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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품위 있는 문화사회'는 가능한가?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2.12.24

 

 

 나는 품위 있는 사회를 꿈꾼다. 품위 있는 사회는 위험사회로의 길이 아니라, 문화사회로의 길을 모색하려 할 때 가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스라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1996)라는 저서에서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고 정의한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아비샤이 마갈릿은 이러한 관점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할 가능성보다 품위 있는 사회를 확립할 가능성을 더 낙관한다고 말한다. 

 

 ‘제도적 모욕’이 없는 품위 있는 사회라는 사회적 이상은 분명 매혹적이다.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 빈민법(1601)의 독선과 독일 나치 하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법인 뉘른베르크법(1935) 같은 예는 제도적으로 사람들을 모욕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마갈릿은 이런 법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비열한 규정과 부패한 공무원이 있는 사회가 비열한 규정과 엄격한 공무원이 있는 사회보다 오히려 낫다”고 말한다. 그런 법․제도는 항상 언제나 법치(法治)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이등시민의 존재 자체를 정당화하는 법치(法恥)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은 시장사회에 대한 맹신이 절대적 신앙이 되어버린 우리 현실에서 여전히 의미가 있다. 나와 우리는 시장사회에 사람들을 모욕하는 권력을 가진 제도가 없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매일매일 실감하고 있다. 

 

 문명 사회에서 모욕의 본질은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다루는 데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런 제도적 모욕이 없는 품위 있는 사회라는 사회적 이상을 추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회적 이상은 추구하는 것이지,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와 국가의 문화정책 또한 정책과 제도를 통해 어떤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려는 데 그 본질이 있다. 특히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미 그 역사적 시효가 끝장났다고 판명된 신자유주의적 성장의 종언을 넘어, 우리 모두가 승자가 되는 ‘행복경제학’을 위한 문화사회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할 새로운 전환기에 와 있다는 절실한 자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경제성장이 풍요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물질의 풍요와 행복은 엄연히 다르다. 이제 “경제성장은 열역학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성장의 종언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세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우리 문화정책은 이러한 국내외 다양한 목소리들을 경청해야 한다. 그래서 문화시장화 시대의 낡은 패러다임을 넘어, 전 지구적 전환기에 부합하는 문화정책의 새로운 프레임을 논의하고 제시할 수 있는 대화와 소통을 나누어야 한다. 이러한 대화와 소통의 방식은 이른바 ‘지침 행정’식 일방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나는 대화는 고급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정책은 항상 언제나 국민과 함께(with the people)라는 수사를 표방하지만, 이 구호의 구체적 실체를 채우는 일에는 퍽 둔감한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해 예술인복지법 시행령 추진 과정이 그렇고, 문화예술교육사 같은 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하다. 예술인복지법은 입법 취지를 충분히 살려서 추진하고 있는지, 문화예술교육사 같은 제도 시행으로 인해 학교 예술강사들이 일상적 모욕감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충분한 대화와 소통 과정이 부재하다. 정책 토론회와 세미나를 연다고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책에 관한 철학적 사유에 대한 논의와 토론 그리고 정책에 대해 상호공감하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맹자가 역설한 ‘여민(與民)의 정치’가 구현되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나는 우리 사회가 품위 있는 문화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행정의 철학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행정철학』(2006) 등의 역저를 쓴 강원대 임의영 교수의 논문 「행정에 관한 철학적 사유의 조건」(2002)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임 교수는 이 논문에서 1960년대 이후 국내외 주류행정학이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 태도를 취하면서 형식적 합리성은 강조하되, 목적 자체의 타당성에 관한 논의는 회피했다고 지적한다. 주류행정학이 철학에 관한 사유 자체를 멀리하면서 “가치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를 신조로 삼았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이러한 주류행정학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행정철학을 위한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의 행정학이 철학하기의 근본원리와 방법에 대한 충분한 소통과 교섭을 통해 상상력, 개방성, 진정성 같은 가치들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이 요구된다는 임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상사회를 꿈꾸는 능력으로서 상상력, 자유를 본질로 하는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개방성, 그리고 참된 자기 대면을 통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만들어가려는 진정성에의 의지(will to the authenticity)를 발현하는 진정성의 가치야말로 새로운 전환기에 처한 우리 현실에서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행정의 철학적 덕목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정의 철학 관점에서 문화예술교육 정책을 비롯한 문화정책의 새로운 방향전환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정부 정책이 다 그렇지만, 문화정책은 우리 사는 세상이 어떤 사회를 꿈꾸고 어떤 미래를 추구하려 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아이들의 미래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판별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이 바로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른바 교육불가능 시대를 운운하는 이 시점에서 나는 문화예술교육이 아이들의 미래를 드러낼 수 있는 가치의 실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 교육자 윌리엄 에어스는 『가르친다는 것』에서 교사는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아이에게 눈을 떠야 한다”며, 아이들에게 성적 등의 방식으로 꼬리표를 붙이는 일은 “아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춘다”고 언급한다. 이런 주장은 현장에서 만난 김용택 시인, 이기복 前 경화여중 교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심광현 교수의 주장과도 통한다. 초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예술교육을 해온 김용택 시인은 “예술적인 감성은 세상을 자세히 보게 하고, 자세히 보면 생각이 나는데, 그 생각을 또 예술적으로 정리하게 한다”고 말한다. 심광현 교수는 최근 저서 『미래 교육의 열쇠 창의적 문화교육』(살림터)에서 혁신학교 교과과정 운영 사례를 통해 우리 교육의 방향이 아이들의 발달 단계에 걸맞는 교과과정의 전면적 개편을 통해 ‘창의적 문화교육’의 가치지향을 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육은 일종의 다리 놓기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미래 세대의 아이들에게 어떤 가치를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결국 우리 사회가 어떠한 방향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응답 과정 속에서 제출될 수 있다. 핀란드 같은 북유럽의 정책 사례를 학교 현장에 모방한다고 해서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교육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정부, 시장, 시민사회가 일종의 사회적 합의를 하고,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인내와 헌신을 할 때에야 비로소 실현 가능할 것이다. 교육철학, 교과과정, 평가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논의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 입시선발 제도에 대한 평가 방식이 획기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평가(evaluation)라는 단어의 뿌리는 가치(value)이다. 진정한 평가는 아이들이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느냐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 문화부-교육부 간에 부처간 협력과 상호대화의 필요성은 당연한 노릇이다. 정부 부처간에 협력과 소통이 없는 한, 학교 안 교사와 학교 밖 예술강사 사이의 대화와 소통 부재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학교 예술강사를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제임스 C.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농장이나 전후 일본에서의 삼나무 심기처럼 단일수종 조림 사례를 들어 삼림을 하나의 상품기계로 크게 단순화할 경우, 지금 당장의 성과는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2세대 나무에 이르러선 20~30% 생산 손실이라는 놀라운 퇴행이 일어나면서 결국 ‘숲의 죽음’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숲의 다양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이러한 폐단에 대해 ‘행정가의 숲’이라고 개념화하는데, 이에 대한 대안은 결국 ‘자연주의자의 숲’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새 정부 문화정책의 기조와 비전이 행정가의 숲이 아니라 자연주의자의 숲을 가꾸려는 정책과 제도로 발현될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그런 정책과 제도야말로 품위 있는 문화사회를 위한 위대한 ‘희망의 원리’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