들뜨고, 애들과 함께 할 때 기쁘고, 완성해놓은 작품을 보면 애들만큼 뿌듯하다. 먹고살기 위해 이일을 택했지만 단순히 나를 먹여 살린 것에 덧붙여 기쁨과 만족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이일을 시작하길 정말 잘했다. 앞으로도 즐겁고 신나는 사건으로 아이들을 오래오래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미선
작업과 먹고사는 두 문제를 고민하다 방과후강사 일을 시작했고, 먹고살기라는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칼럼에 들어간 그림은 함께 수업하는 <신정 복지관 행복센터> 13명의 친구들이 그려주었다.
저는 방과후강사입니다.
공미선 / 예술가
돈이고 뭐고 예술만 하고 살겠다며 내 모든 걸 쏟아 붓던 20대가 가고, 나는 점점 가난해졌다. 그렇다고 내 청춘을 잡아먹은 예술이 그만큼 보상을 해주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든 지난 시간이 빚처럼 남긴 가난을 탈출해야했고 그 방법으로 꺼내든 카드는 바로 초등학교 방과후 강사 일이었다. 사실 그때 처음 이 일을 고려해본 것은 아니었다. 이미 몇 년 전 수없이 떨어졌었고, 그때 지우지 못한 이력서 폴더를 다시 열었을 뿐. 그동안 나름 학원이나 문화센터, 유치원에서 일을 해봤으니 그래도 이번엔 승산이 있지 않을까? 이 일을 시작하면 생계도, 작업도 뭐든 내게 희망적인 미래를 보장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꼭 방과후 강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방과후 학교 경력 외엔 그 어떤 경력도 적지 말란 모집공고 앞에서 나는 공백의 이력서를 계속해서 들이 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메일로 접수받으면 편하고 좋으련만 방문접수의 경우에는 또 떨어질 걸 알면서도 차비와 시간까지 허비해야했다. 그렇게 한 서른 번쯤 지원하고 떨어지고를 반복하며 있는 힘을 쥐어짜던 내게 드디어 구원의 소식이 찾아왔다. ⌜띵동! ○○학교 방과후 학교 면접대상자입니다. 몇 월, 몇 일, 몇 시~⌟ 이얏호!!! 드디어 내게도 드리워진 동아줄, 나는 이것을 붙잡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리라!! 하지만 면접장에 들어선 내게 처음으로 날아온 질문은 슬프게도 ‘방과후 경력이 하나도 없네요?’ 이었다. 누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스펙 달고 나오나, 경력자만 뽑으면 비경력자들은 평생 계란처럼 교문만 두드리다 깨져야하나... 이렇게 후들거리던 면접이 끝나고 나는 당연히 떨어졌다 생각했지만 어쩌다 합격하게 됐고, 정말 방과후강사가 되었다.
방과후강사라는 동아줄만 잡으면 뭐든 잘 풀릴 것 같았는데 학교에서의 수업은 녹록치 않았다. 처음 일하게 된 곳은 문화예술특성화 학교였는데 교감 선생님께서 교과 수업에서는 하지 못하는 활동적이고 규모 있는 만들기 수업을 원하셨다. 그래서 나는 봄이면 재활용품으로 만든 화분에 채소 모종도 심고, 여름이면 운동장에 나가 대지미술을 핑계 삼아 물놀이도 했다. 이렇게 나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중 학부모님들께 건의가 들어왔다. 그런 것이 미술수업과 무슨 상관이 있냐며 그냥 그림을 많이 그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나름대로 재밌는 수업을 한다고 했지만 현실은 그냥 그림을 잘 그렸으면 하는 성과가 우선이었다. 그 후로 내 소신에 현실을 어느 정도 희석하여 과학상상그리기나 방학숙제, 실기평가에 대비하는 그리기가 수업에 덧붙여졌다. 특히 학부모님들의 평가가 있는 공개수업이나, 분기가 바뀔 때면 더욱 그 기대에 부흥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난다. 그런 욕심이 과해지면 바로 아이들을 향한 닦달로 이어져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지치고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다시 흥미와 호기심을 되찾아 줘야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학교, 부모님, 학생들, 그리고 나의 소신을 다 균형 있게 충족시키고 싶은데 아직은 좌충우돌 하고 있다.
내가 방과후강사가 되고 첫 수업에서 만난 아이가 있었다. 미래에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명함디자인을 했는데 그 아이는 이발사가 되고 싶다고 자기 이름 옆에 빗과 가위를 그렸었다. 그 아이는 수업 첫 날을 빼고는 거의 교실에서 공을 차고, 달리기를 하고 5초 이상을 자리에 앉아있지 못했다. 나는 그런 애를 붙잡고 혼내고, 소리 지르고, 달래다 나중에는 포기하고 그냥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관심 있어 하는 활동을 짧게 나누어 여러 가지를 하고 갈 수 있게 했다. 그렇게 뜨거운 3개월을 보내고 수업 마지막 날 그 아이는 미술을 또 신청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펄쩍 놀라 뭐라 대꾸를 못했는데 그런 내게 그 아이는 재차 미술을 또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자기를 반겨 줄 수 있는지 내 마음을 알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아이 앞에서 나는 끝까지 밝은 얼굴로 답해 주지 못했고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수업의 강의료는 1년을 4분기로 쪼개 분기마다 새로 신청을 받고 (수강인원)곱하기(얼마)로 계산된다. 그래서 아이들이 많이 신청하면 신청할수록 강의료가 많아지니 강사들은 수강생을 늘리기 위해 간식세례도 퍼붓고, 선물도 주고, 사비로 광고지를 몇 천 장씩 제작해 분기마다 배포한다. 그런 치열한 홍보전쟁 속에서 어수룩한 신입이었던 나의 수업은 있던 애들마저 점점 빠졌기 때문에 분기가 바뀌는 시점은 늘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또 기존의 하던 아이들이 빠지면 정든 아이들과 헤어져 섭섭한 건 물론이고 아이들마다 어떤 소재에 관심이 있고, 무슨 재료를 좋아하며 얼마만큼 해낼 수 있는지 이제 겨우 파악했다 싶으면 끝나는 것도 아쉬웠다. 미술수업이란 게 강사 혼자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그리던 계획을 현장에서 실제로 해보고 아이들의 반응을 확인 한 뒤 그에 맞게 수업을 수정하고 보완해야하는데 이렇게 짧은 호흡의 수업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에 어려움이 많다. 결국 작년 겨울에는 애들이 빠지고 빠지다 결국 딱 일곱만 데리고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학교에서도 폐강하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단촐 했던 수업이 나에게는 가장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숫자가 적으니 아이들이 평소에 해보고 싶어 한 것들을 다 해볼 수 있었고, 아이들하고 미주알고주알 얘기도 많이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통장 잔고만 생각하면 아이들이 많을수록 좋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숫자가 적어야 좋고, 어쨌든 새 분기는 늘 긴장되고 어려운 시기다.
뉴스에서 비정규직, 계약직 뭐 이런 얘기가 나오면 그건 늘 남의 얘기였다. 왜냐하면 나는 늘 고용계약서 조차 쓰지 않는 파트타임 알바생이었으니까. 지금은 방과후강사가 되어 나름 비정규직으로 승격되었지만 불안감은 그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방과후강사로 1년을 일하고 새 학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나는 일하는 학교에 다시 재계약이 될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하고 불안했다. 하지만 학교에 뭔가 대놓고 물어보기는 어려워서 몇 주를 고민하다 문의를 했다. 천만다행으로 학생 및 학부모의 만족도 조사에서 일정 기준을 넘으면 2년까지는 자동으로 재계약이 된다 해서 올 한해 일자리를 보장 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내년에도 나는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 재계약이 안돼서 애들과 인사도 못하고 떠나야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은 여전하고 비정규직은 정말 서럽다.
방과후 강사들 사이에선 방과후 모집 공고가 나는 12월~1월까지 거의 전쟁이 난다. 이 때 내년에 수업할 학교를 잡지 못하면 백수가 되기 때문에 다들 피가 마를 수밖에 없다. 나도 재계약 된 기존학교 말고 다른 학교 몇 군데를 더 구해 보자 했지만 언제나 걸림돌은 경력이었다. 그래도 무경력 보다는 1년이라도 경력이 있으니 낫겠지 했는데 나는 단숨에 10전 10패 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이고 교육청과 방과후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고정보를 찾아 학교마다 양식에 맞춰 자기소개서와 수업안을 써서 접수 후 기다렸다 또 떨어지고, 다시 정신을 추슬러 공고를 찾는 일은 정말 지치고 힘겹다. 더 걱정인 것은 매년 이렇게 취준생이 될 생각을 하니 앞으로 내가 몇 년을 더 버틸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운 좋게도 11번의 지원 만에 딱 한군데 학교에서 합격소식이 와서 올해는 작년에 하던 학교와 새 학교, 이렇게 두 군데에서 미술수업을 하게 됐다. 게다가 새로 가는 학교는 수강하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다. 처음엔 수강료만 계산해보고 좋아라 했지만 언제나 세상 모든 일들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중간이 좋은 법. 저학년과 고학년의 수업이 겹치는 시간대엔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이 한 교실에 모이다보니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겼고, 수업이 있는 날은 하루 종일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1학년부터 하기 싫으면 절대로 안하는 6학년까지 각자의 생각을 다 들어주고 즐겁기 만한 수업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수업 외에 안전과 하교지도까지 챙기려면 난 아이들에게 자유로움보다 질서와 규칙을 먼저 얘기하게 된다. 아이들과 1분씩만 얘기 나눈다 해도 고작 두 번씩만 돌아가면 수업이 끝나서 아이들은 자기를 표현할 기회가 너무 적다. 또 만들기를 하는 날이면 더 정신이 없어서 나는 미리 기본 틀을 만들어 가고 그 위에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재료를 덧붙이는 식의 다소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활동이 된다. 수업계획안에는 분명 목공 수업이라고 써 놓고는 톱 한번, 망치 한번 쥐어보지 못하고 나무 조각만 이렇게 저렇게 고심해서 붙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미안하고 고민스럽다. 한명의 강사와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는 교실. 분명 한계는 있지만 별거 아닌 재료에 눈을 반짝이고, 새로운 경험에 몰입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이 카오스 같은 공간속에서 최대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올해 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내 바람이다.
나는 국민 학교 5학년 때 친구를 따라 미술학원이란 곳을 처음 가봤다. 처음에는 친구와 노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만 점점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져 학원에 제일 일찍 왔다 제일 늦게 가는 아이가 됐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의아한 것이 우리엄마는 처음 몇 개월만 학원비 봉투를 쥐어 보내줬을 뿐 그 후로 나는 학원비를 내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런 내게 선생님은 간식도 챙겨주시고, 칭찬으로 응원해주시고, 중학교에 들어갈 땐 교복도 선물해 주셨다. 그래서 내 맘속엔 감사한 마음과 함께 하고는 싶은데 상황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막연한 마음이 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서 창의 미술을 슬로건으로 하며 수강료가 비싼 학원에서 일하게 됐고, 일을 할수록 고민은 점점 커졌다. 왜냐하면 그 학원은 어릴 적 나같이 배우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나 올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수업료는 저렴하지만 수업의 질은 높은 방과후 학교는 평등하고 좋은 교육의 기회이고, 나는 막연하게 간직하고 있던 바람에 대한 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이제는 미술학원을 일등으로 들어서던 학생이 아닌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선생님만큼 따듯하고 멋진 모습은 아닐 수 있지만 나는 수업을 계획할 때면 들뜨고, 애들과 함께 할 때 기쁘고, 완성해놓은 작품을 보면 애들만큼 뿌듯하다. 먹고살기 위해 이일을 택했지만 단순히 나를 먹여 살린 것에 덧붙여 기쁨과 만족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이일을 시작하길 정말 잘했다. 앞으로도 즐겁고 신나는 사건으로 아이들을 오래오래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미선
작업과 먹고사는 두 문제를 고민하다 방과후강사 일을 시작했고, 먹고살기라는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칼럼에 들어간 그림은 함께 수업하는 <신정 복지관 행복센터> 13명의 친구들이 그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