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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으로서의 의례
  • 박복선 _성미산학교 교장
  • 2013.12.31

 

 

 

한때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나요, 잘 못해도 서툴러도 밥 잘 먹어요’라는 노랫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젊은이들의 머리 스타일이나 옷차림을 보면 얼굴을 찌푸리고, 툭하면 ‘요즘 애들 예의 없다’고 혀를 차는 ‘꼰대’들을 향한 야유다. 많은 젊은이들이 속이 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점심시간에 밥을 먹다 고등학생이 되도록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를 보면 생각이 좀 많아진다. 아이들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쳐야 하나, 젓가락질 잘하는 게 교육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교에서 그런 것까지 해야 하나, 그런데 정말 젓가락질을 잘해야만 하는 이유는 뭐지? 그러다 결국 한마디 한다. “젓가락질을 좀 배워야겠다.”

 

유가 전통에 의하면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육예(六藝)를 익혀야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예(禮)였다. 예란 조상의 영혼을 받들어 모시는 의례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조상의 영혼이 산 사람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을 믿지 않는 시대에 유교의 예는 사라지거나 의미를 잃었다.


그러나 예의 정신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틸리히가 말하는 ‘궁극적 관심’은 전통적인 종교의 성쇠와 상관없이 우리 존재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의미 있는 존재와의 소통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과의 교감이라든가, 깊이 있는 영적 체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감 같은 것. 이러한 소통은 적절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하자작업장학교 학생들은 2004년 라오스에 다녀왔는데, 이때 ‘바씨’라는 의례를 경험했다. 라오스를 떠나기 전에 세 마을의 촌장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단을 쌓고 그것을 쌀과 꽃과 종이로 아름답게 장식을 했다. 마을 사람들과 학생들이 모두 단 주위를 계속 도는데, 마을 사람들은 부딪히는 학생들의 손에 명주실을 묶어 주면서 기원을 했다. “아프지 마라, 행복하게 살아라, 언제든 돌아와라.” 단을 몇 바퀴 돌 때쯤 해서는 모두 다 엉엉 울었다.


무엇이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작 한 달 정도 머문, 낯선 나라에서 온 어린 손님들이었지만 진심으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진심으로 행복을 기원하는 그들의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라오스의 낯선 사람들을 통해 환대와 돌봄이 무엇인지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오롯이 담아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바씨라는 의례라는 것도.

 

우리는 대부분 이런 좋은 의례를 경험하지 못했다. 종교 공동체를 제외하면 사회 전반적으로는 의례 자체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좋은 의례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물론 의례라는 형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관이 주관하는 행사에서는 국민의례라는 것을 한다. 심지어는 프로 스포츠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애국가를 틀어 관중들을 일으켜 세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사라질 리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문자로 계좌번호를 돌리는 것이나, 돈만 내고 밥 먹으러 가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의례가 사라지는 것, 속화(俗化)되는 것은 우리가 천박한 실용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해(利害)’의 관점에서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같은 것은 무시한다. 대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 공동체와의 깊은 연결감, 삶의 영적 차원에 대한 이해 같은 것은 점점 드문 경험이 되고 있다. 이런 흐름을 되돌리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천박한 실용주의는 너무 넓고 깊게 퍼져 있다.


결국 우리는 교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먼이 말한 것처럼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가치를 가르칠 수 있는 곳은 학교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학교라는 말이 ‘여가’ 혹은 ‘격리’를 의미하는 ‘스콜레(Schole)’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음미할 가치가 있다. 지금이야말로 ‘학교는 세상의 실용주의 흐름에서 벗어나(격리되어)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실질적으로 구현해야 할 때다.


의례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하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물론 의례는 마음과 함께 가는 것이다. 국민의례가 진정한 의례가 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이 국가가 좋은 공동체라는, 혹은 좋은 공동체가 되어간다는 생각과 느낌을 공유해야 한다. 그런 마음이 함께 가지 않으면 그것은 허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좋은 의례를 만든다는 것은 좋은 마음을 만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의례를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형식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바씨라는 의례를 통해 환대와 돌봄이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학생들은 환대와 돌봄을 강렬하게 경험하게 되었고, 잘 알게 되었다.  
 
“젓가락질을 좀 배워야겠다.” 이런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조금 당황스러워 한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네.” 한다. 물론 그 아이가 바로 젓가락질을 배우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의상 그렇게 대답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래도 고맙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그걸 꼭 배워야 하나요?” 하고 되묻는다. 막상 그렇게 물으면 나도 할 말이 궁하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이 이런 것들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우주를 영접하는 일이다. 자신에게 우주를 공양하는 일이다.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인연을 느끼는 일이다. 요즘 같이 안녕하지 못한 시대에, ‘밥을 먹는다’는 것은 은총이다. 그것은 거룩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밥을 먹을 때마다 기도를 하지는 않더라도,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하는 게(偈)를 외지 않더라도, 잠깐이라도 경건해졌으면 좋겠다. 그게 젓가락질 잘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면 나도 설명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다만 밥을 먹을 때, 몸과 마음을 삼가는 어떤 것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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