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문화 재단
  •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이미지입니다.
  • 곁봄
  • 다듬어지지 않은 세계를 만날 때
  • 강지윤 _예술가
  • 2018.05.30
24호 곁봄 
다듬어지지 않은 세계를 만날 때
강지윤 / 예술가


나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늘 어렵다. 그리고 내가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문화예술교육 외에는 없으니, 결국 문화예술교육으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언젠가 흘리듯 그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 누군가로부터, 그 어려움에 대해서 써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 어려움에 대해 고민해보았으나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나 답을 떠올리진 못했다. 어떤 결론도 짓지 못했다. 그렇기에 한 번 더 물을 수밖에 없다.

왜 (문화예술교육으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어려울까.


너무 느리거나 빠른 아이들

그보다 ‘아이들’이라고 지칭하는 이들은 대체 어디까지인지를 먼저 물어야겠다. 아이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어린이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보통 공공적인 개념에서의 어린이들은 일반적으로 중학교에 진학하는 14세 이전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8세 미만, 8세에서 10세, 혹은 11세에서 13세의 집단으로 묶인다. 미취학,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의 기준으로 나뉜 것임은 빤하다. 하지만 과연 어린이들을 연령과 교육과정을 기준으로 무리 지을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어린이를 하나의 집단으로 카테고리화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아이들은 너무 많이 말하고, 어떤 아이들은 너무 적게 말한다. 어떤 아이들은 너무 빨리 끝내고, 어떤 아이들은 집에 갈 때까지 한 가지만 붙든다. 어떤 아이들은 말하기만 하고, 어떤 아이들은 듣기만 한다. 어떤 아이들은 정확하게 시키는 대로 하고, 어떤 아이들은 전혀 예상치 않은 일들을 한다.

사람들은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매끄럽게 다듬어져 간다. 똑같은 기준을 요구받고 동일한 목표로 경쟁하면서 비슷비슷한 보통의 사람이 되어간다. 차이가 줄어들고 안정된 집단이 된다. 비로소 어떤 무리로 비춰진다. 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같지가 않았다. 내게 어린이들은 돌출된 부분 없이 매끈하게 묶어낼 수 없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그토록 다른 것이 문제인가?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차이들이 전혀 문젯거리로 인식되지 않는 것 같았다. 누가 무언가를 1분만에 다 했다고 하든, 끝끝내 붙잡고 있다가 미처 완성을 하지 못하고(여기서 완성과 미완의 기준은 어른의 것이다) 가든 말이다. 친구가 먼저 끝냈다고 해서 초조해 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속도를 잘 알고 있었고, 과속하려고 하지 않았다. 느린 것도 빠른 것도 그대로 괜찮았다. 누군가가 선생님이 말하는 대로 하고, 누군가는 그와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 낸다 해도 아이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수동적이라며 안타까워 하거나, 창의성이 있다고 놀라워 하는 것은 어른들의 시선이었다.

수업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계획된 이야기를 전하려고 애썼지만 아이들은 그런 우리의 목표 따위는 전혀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완성된 하나의 결말을 그려내는 것은 그들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예컨대, 아이들은 행복한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거미 이야기를 하고, 어느샌가 TV에서 본 북극 이야기로 옮겨갔다가 어제 먹은 떡볶이 이야기를 재잘대곤 했다. 그들 앞에 놓여진 세계는 1, 2, 3, 4처럼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y 다음에 ㅅ, 그 다음에는 &와 2가 나란하게 이어지는 듯 했다.

내가 어려움을 느꼈던 것은 어린이들의 대단한 차이를 보는 일도, 혹은 좀처럼 기승전결로 나아가지 못하는 수업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학습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조금 더 내가 속한 세계 쪽의 문제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마치 모든 창의성과 자유를 허락할 듯이 “자, 이제 각자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곳까지 가보세요.” 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을 러닝머신에 올려놓는 것 같다. 저만의 속도로 걷거나 뛰던 아이들은 결국 제자리에 내린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다.


     “자 이제, 자러 가기 전에, 다 함께 교가를 부릅시다!” 덤블도어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미소를 띠고 있던 선생님들의 얼굴이 다소 굳어졌다. (중략)
     “모두들 아무거나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락으로 부르세요.” 덤블도어가 말했다. “그러면 시작!”
     그리고 전교생이 고함지르듯 노래를 불렀다. (중략)
     모두들 다른 시간에 그 노래를 마쳤다. 결국, 위즐리 쌍둥이 형제만이 남아 매우 느린 장송 행진곡으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덤블도어는 마지막 몇 소절은 요술지팡이로 지휘를 했고 그들이 노래를 마치자, 큰소리로 박수를 쳐주었다.
     “오, 음악.” 그가 눈을 훔치며 말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멋진 마법이여! 자 이제, 취침 시간. 모두 출발!”

     김혜원 역, J.K. 롤링 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1』, 문학수첩, 182-183쪽

우리는 제멋대로의 속도와 리듬을 가진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소음이 아닌 음악으로 들을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오, 음악.” 하며 감탄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


어린이의 말들은 어디에 있는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교육은 실제로는 다른 대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로 학부모들이다. 특히 나이가 어린 친구들일수록, 거의 백 퍼센트 부모님의 의지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그러다 보니 홍보 역시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한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받(아야 하)는 설문지는 어린이들과 함께 작성해 달라고 요청하긴 해도, 늘 어른의 마음이 먼저 투영되어서 돌아온다. 프로그램의 학습 목표나 기획 의도 역시 어른의 눈높이에 맞춰 만들어진다. 프로그램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어른의 세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원금을 받기 위해 관공의 딱딱한 양식과 용어를 사용하고 ”각기 다른 예술 장르를 하나의 주제로 엮어내는 통합 교육을 목표로 함”, 그 다음에는 홍보를 위해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친절한 언어를 사용하며 ”토요일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무료 미술 교육 참여자를 모집합니다~!”, 프로그램을 마친 후에는 학부모들에게 받은 설문지 ”주차와 수업 공간이 협소하여 불편했음”과 함께 보고서를 작성하여 다시 관공으로 보낸다. 거기에는 사업비 정산 등을 포함하여 예측했던 성과 대비 어떤 실적이 있었는지 기재한다. ”참여누적인원 : OO명, 출석률 : OO%, 재참여의사 : OO%”

어린이들의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 아이들의 말들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어른의 말들로 정리되고 의미화되고 성과로 만들어진다. 어른의 말들이 평가하고 개선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인디언 치마 따위를 입고 춤 연습을 하면서 대체 이건 누굴 위한 거야? 하며 투덜대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린이 문화예술교육은 정작 어린이를 위한 것이 아닐뿐더러, 실제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런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은 누구인가? 정말로 어린이가 맞는가? 맞다면, 어린이들의 성장과 변화는 누가, 어떤 말로 담아낼 수 있는가? 간혹 ‘결과보고집’에 어린이들의 소감-말이 실린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어른들만의 세계 속에 그런 낱장의 장식물로 머물게 할 수는 없다.

우리 역시 작년에 아이들이 만든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정말로 어른들만의 말만 남았을 것이다. 아니, 사실 그렇지 않았다고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어른인지라 아이들의 말들을 ‘잘’ 다듬으려 애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집어넣기 위해서. 그리하여 학부모와 지원단체에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늘 언제부터 어른이 되는가 고민하곤 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너무나 어른이구나.)

그럼에도 아이들이 직접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려 만든 그림책은 요약이 불가능한, 기승전결이 없는 세계이다. 문제될 것은 없다. 애초에 우리의 삶은 정리해서 말할 수 없고 기승전결이 또렷이 새겨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알지 않는가. 화나거나 슬프거나 기쁜 감정들은 모두 동시에 몰아치고 사라진다. 동시에 들고 난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가 어렵다는 것에 안도한다. 쉽고 가벼이 여기는 것만큼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일이 어디 또 있을까.



01
『고양이의 이상한 꿈』, 2017
글 •그림 / 김서현, 김요셉, 박가현, 박주리, 박준희, 배수현, 윤승현, 이하윤, 장의주, 정윤아, 조관휘, 조재호, 차윤주, 황수빈, 홍예나 





강지윤
시각예술 작업을 하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한다. 문화예술교육은 그 중에 하나. 교육을 기획하거나 이끄는 것, 관찰하는 일을 간간히 했다. 그렇다고 능숙해 지지는 않는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항상 어렵고 서툴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