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곁봄
- '21세기 장인학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PATI'
- 강원재 _OO은대학연구소 1소장
- 2013.11.10
파주출판도시에 위치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1층 갤러리와 다목적홀, 그리고 넓은 회의실을 지나 한 켠으로 위치한 까페에서 커피 한 잔 뽑아들고 2층 도서관과 헌책방 밖으로 펼쳐진 야외 계단식 무대를 구경하면서 3층으로 향했다. 벽을 따라 포스팅된 커다란 타이포그라피들이 이곳이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PATI가 위치한 곳임을 알려준다.
닫힌 문 밖에서 전화를 걸어 인터뷰 차 찾아왔음을 알리고 기다리다 보니 어디선가 주워온 것이 분명한 쇼파 세트 한 쪽으로 한 명의 청년이 곯아 떨어져 있다. ‘기둥스승’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명함을 건네는 최준석 선생을 따라 들어선 수업풍경은 시선보다 먼저 열기로 다가왔다. 7~80평은 됨직한 내부공간은 역시 어디선가 주워온 오래된 자개장과 재봉틀, MDF수납장 등을 재활용해서 칸막이 또는 사물함으로 사용하거나 책걸상으로 활용하고 있는 작업장 겸 교실은 협업을 위해 전체적으로 열려있으면서도 자신의 작업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20세 전후되는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탈바가지를 만들고 있었는데, 한 쪽에서는 자기 작업을 두고 몇 명이 함께 토론을 하기도 하고, 한 쪽에서는 작업에 몰두하느라 누가 곁에서 지켜보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좀 지나다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대안교육공간 민들레와 하자작업장학교 출신의 청년들과 해방촌에서 잡지를 만들던 친구다.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몸의 에너지와 긴장감이 확 느껴진다.
작업에 대해 물어보니 유랑극단 <출몰극장> 멤버들과 함께 며칠 있다 자신들이 직접 출연하게 될 공연에 쓰이는 동물인형탈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 대답이 신나있어 재미있냐는 질문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최준석 선생에게 수업의 취지를 물어보니 타이포그라피나 디자인은 예술과 문화 전반과의 연관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어서 자기 분야만 알아서는 잘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연극이나 시, 건축, 춤, 합창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활동을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는 방식으로 수업으로 구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1.
PATI는 일반대학 과정에 해당하는 4년8학기의 ‘한배곳’과 대학원과정에 해당하는 2년4학기의 ‘더배곳’으로 운영되는데, 2013년 2월24일 공식적인 입학식 겸 개교식을 가졌다. 입학전형은 서류심사와 2박3일의 워크숍을 통해 이뤄지는데, ‘생각하는 손’,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 깨우기’, ‘온경험워크숍’을 거치면서 상호면접을 보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올해 한배곳 16명과 더배곳 8명으로 총 24명이 입학했다. 앞으로 100명 규모의 학교로 운영해갈 계획인데, 교육의 목적은 “자기다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소수만 살아남는 타이포그라피 디자이너로서 먹고사는 길을 고집하기보다는 “자기 삶과 일상을 디자인 할 수 있는 동네빵집의 주인”으로서 더불어 먹고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학교의 설립자인 안상수(날개)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바우하우스를 지향하는 PATI는 작지만 세상에서 제일 큰 학교”다. ‘생각하는 손’을 가진 수많은 장인들이 곧 스승이고, 그분들이 계신 곳이 강의실이다. 그래서인지 주요 학사과정으로 교류수업과 여행수업을 두고 있다. 승효상건축학교, 다중지성의정원, 하자센터 , 스위스바젤디자인학교(The Basel School of Design), 베이징중앙미술학원(China Central Academy of Fine Art, CAFA)등과 교류수업을 진행하고 지리산, 일본, 중국, 유럽으로 이어지는 여행수업을 거치면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서부터 파주지역, 서울․경기, 전국, 그리고 아시아와 세계는 PATI의 캠퍼스가 된다.
PATI는 지역을 마을로 만들어가는 학교이고 마을이 함께 운영하는 학교이다. 이 학교가 들어서면서 조용하던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와 파주출판문화도시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인프라만 갖추고 있던 곳곳의 도서관은 학교의 도서관이 되고, 업무적으로만 교류가 이어지던 이곳에서 파티와 마을장터가 생겨나고 쓰임이 많지 않던 공간에서는 음악축제가 개최되고 지역의 갤러리에서는 전시와 함께 공부하는 워크숍을 운영되면서 새로운 관계들이 맺어지고 있다. 올해 처음 시작한 PAJU FREE MUSIC FESTIVAL이 이러한 관계의 시간을 축적한다면 지역적 고민과 실천이 세계적인 관계와 비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PATI는 소유하지 않고 공유하는 학교이다. “학교의 이름으로 어떠한 재산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날개 선생의 확고한 신념이다. 모든 등록금과 기부금은 학교 운영에 사용되고, 캠퍼스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고 연결하는 것”이며, 시대적인 삶 디자인의 실험들을 치열하고 해가되 역시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다. 여타의 일반 제도권의 학교들이 실험과 성찰없이 유행하는 아이템과 레토릭을 가져다 자기 것인 양 쓰면서 비슷해져 버린 교육제도와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것은 공유하고 나누는 게 아니라 베끼고 훔치는 것이며, 이렇게 운영해서는 교육이 학습자들의 삶을 활력화하는 방향으로 착근되지 않는다.
2년 동안 개인 혹은 공동 프로젝트를 보다 전문적이고 심화해가는 더배곳은 일과 배움, 그리고 삶을 더욱 일치시키는 과정이다. 사회적 협력이 필요한 각종 공공프로젝트를 학교가 수주를 받아 이를 개인 혹은 공동의 과제로 삼아서 연구 실천하면서 장학금을 받게 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물론 한배곳도 1~2년 과정을 거친 이후에는 이렇게 발전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공공과제수행형 프로젝트학습방식은 덴마크의 ‘카오스필로츠’나 핀란드의 ‘옴니아’, 그리고 ‘하자센터’ 등에서 수행되고 있는데, 이 기관들은 학습자의 개성을 평균으로 통합하는 기존 제도적 교육방식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서로 다른 특성들의 공존과 안정성, 그리고 특히 이러한 다양성들의 일시적 화학 반응으로부터 발현되는 창의성을 먹고사는 문제로 연결하는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경험학습을 전개하고 있다.
2.
PATI의 법적 형태는 협동조합이다. 생산자협동조합으로서 현재는 이 학교의 스승들이 출자해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 학생들이 같이 출자하는 학교로서의 가능성은 열어두었지만, 현재의 법적 형태는 학교운영을 위한 선택이었을 뿐 이 학교가 어떻게 발전할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고도 한다. PATI가 펼쳐갈 앞으로를 상상해보니 실제 학교인지, 회사인지, 협동조합인지 정체성을 세우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세울 이유 또한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학교의 이름으로 소유하려는 게 없으니까 말이다. 공공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재정을 처리하려는 누군가에게 그 순간 회사일 수 있고, 기부와 출자를 통해 공동의 돈이 아닌 이익을 나누려는 어떤 이들에게는 협동조합이며 그리고 함께 배우며 삶의 디자이너로 성장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학교가 되면 그만인 것이다.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이라는 부제를 가진 [장인]의 저자 리처드 세넷은 이 책을 통해 일과 삶을 일치시키는 장인노동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 번째는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사람들에게 일을 잘해보자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두 번째는 손을 사용할 기회를 빼앗긴 현대 기술의 사용자들이 일상에서 손의 기능을 어떻게 숙달할 수 있느냐, 그리고 실무자의 경험적 척도와 관리자의 계측적 척도의 충돌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까이다. 결론적으로 세넷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사람들 스스로가 하고자하는 일에 대한 부단한 수련과 연마를 통해 이뤄가야 하며, 이는 일상생활에서 물건을 보고, 몸을 움직이고, 도구를 쓰는 방식을 새롭게 바꿈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파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막 생겨난 21세기의 새로운 바우하우스, PATI는 세넷이 제기한 문제들을 직면하면서 학교의 운영과제로 받아 안고 있다. 짧은 기간동안 PATI의 성취가 이후로도 지속될 것인지, 그리하여 ‘생각하는 손’을 가진 21세기 작업자들의 학교, 마을이 될 것인지, 그 모습은 어떠할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